제5장 무당(武當)… 아니, 무이궁(武夷宮)의 비밀병기
“괜찮을까?”
곡운이 물었다.
“뭐가?”
“이렇게 술 냄새 풀풀 풍기고 가도 괜찮겠냐고?”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네 사부님도 네가 얌전히 앉아 있을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았을 테니까.”
걸음을 멈춘 곡운이 눈을 흘겼다.
“그게 명색이 벌을 받고서 돌아가는 친구에게 할 말이냐?”
“벌을 받아? 누가? 네가? 마지막 당일 날까지 술을 퍼 마신 게 누구더라? 그럴듯한 안주를 곁들여서 말이다. 애당초 걱정을 했으면 마시지를 말던가.”
“흥,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곡운이 빈정 상한 표정으로 묵조영을 노려봤다.
“본색?”
“훗,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이 어떻느니 마음이 아프다느니 순진한 척은 다 하더니만.”
“그거하고 이거하고 같냐?”
“다를 건 또 뭐야?”
“시끄러. 네놈은 몰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잠시 회복을 한 묵조영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시끄러운 건 너지. 다른 놈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하다. 비록 세상 풍파를 다 겪었어도 얌전하기 그지없던, 오로지 수양에 애쓰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네놈이면서.”
그러자 묵조영이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할 말을 왜 네가 하냐? 나야말로 정말 순진한 아이였지.”
“순진한 놈이 계율을 지키며 열심히 수련 중인 친구에게 붕어찜으로 유혹하냐?”
곡운의 공격에 묵조영도 지지 않고 맞섰다.
“얼씨구나 좋다 하고 술까지 준비한 것은 누구더라?”
“사냥하는 것도 네가 가르쳐 줬다.”
“투전하는 것은 네가 가르쳤지. 도박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알면서도.”
“네가 가르쳐 달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네가 투전을 들고 와서…….”
그렇게 시작된 둘의 나름대로 정겨운(?) 설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이어지던 그들의 말싸움은 그들이 막 바위산을 벗어날 때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끝을 맺었다.
“삼 년 전엔…….”
“쉿!”
묵조영의 말은 곡운의 손짓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들리냐?”
곡운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저 소리.”
입을 다문 묵조영도 귀를 기울였다.
수풀의 은은한 흔들림을 뚫고 전해오는 소리는 분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였다.
묵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린다.”
“가보자.”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그들은 곧 천유봉과 접순봉을 연결하는 능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 디딜 곳도 없이 빽빽이 자리한 수목과 바위들 틈에 드물게 존재하는 공터. 공터 옆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공터에 도착한 묵조영과 곡운은 공터에서 칼부림을 하는 인물들을 보며 재빨리 몸을 감추었다.
“웬 놈들일까?”
곡운이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겠다.”
묵조영이 공터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대꾸했다.
“뭔데?”
“저 여인.”
곡운의 물음에 묵조영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한 무리의 인원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받고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일견하기에도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선… 녀?”
묵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놈들은 아까 너를 공격했다는 놈의 일행이겠군.”
“아마도.”
“어떻게 할래?”
곡운이 물었다.
“…….”
“어떻게 할 거냐니까?”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묵조영이 망설이며 말했다.
“도와… 주고 싶다.”
“한두 놈이 아니야. 실력도 만만치 않아 뵈고. 하나, 둘, 셋… 도합 여덟이군. 흠, 아까 열둘이라고 했으니까 그사이 넷이 죽었네. 아니지. 너를 공격하던 놈은 지가 알아서 뒈졌으니까 셋인가?”
“그런 것 같다.”
“휘유~ 보기보단 대단한걸. 저런 부상을 당한 채 도망 다니면서도 세 놈이나 더 처리했단 말이야?”
곡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감탄을 했다. 하나, 다소 여유로워 보이는 곡운과는 달리 수세에 몰리다 못해 절망적인 상황에까지 이른 여인의 모습에 묵조영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빨리 가자.”
“그런데 선녀치고는 좀 달리는 얼굴 아니냐? 뭐, 나름대로 미인은 미인이다만 선녀까지는…….”
“지금이 농담할 때냐?”
“알았다, 알았어. 까짓 도와주면 될 것 아니냐고.”
벌떡 몸을 일으킨 곡운이 묵조영이 뭐라 할 틈도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섯을 책임질 테니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곡운이 보내오는 전음을 들으며 묵조영도 몸을 일으켰다.
[괜찮겠냐?]
[괜찮아. 무당(武當)… 아니, 무이궁의 비밀병기가 저놈들 따위에게 당할 것 같아? 너나 조심해라. 네 무공으론 조금 버거운 상대로 보여. 정신 바싹 차리지 않고 아까처럼 징징 짜다간 골로 가는 수가 있다.]
[내가 익힌 무공이 뭔지나 알고 그러냐?]
[안 봐도 뻔하지. 고기잡이 무공이잖아.]
[망할 놈.]
농담 섞인 곡운의 말에 묵조영은 급박한 상황도 잊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웬 놈들이냐!”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무리의 우두머리, 밀은단 강서지부 휘하 삼조의 조장 노령(櫓翎)은 곡운의 출현에 긴장을 하며 소리쳤다.
“산신령.”
간단히 대답한 곡운이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데 곡운에겐 다른 이들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었다.
“좌수검(左手劍)?”
긴장된 표정으로 새로이 출현한 적을 살피던 노령의 입가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일반적으로 무인들은 좌수검을 배척한다.
좌수검은 배우기도 어려울뿐더러 배운다 해도 일정한 경지 이후엔 그 벽을 돌파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좌수검을 익힌 사람들은 정도가 아닌 편법으로 한계의 벽을 깨려 하였고, 상리에 맞지 않는 많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해서 검로(劍路)가 음험해지고 사이한 기운을 띠는 일이 종종 있었다. 바로 그것이 좌수검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게 된 이유였다.
“의천맹에도 좌수검을 익힌 놈이 있다니 웃기는군.”
일전 묵조영을 의심했던 사내처럼 노령 역시 곡운을 의천맹에서 파견한 인원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곡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웃긴, 대낮부터 재수 없게!”
같잖다는 듯 소리친 곡운이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사선으로 쳐 올라오는 검을 보며 노령의 안색이 급변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검에 당황한 것이다.
“감히 날 뭘로 보고!”
노령은 황급히 검을 들어 옆구리 쪽으로 접근해 오는 검을 쳐냈다. 하지만 잠시 물러나는가 싶던 검이 기묘하게 방향을 틀며 견정혈(肩井穴:어깨에 있는 혈도)을 찔러오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헛!”
헛바람을 내뱉은 노령이 튕기듯 몸을 틀며 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곡운이 계속해서 따라붙으며 집요하게 공격했으나 궁신탄영의 수법을 역으로 활용한 노령은 간발의 차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네, 네놈 따위에게.”
그는 치욕감에 몸을 떨었다.
눈앞의 상대는 아무리 봐줘야 겨우 스물 남짓. 풍기는 외모 또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무공은 시정잡배나 살수들이 익히는 것이라 폄하하는 좌수검. 그럼에도 수하들 앞에서 허둥대는 꼴을 보였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분노에 찬 함성과 함께 뛰어오른 노령이 무령십삼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괄무마광(刮垢磨光)에서 첨첨밀밀, 교철몽락(交綴蒙絡)으로 이어지는 연환 공격.
노령은 필승을 자신했다.
비록 최고의 무공은 아니었지만 무령십삼검의 빠르고 날카로우며 마치 끈끈한 실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펼쳐지는 연환 공격은 웬만한 고수도 경시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한데 자신감은 금방 깨졌다.
유려한 몸놀림으로 검세(劍勢)를 피하고 기쾌한 발놀림으로 허점을 파고드는 곡운의 움직임은 결코 애송이의 것이 아닌, 수없이 많은 싸움을 겪은 노고수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승기를 잡고도 결정적인 한 수를 날리지 못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쉽게 끝날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노령도 무사히 물러날 수 있었다.
“쳐, 쳐라!”
결국 곡운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노령은 수하들에게 치욕적인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눈치만 보며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싸움을 지켜보던 사내들이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곡운을 공격하고 나섰다.
곡운이 그렇게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는 사이 묵조영도 나름대로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여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 판단한 그는 세 명의 사내에게 합공을 받으며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 있는 여인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곡운의 등장으로 인해 공격하던 인원이 확 줄었지만 며칠간의 추격전, 그리고 심각한 내상과 온몸에 입은 많은 부상 때문에 여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어찌해야 한다?’
일단 치고 보자는 곡운과는 달리 묵조영은 성급하게 나서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야 여인을 무사히 구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을 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런 사치스런 고민을 하기엔 여인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좋지 못했다.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었던 여인이 크나큰 허점을 보이고, 그 허점을 놓치지 않은 사내의 일검이 제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아악!”
고통에 찬 비명성과 함께 끈 떨어진 연처럼 힘없이 날아가는 여인의 신형. 하필이면 그 방향이 천 길 낭떠러지였다.
“안 돼!”
묵조영이 다급한 외침과 함께 여인에게 내달렸다.
여인의 몸은 이미 급격하게 하강하는 중이었다.
거리는 십 장 이상.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구하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묵조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리면서 천마조를 뻗었다.
슈슈슈슉!
바람을 가르며 천마조가 여인을 향해 일자로 펴졌다.
그래도 짧았다.
천마조의 길이도 상당했지만 그 정도로는 여인을 구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묵조영의 손목이 힘 있게 꿈틀대고 천마조가 기묘한 떨림을 하는가 싶더니 천마조에 감겨 있던 낚싯줄이 섬전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뻗어나갔다.
낚싯줄은 실로 간발의 차이로 여인의 발목을 낚아챘다.
‘됐다.’
묵조영은 낚싯줄을 통해 전해오는 묵직한 힘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의식중에 ‘될까?’ 하는 의심을 했건만 천마조가 자신의 의지에 제대로 호응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제는 그녀를 무사히 끌어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활처럼 휘어지는 천마조를 몇 번 흔들었다. 그 탄력으로 인해 줄에 걸린 여인의 몸도 위아래로 요동을 쳤다.
어느 순간, 묵조영이 하루 종일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바늘에 걸린 대물을 낚아채는 듯한 힘찬 챔질을 하고, 동시에 절벽 아래로 사라졌던 여인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더니 그의 면전으로 떨어져 내렸다.
행여나 다칠까 묵조영은 재빨리, 그러면서도 최대한 신중히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향긋한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온몸이 땀과 먼지, 피로 범벅이 되어 보기 흉할 정도였지만 그 모든 사실을 잊게 해줄 만큼 그녀가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향기는 그로 하여금 천상의 향기가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었다.
‘아!’
벌써 세 번째 느끼는 감정이었다.
처음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두 번째로 비록 전음성이나마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바로 지금.
자신의 상의를 벗어 바닥에 깔고 그녀를 조심스레 눕히는 묵조영의 얼굴은 꿈에 취한 듯했다.
아쉽게도 꿈은 필연적으로 깰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
“이거야 원.”
“뭐냐, 넌?”
묵조영을 지켜보던 세 사내가 동시에 소리쳤다.
갑자기 등장한 묵조영이 생각도 못한 방법으로 여인을 구하고 편히 자리에 누일 때까지 멍하니 지켜보던 그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묵조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죽은 듯 누워 있는 여인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지금 그에겐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사내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촌놈이!”
“뭐 하는 놈이냐니까!!”
거듭된 호통 소리에 묵조영의 고개가 그제야 돌려졌다.
“연약한 여인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 연약한 여인?”
사내들의 얼굴에 황망함이 떠올랐다.
그녀를 쫓는 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가 수십 명도 더 죽었다. 지금에야 이렇듯 몰아붙일 수 있지만 만약 그녀가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목숨이 서너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무서운, 아무리 생각해도 연약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찰(羅刹)과도 같은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