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거요?”(전편)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거.”
“전……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배우고 싶어요!”
“그래. 그럼 학교 가기 전, 올 겨울에 기본 지식부터 더 쌓아놓자. 학교 분위기도 익히고. 알겠지?”
“네!”
정협은 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그마한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쁨. 올라오느라 힘든 것도 잊고 정협은 대학 교정을 팔짝팔짝 뛰며 돌아다니는 단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해?>라고 적은 휴대폰 액정이 여전히 반짝였다.
“한 선생님. 이거 좀 확인해주세요.”
임시 알바로 일하는 조교가 정후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어, 어? 어!”
터치 인식이라는 게 얼마나 요망한 기술인가. 안 보내려면 아예 글자를 지울 것이지, 보낼까 말까 고민하게 되면 결과는 매양 같다. 손가락이 닿을랑 말랑 스치는 것만으로 전송되어버리니까.
“아…….”
사무실에 정후의 탄식이 흐르고, 아주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어차피 형에게 보낸 거니 무슨 일이야 있겠냐마는.
정후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교가 해놓은 공식 정리 파일과 문제들을 마무리 하는 단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눈은 계속해서 휴대폰으로 힐끔힐끔 떨어졌다.
생각해보면 단이가 정협의 집에 온 뒤로, 1주일 이상 안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2주나 안 보았으니 마음이 편해져야 할 텐데. 뭐하면서 지내나 하는 궁금증이 점점 갈수록 커지더니 막바지를 며칠 남기고 나서는 아예 집중이 되지 않고 있었다.
‘나야 편하긴 한데. 괜히 형을 못살게 구는 거 아냐?’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람이 울렸다.
<우리 학교 왔어.>
“학교?”
놀라기가 무섭게 구석에 있던 조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뭐라고요, 한 선생님?”
“아, 아닙니다.”
학교라니? 그보다 우리라니? 어느새 정후의 손은 키보드를 벗어나 휴대폰 위로 올라가 있다.
<우리? 학교는 또 무슨 소리야?>
<아, 단이랑. 학교 구경 왔어.>
생각해보면 다행인 일이다. 형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아니었으면 또 바쁜 저를 붙잡고 난데없는 학교 투어를 조를 뻔 하지 않았나. 가기만 하면 괜찮게? 근본 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을 답해줄 생각만 해도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 같다.
<그만 놀러 다니고 숙제나 제대로 하라고 해.>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안 바쁠 때 연락 줄래?>
<안 바쁠 때……일주일 더 기다려.>
<미안. 괜히 방해했나 보다. 신경 쓰지 말고 일해. 그럼.>
연락은 거기에서 끊겼다.
‘그래. 신경 좀 안 쓰고 싶다.’
정후는 더 이상 답장도 쓰지 않고 냅다 폰을 책상 구석으로 밀어내버렸다. 며칠째 켜놓은 모니터 아래로 가득 열린 파일들. 달구어진 본체. 지끈거리는 머리통. 정후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
한 학년 기말고사를 앞둔 12월 중순. 학원의 예비 자습실은 숨 막힐 정도로 조용하다. 침 삼키는 소리와 사각거리며 펜 심 긁히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에도 학생들은 서로를 힐끔거렸다. 고3의 클라이맥스가 11월이라면 예비 고3의 시작은 바로 12월부터인 것이다. 내년 마무리 내신 준비가 한창인 예비 고1, 고2 학생들의 수강등록으로 학원가도 호황이었다.
올 기말 내신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강의를 마치자마자 정후는 녹초가 되어 교무실로 돌아왔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한 선생님?”
“어제 꿈자리가 사나워서요.”
“어머. 무슨 꿈 꾸셨길래.”
기억나지 않는다. 딱히 무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건 아닌데 아침부터 찌뿌둥한 것이, 아마도 피로가 몰렸기 때문일 거다.
시험이 완전히 끝나는 다음 주까지 짧은 휴가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 다음부터는 2월 초까지 특강이 스트레이트로 이어지겠지만.
‘그건 그때고, 일단 쉬자.’
책상 위에 쌓여있는 자료들을 둘둘 모아 정리하는데, 수업을 마친 선생들이 하나 둘 교무실로 모여들었다.
“ㅇㅇ고 이번에 난이도가 높아질 거라던데요.”
“중간 때도 그렇게 난리였는데 또요?”
“뭐, 우리야 짧은 방학 동안 쉬면서 얘들 점수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러고 보니 중등 특강은 오늘부터죠? 그쪽 쌤들은 휴가도 없겠네.”
“고등입학시험이 일주일 앞당겨질 거라고 해서 그렇죠. 뭐.”
제법 큰 학원이라 중등반도 있지만 정후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다. 한 귀로 흘려들으며 짐을 정리하는데 교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게 무슨 문제겠냐마는 문을 연 이가 문제였다.
“!”
언제나 그렇듯이 머리 하나를 땋고 정은이 사준 가방을 크로스로 단단히 맨 단이가 서 있었다.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다짜고짜 내뱉는 목소리가 당당하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교무실 앞에서 양 손을 이마 위로 올리고 큰 절을 올리는데, 다 하고 나서는 한 마디까지 덧붙인다.
“그런데 참 선생님 많으시네요.”
해맑게 웃는데 선생들 중 누구도 한 마디 꺼내는 것 없이 서로를 돌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데자부를 느끼며 정후가 벌떡 일어섰다.
“너!”
목소리는 또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정후를 발견한 단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도…….”
정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자리에서 박차고 나가 단이를 교무실 밖으로 잡아끌었다. 문이 쾅 닫혔다. 지나가던 학생들의 눈을 피해 정후는 단이 입을 막은 채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너! 왜 여기 있어!”
버럭 소리 질렀다가 뒤늦게야 입을 막은 손을 풀었다. 제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아는지 위아래로 사람을 확인해보고 또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낭랑하게 단이 목소리가 울렸다.
“저 여기 다니기로 했어요!”
“네가?”
“네! 내년에 학교 보내준다고. 그 전에 선……선행, 뭐 한다고…….”
“선행학습?”
“네! 중학교 수업을 배우고 가면 도움이 될 거라고 나리께서 말씀하셨어요.”
“그게 선행학습이냐? 아 진짜. 형은 왜 많은 학원 놔두고 여길…….”
“제가 여기 간다고 했는걸요.”
“왜!”
“전에 수오 선생님이 알려줬어요. 오라고 전화 숫자도 주고.”
“유수오!”
“왜요. 전 오면 안 돼요?”
“누가 안 된대!”
말과 달리 말투는 윽박에 가까웠다. 그러고 나니 힘이 쭉 빠져 정후는 비상계단에 주저앉았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게 이런 이유였나 싶어서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3주 만에 보는 단이가 그 옆에 다소곳이 쪼그려 앉아 정후를 올려다본다. 한 치 숨김없는 표정이라 무엇을 생각하는지 여전히 다 보였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렇겠지.’
사실은 정후도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를 잘 모른다. 이곳에서만큼은 덜 시달리고 싶은 걸 수도 있고 어쩌면 아는 사이라 부담스러운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정후는 더 이상 단이에게 따지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이 일의 가장 큰 원인은 유수오니까.
“등록했어?”
“네?”
“돈 내고 왔냐고.”
“네! 나리께서 카드라는 걸 주셨어요! 그러니 아깝지 않도록 학업에 정진하겠습니다!”
“……중학생 수업이라고?”
“네!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얼핏 중등 특강이 오늘 시작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근데 교무실에는 왜 온 거야? 수업이나 듣고 갈 것이지.”
“스승님을 처음 뵐 땐 반드시 먼저 찾아가서 예를 갖춰야 하다고 했는 걸요!”
“누가 그런 소릴 해?”
“칠석이가요.”
“걘 또 누구야…….”
“그래서 아까 공부하기 전에 했더니 하지 말라고 금지당해서 따로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있어요. 도련님도 이젠 제 선생님이 되셨으니까 절 받으셔야 해요.”
“아니야. 아니야, 단이야. 그건 아니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나서야 정후는 가장 중요한 당부를 떠올렸다.
“그리고 너! 여기선 절대로 도련님이라고 부르면 안 돼! 알겠지?”
“실수로 나오면 어떻게 해요?”
“실수로라도 나오면 안 돼! 절대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던가, 아예 부르지 마. 모른 척 하는 게 제일 좋고.”
“왜 모른 척 하는 게 제일 좋은데요?”
“어, 음……. 아, 내가 너만 따로 봐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단이는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려 그러니 정후가 더 민망하여 “아니, 아예 모른 척 하자는 건 아니고.” 하고 슬그머니 말을 바꾸었다. 생각해보면 수오도 단이를 알고 있는데다가 아까 자신이 먼저 아는 척을 해버려서 이미 틀린 일이기도 했다.
“차라리 친구 동생이라고 하자. 알겠지? 누가 나랑 아는 사이냐고 물으면, 오빠 친구라고 해.”
“거짓말을 하라고요?”
“그래. 그냥 해.”
그것만은 영 마뜩치 않은지 단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정후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되는 듯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럼 저 이제 가 봐도 돼요?”
“어디 가게?”
“마저 인사드리려고요.”
“아니야! 그것도 하지 마. 아니, 그러니까 인사는 그냥 평범하게 해. 찾아가지도 말고 가다가 만나면 허리 숙이는 정도로. 이렇게. 알겠어?”
애걸복걸하듯이 인사하는 방법까지 설명하는 정후의 모습에 단이가 어이없다는 듯 픽 콧바람을 낸다.
“나 참, 도련……, 아니 선생님도. 당연한 걸 뭘 그리 열심히 말씀하셔요. 그런 것 정도도 모를까 봐서요?”
첫날과 새해, 제례 때나 올리는 큰 절이 평소 만날 때 응당 하는 인사법과 다른 건 당연하지 않나. 단이는 제 스승이 부끄러울까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정후가 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나중에 예법 공부도 하라는 말만큼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정후만 창백한 얼굴로 비상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12월의 마지막 주를 앞두고 정후의 짧은 휴가가 시작되었다.
처음 하루는 사무실에 시체처럼 늘어져 몇 시간을 내리 잠만 잤다. 그 다음날에는 사무실 청소를 했고, 삼 일째에는 정은과 식사를 했다. 저번 경찰서 일도 있고 해서 정은이 따로 부른 거였다.
“형은?”
“오빤 바빠. 마감 얼마 안 남았다더라.”
“그러니까 얼른 쓰기나 하지. 놀러 다니기나 하고 말이야.”
정이 가득한 핀잔에 정은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