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글 몸을 돌린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침상 밑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침상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데 그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침상 안쪽 구석진 곳의 바닥이 살짝 튀어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바닥에 이상이 있어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 자 반 크기의 그곳만 튀어나올 리가 없었다.
그것은 정확히 들어맞아야 할 뚜껑이 어긋나서 제대로 닫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 그렇지!’
풍천은 쾌재를 부르며 침상을 당겨보았다.
침상이 치워지자 튀어나온 뚜껑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는 뚜껑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닫혔으면 보고도 모를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비밀 장소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가로 세로 한 자 반 크기의 함이 하나 들어 있었다.
함을 꺼낸 그는 침상을 제 위치로 돌려놓고, 침상 위에 앉아서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몇 가지 물건과 수십 장의 서찰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풍천은 서찰을 집어 들고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곧 침상 위로 벌렁 누운 풍천의 입에서 소리죽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크크크…….”
서찰은……, 다름 아닌 연서(戀書)였다.
어떤 여인과 주고받은 서신.
거기에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낯간지러운 말이 가득 쓰여 있었다.
그런데 왜 그 글을 읽고 눈물이 나는 걸까?
‘형, 형이 이렇게 불쌍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놔두고 죽었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어.’
빌어먹을! 빌어먹을!
왜 벌써 죽었냔 말이야!
그는 벌떡 일어나서 씩씩거리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가 씩씩거린다고 살아날 형이 아니었다.
‘젠장!’
속으로 한 소리 내지른 그는 서찰이 든 함을 더 살펴보았다.
연서 사이로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뚜껑에 파란색으로 얼굴 문양이 새겨진 상자였는데 크기라고 해봐야 손바닥만 했다.
‘희한한 얼굴이네.’
상자를 집어든 그는 요모조모 살펴본 다음, 고리를 풀고 뚜껑을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푸르스름한 목걸이가 하나 들어 있었다.
초승달 모양에 구멍이 몇 개 뚫린 푸르스름한 목걸이는 하얀 줄에 매달려 있었는데, 재질이 뼈 같기도 했고, 뿔처럼 보이기도 했다.
“형 것인가?”
풍천은 목걸이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았다.
구멍은 모두 다섯 개. 길이는 세 치 정도였고,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표면에는 기묘한 문양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로선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고대에는 이런 문양으로 글자를 대신했다고 하던데…….’
그는 목걸이를 상자 안에 넣으려다가 그냥 자신의 목에 걸었다. 어차피 놓고 갈 것이 아니라면 몸에서 떼어놓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았다. 형과 더 가까이 있는 기분이 들 테니까.
막상 목에 걸자 하얀색과 파란색이 잘 어울려서 그럭저럭 보기가 괜찮았다. 살에 닿으니 시원한 기운이 느껴져서 느낌도 싫지 않았고.
풍천은 목걸이를 옷으로 덮고 형의 유품을 한군데로 모았다.
유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지 않았다.
침상 밑에서 발견한 것, 서랍에 있던 잡다한 물품. 그리고 검 한 자루 정도가 가져갈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옷과 신발 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냥 놔두었다. 혹시 안에 숨겨놓은 것이 있나 뒤져보기만 하고.
그렇게 고른 유품을 가로 세로 높이 한 자 반 크기의 상자에 집어넣자 꽉 찼다.
그는 상자를 끈으로 단단히 묶은 후 검과 함께 들고서 방을 나섰다.
4.
비검당의 당주는 아직 공석인 상태였다. 그 바람에 부당주인 석초산이 임시로 비검당을 이끌었다.
풍천이 비검당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잠시 출타한 중이었는데, 유품을 정리한 사이 돌아와 있었다.
“사마 당주님의 사제라고?”
“그렇습니다.”
풍천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석초산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삼십 중반 정도? 아무리 많아도 사십은 안 넘을 듯했다.
조금 긴 듯 보이는 얼굴, 예리한 눈매, 가늘지만 짙은 눈썹. 거기다 턱에는 제법 큰 점이 하나 붙어 있어서,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검당이 어떤 곳인 줄 아는가?”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갑자기 비검당 사람이 되었거든요.”
석초산은 못 미더운 눈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마공유를 충심으로 따른 사람이었다. 하기에 어지간하면 사마공유의 사제인 풍천이 비검당 생활을 잘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본 풍천은 그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흐릿한 눈빛, 금방이라도 졸 것 같은 표정, 나른한 목소리. 나태가 철저히 몸에 배인 모습이었다.
그나마 잘다져진 몸과 큰 키만이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후우, 당주님의 친동생이 아닌 게 다행이군.’
사마공유의 친동생이었다면 거슬리는 게 많아도 눈을 질끈 감고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친동생이 아닌 이상 조금 거리를 둔다 해도 괜찮을 듯했다.
“우리 비검당은 특수임무를 맡아서 행하는 곳이네. 임무를 수행하면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허다하지. 그런 만큼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않아야 하네. 한마디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네. 그런데……, 자네의 눈을 보니 조금 걱정되는군. 잘할 수 있겠는가?”
석초산이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묻자, 풍천은 축 처진 눈을 깜박이며 반문했다.
“그럼 형은 그러지 못해서 죽은 겁니까? 이상하네. 형은 나하고 달라서 똑똑하고 빠릿빠릿했는데……. 혹시 부당주님이 잘못 아신 게 아닙니까?”
석초산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풍천의 묘한 말투에 이상할 정도로 짜증이 났다.
하지만 말 몇 마디에 흔들리면 가볍게 보일까 봐 눈살만 찌푸리고 말했다.
“누가 그분이 그렇다고 했나? 그렇게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말한 거네.”
“아, 예……. 근데 말이죠, 비검당이 맡는다는 그 특수임무란 게 뭡니까?”
“우리 임무는 한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가 있네.”
“그러니까 그게 뭐냔 말입니다.”
또다시 목구멍으로 뭔가가 솟구쳤다. 참으려 하니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래도 사마공유의 얼굴을 떠올리고 한 번 더 꾸욱 참았다.
“그때그때 임무가 달라지니 이 자리서 당장 임무가 뭐라고 말하기는 애매하군. 좀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진노교에게 물어보게. 그가 자세한 걸 알려줄 거네. 자, 그만 가서 쉬도록 하게.”
석초산은 진노교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겨우 말을 맺었다. 그제야 부글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풍천도 더 이상 그에게 묻지 않았다.
“설명하기가 어려운가 보죠? 그렇다면 뭐 진 조장님에게 물어보죠. 조금 전에 보니까 조리 있게 말씀을 잘하시더군요.”
당신은 조리 있게 설명을 못하나 보지? 꼭 그런 말투다.
석초산의 이마에 핏줄기가 불끈불끈 솟았다.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라, 하기 싫어서 그런다, 이놈아!’
그때 돌아서려던 풍천이 고개를 모로 꼬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사조의 방은 어딥니까?”
“진노교에게 물어봐!”
석초산이 자신도 모르게 빽 소리쳤다.
그러자 풍천이 방을 나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양반 참……. 방 좀 물어본 게 뭐 어쨌다고 화를 내는 거야?”
목소리가 작긴 했지만, 석초산이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 자식이 정말!’
작신 패 버려?
그러나 사마공유의 사제라는 걸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참았다.
‘끙, 저놈과 자주 마주치면 아무래도 명이 짧아질 것 같군. 그렇다고 사마 당주님의 사제를 두들겨 팰 수도 없고……. 문주님의 명이 있으니 다른 당으로 보낼 수도 없고……. 제기랄.’
풍천은 석초산의 말을 충실히 지켰다.
방을 나서자마자 진노교를 찾아간 그는 일단 사조의 방부터 물었다.
진노교는 손을 들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저리 가면 방문 옆에 숫자가 쓰여 있을 거네.”
당연히 사(四)자가.
하지만 풍천은 바로 사조의 방으로 가지 않고 진노교의 옆에 퍼질러 앉았다. 그리고 반쯤 졸린 눈으로 진노교를 쳐다보았다.
일조 조장이라면 당주가 맡은 임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지 몰랐다.
“진 조장님, 제 형이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 아십니까?”
진노교는 고개를 저었다.
“극비의 임무여서 극소수의 사람만 간 걸로 알고 있네. 우리 비검당에서는 당주님 혼자 가셨지.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본문에서 열 명도 채 안 될 거네.”
‘제길, 최소한 당주급 이상의 간부들만 알고 있다는 말이군.’
그렇다고 전혀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극소수의 사람만 움직인 극비의 임무란 말이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비검당조차 당주만 갈 정도로?’
풍천은 더 깊은 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어차피 진노교도 더 이상 깊은 것은 모를 듯했다.
한데 그때, 진노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령 아가씨라면 알지도 모르겠는데…….”
서령 아가씨. 백무천의 두 딸 중 하나인 백서령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지켜달라는 청부가 들어온 여인.
풍천은 진노교가 왜 백서령의 이름을 꺼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마공유가 고이 간직하고 있는 연서의 주인이었다.
‘정말 그녀가 알까? 하긴 형이 떠나기 전에 말했을지도 모르지.’
사마공유와 좋아하는 사이를 떠나서 그녀는 문주인 백무천의 딸이 아닌가. 비밀 임무에 대해서 알고 있을 가능성이 누구보다 높았다.
‘기회가 되면 만나봐야겠군. 전해 줄 것도 있고…….’
하지만 풍천은 그녀에 대한 말은 하지 않고, 잔뜩 걱정된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괜히 비검당에 들어오겠다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당주님 말로는 항상 긴장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임무만 수행한다는데.”
“뭐 꼭 안 좋은 것만은 아니네. 힘든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혜택이 많거든. 거기다 녹봉도 다른 곳보다 많고, 때로는 임무를 완수할 때마다 덤으로 받는 돈이 녹봉보다 많을 때도 있다네.”
풍천의 눈이 조금 커졌다. 반가운 말이었다.
“녹봉이 얼마나 됩니까?”
“일반 조원은 은자 세 냥, 조장은 다섯 냥이네.”
은자 다섯 냥. 안 쓰고 모두 모으면 백이십 개월을 벌어야 해약금을 마련할 수 있다.
거기다 임무를 완수할 때마다 덤으로 받는 돈이 녹봉 정도 된다면 육십 개월 정도로 줄어든다.
한 푼도 안 쓰고 모았을 경우에 말이다.
‘그때까지 기다려 줄까?’
그럴 리가 없다. 계약 기간인 일 년이 지나면 당장 해약금을 내놓으라고 할 것이다.
제기랄.
‘형의 유품을 정리하면 얼마나 나올까?’
제일 값나갈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검이었다. 잘하면 은자 오십 냥은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른 것은 큰돈이 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일단 버틸 때까지 버티면서 모아보자.’
어떻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풍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우간 잘 부탁하겠습니다. 저는 비검당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진 조장님이 잘 가르쳐주십시오.”
“하, 하. 조금만 지나면 다 알게 될 거네.”
진노교는 헛웃음을 지었다.
풍천이 아주 싫진 않지만 조금 귀찮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갈수록 더 귀찮아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것이다.
‘괜히 친절하게 대해 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