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계집이 볼일 보는 것을 정면에서 구경하는 것도 볼 만하겠어.”
흡!
‘개자식! 변태 자라 같은 놈!’
백초령은 핏대가 솟았다. 젊은 놈이 킥킥거리는 늙은이보다 더 얄미웠다.
‘풍천에게 말해서 눈알을 뽑아 버릴 거야!’
“케케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오, 이공자.”
‘저 늙은이의 이도 몽땅 뽑아 버리라고 하겠어!’
하지만 노인과 젊은 자는 백초령의 저주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놈들이 지금쯤 연락을 받았겠군요.”
“그렇겠지요. 지금 잔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을 거외다.”
“후후후, 포기하지 않길 정말 잘했소.”
남천신마(南天神魔) 혁련광의 둘째 제자이자, 귀혼신마대의 대주인 위태곤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설추교에게 백초령 납치 임무를 총괄하게 하고, 자신은 이백 리 떨어진 곳에서 대기했다. 그런데 설추교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귀혼신마대 대원 여섯을 잃고.
“화영쌍검과 구양종을 비롯한 검각 놈들이 백초령과 함께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거기다 신검문 놈들 중 생각지도 못한 고수가 하나 있어서……”
설추교는 그렇게 변명하면서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이십팔장로 중 한 사람인 설추교가 실패할 줄이야. 팔대신마에 비할 순 없지만 그래도 서열 백 위 이내의 고수거늘.
위태곤은 설추교의 변명을 대충 듣고 재차 백초령을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전과 달리 시마충 혼자만 보내고 팔십 리 떨어진 회하에서 기다렸다.
기회만 잘 잡으면 여럿이 가는 것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 혼자만 가는 것이 나을 듯했다. 혼자라면 그만큼 들킬 가능성도 적고, 설령 들킨다 해도 빠져나오는 데 문제가 없을 테니까.
더구나 시마충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경공이 뛰어난 사람. 그 방면으로는 설추교보다 나았다.
그런데 시마충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백초령을 납치해 왔다. 대성공이었다.
“케케케케, 이공자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빈손으로 돌아갈 뻔했소이다.”
시마충이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웃어대며 위태곤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위태곤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유령적으로 유령총을 연 다음 기뻐해도 늦지 않았다.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오. 저 계집이 밖으로 나온 덕분에 쉽게 잡긴 했지만,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오. 우리의 손에 유령적이 쥐어질 때까지는 매사에 조심해야 할 거요.”
“맞소, 이공자. 백무천은 만만하게 볼 자가 절대 아니오. 경고를 했으니 그가 직접 오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딸을 구하려 할 거요.”
“그런데…… 시 장로는 백무천이 순순히 유령적을 내놓을 거라 보시오?”
“딸이 우리 손에 있으니 유령적이 제아무리 귀한 보물이라 해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거외다. 케케케케.”
백무천은 아들이 없다. 부인과도 몇 년 전에 사별했고. 그러니 자신들이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긴…… 그들은 아직 유령적이 유령총을 여는 열쇠인 줄 모르고 있으니…….”
위태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도 백무천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설 장로를 곤란하게 했다는 놈이 누군지 모르겠군. 화영쌍검이나 구양종 정도는 합공하지 않는 이상 설 장로의 상대가 안 될 텐데…….”
“이 늙은이도 그게 궁금하외다. 설가 말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놈이라던데…….”
‘풍천을 말하는 것 같은데…… 풍천과 싸운 늙은이가 그렇게 강한 자였나?’
백초령이 의아해하는데, 위태곤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그놈도 올지 모르겠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이공자. 놈이 오면 제가 목줄을 따 버리겠소이다, 케케케케.”
“대책이 세워져 있으니 별걱정은 없소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매사에 조심해야 할 거요.”
‘소심하기는.’
시마충은 위태곤에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이공자는 유령적을 들고 돌아간 후의 일이나 생각하시구려. 백무천이 직접 와도 유령적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거외다. 하거늘 그딴 어린놈 하나가 무슨 영향이 있겠소?”
“흐음, 하긴 그 한 놈 때문에 틀어질 일은 없겠지요.”
백초령은 위태곤과 시마충이 풍천을 얕보고 있다는 걸 알고 내심 기대를 품었다.
‘흥! 그 전에 풍천이 먼저 늙은이의 등에 구멍을 낼걸?’
죽기 전에 눈알과 이를 몽땅 빼라고 해야지.
그때였다. 시마충이 넌지시 물었다.
“저기, 이공자. 정말 유령적이 있어야만 유령총을 열 수 있는 거요?”
“본인도 확실한 것은 모르오. 마기자 장로와 함께 유령총을 조사하신 사숙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런가 할 뿐이오.”
“대체 유령총에 뭐가 있어서 강호삼비 중 하나로 불리는지 모르겠구려.”
“사부님께 듣기로는, 그 안에 전설의 힘이 잠들어 있다는데, 워낙 믿지 못할 이야기라서 사부님조차 옛 사람들이 소문을 과장해서 후세에 전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니까 그게 어떤 이야기인지…… 비밀이라면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만…… 험.”
시마충이 머뭇거리며 위태곤을 재촉했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듯 간절한 목소리로.
솔직히 백초령도 자신의 신세를 잊고 귀를 기울인 판이었다.
“으음, 이거 이야기해도 될지…….”
위태곤이 망설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비밀을 간직한 사람일수록 입이 근질거리는 법. 그도 다른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하긴 전설일 뿐이니 비밀이라 할 것도 없지요.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전설에 의하면…….”
그가 입을 열자, 갑자기 배 안이 조용해지고,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만이 들렸다.
그때 잠시 숨을 돌린 위태곤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에…… 정말로 유령이 산다고 하더군요.”
“…….”
시마충의 어깨뼈가 축 처졌다. 잔뜩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큰 듯 그는 기분을 잡친 표정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유령총에 유령이 산다고? 그럼 장군총에는 장군이 살고, 신녀총에는 신녀가 살고 있겠네? 똑똑한 줄 알았더니…….’
그리고 백초령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바보 같은 변태! 그걸 말이라고 해? 아마 얼굴도 병신 같이 생긴 놈일 거야.’
제10장 수상한 삼각관계(三角關係)
1.
삼경이 넘어서 식현(息縣)에 도착한 풍천 일행은 문을 막 닫으려는 객잔으로 밀고 들어가서 식사를 했다.
밤이슬 맞은 무사들이 배고픈 이리처럼 몰려들자, 객잔주인과 숙수는 끽소리도 못하고 음식을 장만했다.
그나마 구양종이 식대를 풍족하게 계산해서 객잔주인은 입이 귀에 걸렸다.
솔직히 구양종은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풍천의 말을 듣고는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와주려고 왔다면서요? 그러니 다른 것 못 도와주면 이런 거라도 도와주쇼. 돈이 없어요? 없으면 어쩔 수 없고. 난 또, 잘사는 집안 아들이라고 해서 돈이 많을 줄 알았더니, 나보다 가난한가 보군요.”
그는 풍천에게 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누가 없다고 했나? 어차피 한숨 자야 하니 방값까지 같이 계산해야 할 거 아닌가?”
덕분에 방값까지 덤터기 썼다.
다음 날.
풍천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사람을 모두 깨웠다.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부지런을 떨자 백초령을 찾으려는 집념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백초령이 계속 떠올라서 잠을 설치는 바람에 아예 잠을 자지 않은 것뿐이었다.
‘초령이 그것이 말썽만 안 부리면 놈들도 함부로 하지는 못할 텐데…….’
누워서 잠을 자려는데 이런저런 걱정이 탑처럼 쌓여만 갔다.
자기가 언제부처 백초령을 그렇게 위해 줬다고…….
이리 눕고, 저리 눕고, 엎어지고, 뒤집어져도 겁에 질린 백초령의 얼굴만 떠올랐다.
결국 잠을 설친 풍천은 운기조식으로 잠을 대신하고 방을 나왔는데, 남들이 잘 자는 걸 보니 배가 아팠다.
사람들이 말이야, 걱정도 안 되나?
특히 구양종의 방에선 나직이 코고는 소리까지 들렸다.
여자는 코를 많이 고는 남자를 싫어한다는데, 나중에 서령 아가씨에게 슬쩍 말해 줘야지.
새로운 정보(?)를 하나 챙긴 풍천은 사람들을 깨웠다.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지 않던가. 일어난 김에 추적을 계속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기사아아아앙!”
굳이 두 번 소리칠 것도 없었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다른 손님은 물론이고, 객잔의 주인과 점소이까지 모두 일어나서 밖으로 튀어나왔다.
잘된 일이었다. 식사를 거르고 떠날 수도 있었는데, 그들이 일어났으니 뭐라도 먹을 수 있을 듯했다.
풍천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는 구양종을 보며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구양 공자, 식사는 뭘로 하실 겁니까?”
뭐든 좋았다. 조금 비싼 것도 상관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게 더 좋았다. 어차피 돈은 구양종이 낼 거니까.
꼭두새벽에 깨워놓고 먹을 것 타령이라니.
구양종은 이를 갈 것 같은 표정으로 풍천을 쏘아보며 말했다.
“자네가 알아서 시키게.”
풍천은 오랜만에 구양종이 마음에 들었다.
“하, 하, 뭐 그렇게 하죠.”
그는 이전에 백초령이 시켰던 음식을 그대로 시켰다. 양을 좀 더 많이 해서.
솔직히 다른 비싼 요리를 시키려 해도 요리 이름을 몰랐다.
객잔주인은 지금 시간에는 요리가 안 된다고 말을 하려다가, 풍천이 시키는 요리 이름을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최대한 빨리 만들겠습니다요!”
풍천은 이 사이에 낀 고기를 혀로 깔짝거리며 객잔을 나왔다. 어스름이 물러나고 뿌연 안개가 연기처럼 거리에 퍼져 있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는데, 바짝 뒤따라 나온 기종탁이 물었다.
“조장,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납치범의 행방은 오리무중인 상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풍천은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술술 말했다.
“선창가로 가죠. 어부들이 지금쯤 나오기 시작했을 겁니다. 고기잡이배들은 원래 새벽에 바쁘거든요.”
“고기잡이배는 왜……? 배를 타고 내려가실 겁니까?”
“선창에 가면 일단 어부들에게 지난 이틀간 수상한 배를 보지 못했냐고 물어보십쇼. 크기는 서너 사람이 타는 작은 배여야 하고, 배 안에 무사로 보이는 사람이 타고 있었는지, 혹시 여자가 타고 있지 않았는지, 뭔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는지 등 기존에 보던 배와 다른 행동을 보인 배가 있는지 알아보십쇼. 확실한 정보를 주는 사람에게는 은자 두 냥을 준다고 하고. 배를 타고 쫓아갈 것인지는 그다음에 결정하죠.”
뒤에 죽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멍하니 풍천을 바라보았다.
몇 마디 하는 것도 귀찮아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리 긴 말을 쉬지도 않고 한단 말인가?
저 사람이 정말 풍천, 맞아?
새벽부터 설치더니, 확실히 이상해졌어.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조심해야 한다는데…….
“뭐해요? 안 갈 겁니까?”
풍천은 슬쩍 뒤를 돌아보고 사람들을 재촉했다.
입을 꾹 사람들은 강시처럼 뻣뻣한 몸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변의 선창가에는 풍천의 말대로 많은 어부들이 나와 있었다.
비검당 사조원들과 검각 무사들은 어부들을 상대로 부지런히 탐문을 했다.
일 각가량 지났을 때 구양종이 풍천에게 다가갔다.
밝은 표정. 뭔가를 해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저쪽에 있는 어부가 어제 새벽에 이상한 배를 봤다고 하네.”
“이상한 배라…… 뭐라고 합디까?”
“칼을 찬 장한이 배를 몰고 있었는데, 배 위에는 바위 같은 인상을 한 중년인과 대나무처럼 마른 노인, 기품 있는 청년이 타고 있었다는군.”
“그래요? 혹시 여자는 못 봤답니까?”
“여자는 보지 못했고, 배 안에 뭔가 길쭉한 물건이 있었는데, 이곳에 배를 대지 않고 그냥 지나가서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고 하네.”
더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시간과 정황이 딱 맞아들었다.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화영쌍검도 그 배에 납치범이 타고 있을 거라 확신한 표정이었다.
“소각주 말대로라면 놈들이 그 배에 타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군. 쫓아가야 하지 않겠나?”
“내가 들어도 분명 놈들인 것 같네.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 같네만.”
두 사람은 구양종의 공을 추켜세우지 못해 안달인 사람처럼 풍천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풍천은 서두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결국 시간을 좁히지 못했단 말이군.’
하루거리면 지금쯤 수백 리 밖에 있을 터. 쫓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자신들은 계속 탐문을 하면서 가야 하고, 적은 그저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거리는 여전히 하루 이상 차이가 날 것이었다.
그마저도 놈들의 계획에 있는 거라면, 정말 철저한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가볍게 보고 덤벼들었다가 설 늙은이가 실패하니까 철저히 계획을 세운 거 같아.’
그렇다고 해서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백초령의 납치에 장한과, 중년인, 노인과 청년. 모두 네 사람이 동원되었다. 아마 그들 중 지휘자는 노인과 청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정도 정보면 이곳까지 온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
“수고하셨수.”
“그 정도야 뭐…….”
구양종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처음으로 풍천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 이곳까지 쫓아온 보람이 있었다.
‘어때, 이놈! 나도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때 풍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왜 저 사람이 자꾸 이쪽을 힐끔거리며 인상을 쓰죠? 뭐 할 말이 더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