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에서 내린 그는 몸을 좌우로 틀었다.
‘오전 내내 그런 자세로 마차를 탔으니 몸이 불편하기도 하겠지.’
사람들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풍천은 사람들이 어떤 눈빛으로 쳐다보든 마저 몸을 풀었다.
“음? 모두 주위를 경계해라.”
정태민이 눈빛을 빛내며 나직이 소리친 것은, 풍천이 목을 풀기 위해 머리를 뱅뱅 돌리고 있을 때였다.
검각의 무사들은 의문을 표하지 않고 좌우로 흩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장로님?”
구양종이 정태민에게 물었다.
정태민은 빽빽하게 우거진 갈대숲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를 노리는 놈들이 있는 것 같네. 제법 많은 숫자야.”
“어떤 놈들이 감히……!”
구양종은 눈을 치켜뜨며 노기를 드러냈다.
근처에 마도문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검문과 검각의 비위를 거스를 만한 배짱이 없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근처의 마도 문파가 아니라면, 쉽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더 위험한 자들일 가능성도 크고.
“젠장, 어쩐지 배가 안 보인다 했더니 놈들이 미리 손을 썼나 보군.”
짜증내듯이 중얼거린 구양종은 백초령을 바라보았다.
“초령 소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중앙에 있으시오.”
“알았어요, 구양 공자.”
백초령은 별로 겁에 질린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도 긴장은 되는지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이봐, 둘째 아가씨. 너는 이쪽으로 와 있어.”
풍천이 그런 백초령을 불렀다.
“내 걱정은 마셔, 이곳이 더 안전한 것 같으니까.”
“둘째 아가씨 호위는 우리 사조지, 검각 사람들이 아니라니까?”
“걱정 마시라니까. 당신 옆에 있는 것보다는 구양 공자 옆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거든?”
‘그럼 알아서 해. 아예 쫓아가서 함께 살아라.’
풍천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사조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둘째 아가씨를 삼 장 넓이로 둘러싸쇼.”
사조원들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곧바로 움직였다.
이 마당에서는 그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들 역시 백초령이 풍천이나 사조와 함께 있는 것보다 검각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풍천도 혼자가 편했다. 항상 혼자였지 않은가.
‘근데 저 뺀질뺀질한 양반이 제대로 보호할지 모르겠네.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만만치 않은 놈들 같은데.’
그래도 검각의 소각주인데, 자기 몫은 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풍천은 느릿느릿 주위를 둘러보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감아쥐었다.
스스스스스.
쥐떼들이 몰려오는 것처럼 신경을 건드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났다.
풍천이 옆구리의 검병에 손을 얹은 순간, 강가의 갈대숲이 촤악 갈라졌다.
쏴아아아아!
동시에 복면을 한 삼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가 싶더니 일언반구도 없이 공격했다.
상대가 누구건 상관없이 말살이 목적이라는 뜻.
“놈들을 막아!”
“뚫리면 안 된다!”
외곽을 지키던 검각의 무사들이 먼저 적과 검을 맞댔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리며 검기가 난무했다.
몇 번의 공세를 주고받는 사이 정태신은 적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하다는 걸 알고 소리쳤다.
“보통 놈들이 아니다! 조심해서 상대해!”
반면 한 걸음 뒤쳐져 있던 정태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신검문과 경천산장과 검각이 삼면을 감싸고 있는 지역이다.
무작정 공격하는 걸로 봐서 자신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듯하다.
어떤 자들이 감히 자신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하지만 적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되었다. 아무 말 없이 도검이 오가는 살벌한 상황 속에서 검각 무사들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챙!
검을 빼든 정태민과 정태신은 검각 무사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신형을 날렸다.
“웬 놈들인지 몰라도 네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갈을 내지른 정태민은 일말의 인정도 남기지 않고 손을 썼다.
그의 검에서 뻗친 검기가 전면으로 밀려가며 복면인들을 위협했다.
“그가 화영쌍검의 첫째인 정태민이다! 합공해서 상대해!”
복면인들의 뒤쪽에서 싸늘한 외침이 울렸다.
하지만 화영쌍검의 위세는 일반 검각 무사들과 천양지차였다.
그들이 펼친 검에서는 선명하게 보이는 푸르른 검기가 뻗어나갔다. 그 검기에 부딪친 복면인들의 도검은 철벽을 후려친 듯 튕겨지고, 검기가 스쳐지나가기만 했는데도 살이 쩍쩍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잠깐 사이, 복면인들 중 셋이 그들에 의해 쓰러지면서 공세의 한 축이 무너졌다.
바로 그때, 복면인들의 뒤쪽에서 상황을 살펴보던 자들 중 둘이 신형을 날렸다.
“흥! 화영쌍검! 너희들은 우리가 맡아주마!”
한편, 풍천은 강가 쪽에 서서 싸움을 주시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격전지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강가라 그런지 갈대숲 밑은 마른 땅이 아니라 습지였는데, 그 때문인지 적도 그곳으로는 쳐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남들이 싸우는 동안 구경만 했다.
호위 책임자라는 사람이 적을 상대하지 않고 구경만 하다니!
구양종이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쳤다.
“뭐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게!”
하지만 풍천은 격전음 때문에 듣지 못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초령이 그 모습을 보고 비아냥거렸다.
“비검당의 조장이 왜 그래? 막상 싸움이 벌어지니까 두려운가 보지? 그래, 차라리 그곳에 있어!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말고!”
백초령을 지키던 사조원들은 낯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검당의 체면이 진흙탕에 쑤셔 박힌 기분. 숯덩이처럼 달아오른 얼굴에서 연기가 나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들이라도 나서서 검각 무사들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나서면 기회만 노리던 복면인들이 달려들 터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조장! 비검당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좀 움직이시오!
조원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풍천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노마에게 소리쳤다.
“너는 저쪽으로 가서 구석에 처박혀 있어!”
사조원들은 자신들의 기대가 무참히 짓밟히자 생각을 달리했다.
조장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신들이라도 움직이는 수밖에!
조원들 중 첫째처럼 행동하는 기종탁이 소리쳤다.
“반은 둘째 아가씨를 지키고, 반은 저들을 돕기로 하지! 내가 이쪽 네 사람하고 저들을 도울 테니, 구 형이 이곳을 지키시오!”
“알겠네! 이곳은 걱정 말게!”
구자암이 힘차게 대답하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세!”
기종탁이 자신의 옆에 있는 네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그들이 앞으로 튀어나가려고 하자, 풍천이 빽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거요? 거기서 움직이지 마요!”
기종탁 등은 멈칫하며 풍천을 바라보았다.
그때 백초령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저런 겁쟁이 조장 말 듣지 말아요! 내가 책임질 테니 어서 저 사람들을 도와줘요!”
기종탁은 조원들과 눈짓을 나누더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장은 풍천이지만, 백초령은 문주의 딸이다. 물론 위계를 따지자면 조장의 말을 듣는 게 우선이다. 백초령은 문주의 딸일 뿐 위계상 상위자는 아니니까.
그러나 풍천이 겁을 내는 이상 그들은 나중에 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백초령을 따르기로 했다. 더구나 백초령이 이번 일을 책임진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눈짓을 나눈 기종탁 등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아 진짜, 말 되게 안 듣네!”
풍천이 짜증 난 듯 소리쳤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에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초령은 눈을 치켜뜨고 풍천을 야단쳤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게으름을 피우다니!
“오늘 일, 아버지에게 그대로 이를 거야! 각오해, 풍천!”
“이 멍청아! 모르면 가만있어!”
구양종이 백초령의 편을 들어주었다.
“너 같은 놈이 조장이라니. 참으로 신검문의 위신을 진흙탕에 빠뜨리는 놈이구나!”
“당신! 만약 둘째 아가씨 몸에 이상이 생기면 가만 안 둘 거야!”
“뭐야? 겁쟁이가 어디서 감히!”
그때였다.
구양종, 백초령과 말다툼을 벌이던 풍천이 홱 몸을 돌리며 검을 잡아 뺐다.
“아, 젠장! 대충 하려고 했더니 힘쓰게 만드네.”
그의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막 끝남과 동시였다. 강가의 갈대숲 쪽에서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열 명, 거리는 이십 장 정도.
그들에게는 바닥이 습지라는 것도 소용없었다. 반쯤 드러누운 갈대를 밟고 날듯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복면인들은 순식간에 갈대숲을 건너서 풍천 앞에 내려섰다.
“이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백초령을 잡아라.”
복면인들 중 가운데 서 있던 키 작은 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나머지 아홉 명의 복면인들은 입을 꾹 닫은 채 명령대로 움직였다.
아홉이 다시 땅을 막차고 백초령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자 풍천이 훌쩍 뒤로 물러가며 중얼거렸다.
“정말 귀찮게 하네.”
단순히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멈춰선 곳은 날아간 아홉 중 가장 선두에 선 자의 바로 앞이었다.
순간 선두에 있던 자가 풍천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쉬이익!
대기가 갈라지며 당장 풍천의 몸을 둘로 갈라 버릴 것 같았다.
풍천은 한 걸음 가볍게 옆으로 물러난 후 상대의 허리 요혈에 검을 찔러 넣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간단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동작에 복면인은 옆구리가 뚫린 채 눈을 부릅뜨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갑자기 갈대를 밟으며 날아드는 자를 보고 기겁했던 백초령은, 한 사람이 풍천에게 당해서 쓰러지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인간은 재수도 좋군.’
“그런 간단한 수에 속다니,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놈들인가 본데?”
‘그럼 네가 상대해 봐, 요것아.’
풍천은 사사건건 자신을 물고 늘어지는 백초령을 상대하지 않았다.
상대는 아직 여덟, 아니 아홉이 남았다. 그들 중 다섯은 사조 조원들과 부딪치기 직전이고, 나머지는 분노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풍천은 검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좌우에 있는 자들을 쓸어보았다.
“좋은 말할 때 돌아가쇼.”
그때 풍천이 있던 곳에 남아 있던 복면인이 노성을 내지르며 풍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놈은 놔두고 백초령을 잡아!”
그는 열이 뻗쳤다. 자신이 맡는다고 했는데, 놓쳐 버린 바람에 수하 하나가 죽지 않았는가 말이다.
노화가 끓어오른 복면인은 손가락을 독수리발톱같이 세우고 풍천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사이 복면인 셋도 풍천을 우회해서 백초령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풍천은 어쩔 수 없이 키 작은 복면인을 상대했다.
얕보고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검게 변색된 손가락은 마치 쇠갈고리 같았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강철조차 부술 정도로 강맹했다.
‘어디서 들어본 무공 같은데······.’
눈을 게슴츠레 뜬 풍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몸을 흔들거리며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키 작은 복면인은 자신의 공격이 풍천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하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어디 이것도 받아봐라, 이놈!”
“이놈 저놈 하지 마쇼!”
풍천은 맞받아치며 검을 번개처럼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