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이 눈을 떴을 때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흰 벽지에 흰 탁자 그리고 눈을 찌르는 백색 섬광.
익숙한 구조물들을 보았을 때 미영은 자신의 집임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다시 살아난 건가?’
노란 시계는 11시 40분을 막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10분 줄었어.‘
미영은 시계를 올려다보다가 클래식 음악 사이로 불협화음의 시끄러운 소리가 섞여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전자가 맹렬한 기세로 콧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미영은 재빨리 소파를 박차고 일어서 가스레인지를 잠갔다.
미영이 주전자를 들었을 때는 이미 주전자 안에 물이 한 컵 분량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로 10분이 지났구나.‘
미영의 추측이 확신이 되었을 때 몸이 떨리고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입속의 침은 바싹 말라 메말라갔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듯 고동쳤다.
[째깍 째깍]
비록 시계를 등지고 있어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는 없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앞으로 초침이 몇 칸 더 뛰어간다면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초침의 카운트다운 소리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벨소리가 크게 울었다.
미영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떨리는 미영의 목소리에 다짜고짜 울부짖음으로 답하는 상대방.
역시나 하은이였다.
한번 겪어본 상황이었지만 역시 우짖는 새끼의 서글픈 목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장은 가득 부풀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으며 목이 잠기고 정신 줄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져 버린다면 영영 하은이를 구할 수 없을 거라고 그녀의 직감이 신호를 주었다.
"흐으으읍“
짧은 신음을 마지막으로 미영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차갑게 맑아지는 느낌이었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은아 걱정하지 마! 엄마가 반드시 구해줄게!”
차분한 대응 이상의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오 1억을 구했나봐?”
능글맞은 목소리 역시 그놈이었다.
소름끼치는 그놈의 목소리 이상으로 끔찍한 소름이 미영을 덮쳤다.
그 소름의 원천에 따르면 미영은 전혀 침착하게 대처한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미영에게는 아무런 돈이 없었다.
시간만 그 전보다 10분 줄었을 뿐 그녀에게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 ... ...“
짧은 침묵 끝에 그놈이 말을 이었다.
"뭐야! 돈이 없어?“
조금 전까지의 능글맞은 목소리는 없고 차갑고 매서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미영의 귓 방망이를 후려 쳤다.
미영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동공은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렸다.
그때 하얀 탁자 아래에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자 잠깐만... 허..억“
쇼핑백을 쏟자 쓸려나온 돈다발.
오 만원권으로 대략 스무 다발이 나왔다.
돈다발의 두께로 보았을 때 100장 묶음으로 얼추 1억은 돼 보였다.
미영 본인도 엄청나게 놀랐지만 그보다 그놈을 안심 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있어! 1억 준비됐다고. 하은이를 풀어줘 제발. 돈은 줄 테니 제발“
순간 안도를 한 건지 미영은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그놈에게 절규 아닌 부탁했다.
"크크큭 그래야지. 하은이를 온전히 보고 싶다면... 그럼 백두역에서 보자고 "
그놈은 용건을 마친 뒤 그대로 매몰차게 끊어버렸다.
미영은 이제 하은이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지만 가슴 한켠에서는 돈에 대한 의구심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 큰돈을 내가 어떻게 구한거지?‘
'내 돈이긴 하겠지?‘
'왜 전에는 못보고 지나쳤을까? 그때 이걸 들고 갔었으면...‘
미영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이 난제는 속 시원히 풀릴 리 없었고 야속한 시간만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마침내 미영은 돈을 쇼핑봉투에 주섬주섬 담아 들었다.
결의에 찬 미영의 눈빛에서는 비장함 마저 맴돌았다.
1억을 들고 집 문을 나설 때 까지는 1억이란 돈이 무겁지 않았다.
'오만 원 권이긴 하지만 2000장이나 되는데 생각보다 무겁지 않네?‘
그러나 미영의 생각은 큰 대로로 나오자 금 새 바뀌고 말았다.
시간이 촉박해 천천히 걸을 수가 없었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수상해 보였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흥얼거리는 청년,
조잘조잘 자기네들끼리 떠들며 웃는 여학생들,
장난감 로봇을 들고 뛰어 노는 아이들까지 심지어 의심스러워졌다.
그 의심이 짙어지자 모두가 미영의 쇼핑백을 쳐다보는 것 같았고 사람들의 눈 길 만큼 쇼핑백의 무게도 천근만근으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미영은 쇼핑백을 품에 꽉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멀리서 지하철역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미영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2분 3초.. 4초..]
약속된 시간 12시에서 더 시간이 흘러 버렸다.
미영은 가슴 철렁임을 느끼며 뛰기 시작했다.
'뭘 안심하고 굼떴던 거야! 그놈이 어쩔 줄 알고! 늦었다고 무슨 짓을 하진 않았겠지...‘
미영은 숨이 턱에 차오를 만큼 빠르게 내달렸고 지하철역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괜찮아요?“
"어머 저런“
굉장히 아프게 넘어져서 주변 사람들이 전부 놀랬고 그 중 한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가..가까이 오지 마!”
미영은 황급히 손을 뿌리쳤고 접질린 다리를 절뚝대며 걸어 내려갔다.
"미친년 아냐 저거!“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을 뒤로 한 채 미영은 부어오르는 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미영은 넘어지는 순간에도 쇼핑봉투를 놓지 않았다.
미영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지각에 대한 그놈의 분노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더 빨리 도착하는 것.
계단을 다 내려오니 미영의 눈동자에 21번 출구가 비춰지기 시작했고 그 앞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모습도 들어왔다.
[허억 허억]
깊은 숨을 들이쉬는 미영의 곁으로 그 놈이 다가왔다.
“왜 늦었지? 돈은 가져왔나?”
“그래 여기... 분명히 1억이야”
미영은 여전히 거친 숨을 들이키며 쇼핑봉투를 건넸다.
그 남자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어 미영의 손에서 빼앗듯이 쇼핑봉투를 낚아채갔다.
봉투 안으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넣어 지폐 뭉치를 세던 남자가 마침내 말했다.
“맞군. 좋았어...”
“하은이.. 우리 하은이는 어디에 있지? 데려온다고 했잖아!”
“하은이? 아 그래! 꼬마는 저기 남자화장실에서 자고 있어 크크큭”
“하은아!”
미영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아무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곤 하지만 화장실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자주 빛 사막에 있었을 때처럼 생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날 속인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불쑥 미영을 엄습해올 때 가장 마지막 변기 칸에서 좌변기위에 앉아 조용히 자고 있는 하은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예쁜 모습으로 하은이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억 하.. 하은아 ~ 아앙“
미영은 하은이를 보자마자 바로 끌어안았고 눈물을 그치질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미영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자신이 안고 있는 것이 내 새끼가 아닌 느낌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품이 아니라 이것은 차갑고 딱딱한 목각인형이었다.
이 느낌은 미영이 알고 있는 그것이었다.
심지어 이 느낌을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며 평생을 절대로 잊지 못할 감촉이었다.
“아... 아... 아...”
미영은 입을 간신히 벌릴 수는 있었지만 차마 목구멍 밖으로 어떠한 말도 끄집어 낼 수는 없었다.
“아.. 아... 아.... 아니지? 그지 아니지? 장난이지?”
미영은 자신의 오감을 부정하기 시작했지만 축 처진 하은이의 머리와 절대로 뜨지 않는 눈.
그리고 그 아래 검붉은 익숙한 그것.
미영은 싸늘해진 하은이를 안고 엎드린 상태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짜디짠 액체를 온몸으로 쥐어 짜내던 미영이 또 다른 비릿한 액체를 자신이 내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뾰족한 칼날이 등 뒤 부터 뱃속까지 그대로 느껴졌다.
"약속대로 돈은 줬잖아! 어째서“
“뭐 죽은 자 만이 말이 없는 거 아니겠어.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괴로울 뿐이라고. 뭐 본인은 모르겠지만 크크큭”
"너 나를 속였어! 우리 하은이 무사히 보내준다고 해놓고...“
"약속은 지켰지! 아줌마 곁으로 보내준다고 했잖아! 크크큭 안그래?“
그 말을 마치고 그 남자는 쇼핑봉투를 든 채 자리를 떠났다.
미영은 등에 박힌 날붙이를 떼어내고는 하은이 옆에 쓰러져 누웠다.
스멀스멀 퍼져가는 붉은 피 사이로 굵은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찍혀갔다.
미영은 생각했다.
‘내게 1억이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녔어.’
‘어차피 그놈은 우릴 죽일 생각이었어... 저 사이코패스 같은 놈을 믿은 내가 미친년이지...’
‘엄마가 돼가지고는... 난 이번에도 하은이를 구하지 못했네...’
‘이번엔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목소리 한번 듣지 못했어...’
‘나... 아무것도 못하겠어... 솔직히 나 혼자 못하겠어...’
미영은 너무나도 비루하고 나약한 자신을 한탄하고 또 한탄했다.
엄마가 되어서 스스로 딸을 지켜내지 못하고 한심하게 눈물만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대로 미영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