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창덕궁 안. 낮.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올리고, 아이보리 저고리에 연분홍색 치마를 갖춰 입은 자인. 화사한 봄빛처럼 한복이 꽤 잘 어울린다. 단아한 자태로 있던 자인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지 한 발 한 발 수줍은 미소로 걸음을 내디딘다.
복도를 지나 편전 앞에 선 자인.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후 문을 열고 편전 안으로 들어선다.
누군가가 있길 바랐으나 텅 빈 용상만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실망한 자인이 고개를 푹 숙인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운다. 자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는 왕.
시무룩해 있던 자인이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왕이 부드러운 미소로 자인을 맞이한다. 자인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왕에게 다가간다.
“OK. 컷! 아주 좋았어요! 조금 쉬다 다음 촬영 갈게요!”
무사히 첫 촬영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자인은 곧바로 큐브를 찾았다. 한복도 갈아입지 않고 큐브 맞추기에 집중하자 뒤따라 들어온 용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옷부터 갈아입지? 의상 반납하고 다음 촬영 들어가야 하잖아.”
“어, 알았어. 잠시만….”
“대표님, 괜찮아요. 조금 있다가 반납해도 돼요. 그나저나 언니! 촬영하는 내내 어떻게 참았대요? 완전 푹 빠지셨는데요?”
“그러게. 야, 한복 갈아입으라고! 이 봐봐. 이젠 대꾸도 안 한다.”
“언니가 몇 년 만에 집중이라는 걸 하는데 그만 괴롭히시죠? 저 다음 촬영 상황 좀 보고 올게요.”
“그래. 아무 반응 없으니 재미없다. 나도 내 볼일 보련다.”
민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한 통화가 있는지 용수도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자인은 그들이 나간 줄도 몰랐다. 계속 큐브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렇지!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그럼 이 부분을 이렇게 돌리면…. 아, 정말! 또 실패야?”
민지가 알려준 공식대로 따라 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다. 어쩌다 1단계를 완성해도 그다음 단계에서 또다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분명 똑같이 따라 했는데 왜 안 되지? 혹시 이 공식 가짜 아냐? 아, 짜증나네.”
거듭된 실패에 자인은 점차 지쳐갔다. 그냥 포기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한 줄도 못 맞추냐? 그래도 난 한 줄은 했거든?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한테 한 달 동안 누님 또는 오빠. 그리고 높임말 쓰기! 기억하지? 자, 어디 오라버니라고 한번 불러봐!
“으악! 싫어. 개용수 따위에게 존댓말이라니, 절대 있을 수 없지!”
자인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마치 용수가 눈앞에서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큐브를 놓을 수가 없었다.
“좋아! 이판사판! 그냥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계속 돌리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자인은 공식을 보지 않고 마음대로 해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규칙 따윈 모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돌리기 신공을 펼쳤다.
그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해도 잘 안 되던 큐브가 눈 한 번 깜박였다 뜨자 금세 한 줄이 완성된 것이다.
“어, 뭐야? 지금 내가 한 줄 만든 거야? 와! 나 천잰가 봐!”
얼떨떨해하던 자인은 환호도 잠시 완성된 면을 탐색하며 더욱더 집중했다. 마치 홀린 사람처럼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돌리길 몇 번, 드디어 큐브의 한 면에서 비가 내리는 장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 사진보다 훨씬 예쁘네? 근데… 이 그림이 왜 실제로 내 눈에 보이는 거지?”
큐브의 그림을 감상하며 멍한 표정을 짓던 자인은 뒤늦게 자신이 한 면을 완벽하게 맞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기 시작했다.
“와! 나 지금 성공한 거야? 대박! 내가 했네! 했다고! 봐봐! 나도 할 수 있잖아!”
자인은 벅찬 기쁨을 표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 대신 텅 빈 대기실만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 중요한 순간에 다들 어디 간 거야?”
잠깐 실망했지만, 나중에 용수와 민지가 돌아와서 보고 깜짝 놀랄 생각을 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뭐, 곧 오겠지? 헤헤. 이것들이 감히 날 무시했다 이거지? 깜짝 놀랄 거다.”
특히 용수가 ‘누님’ 하며 자존심 상해할 걸 생각하니 더더욱 통쾌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길 한참.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져 조금씩 몸이 근질거렸다.
“아!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결국 기다림에 지쳐, 아니, 한시라도 빨리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자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오두막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용수야! 누님이 드디어 성공했다!”
* * *
한 손에 큐브를 들고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오두막 밖으로 나온 자인이 용수를 찾아 나서는 그때, 큰 나무통을 든 사람들이 어디선가 튀어나오더니 그녀 앞을 스쳐 지나갔다.
“비켜요! 다치니까 저리 비키라고!”
“죄, 죄송합니다.”
자인은 사람들에 치여 얼떨결에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다시 용수를 찾아 부르려던 순간 모래를 머금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잉….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자인은 급히 눈을 감고 옷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모래가 들어갔는지 눈이 따끔거리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강풍기를 얼마나 세게 틀어놓은 거야? 머리 엉망되겠네? 화장까지 뜨면 안 되는데…. 바람은 왜 또 이렇게 뜨겁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가질 무렵 쌩쌩 불어오던 바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다. 자인은 흘러내리는 눈물과 눈가에 묻은 모래를 닦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순간,
“뭐, 뭐야? 나도 모르게 전쟁이라도 난 거야? 여기 왜이래?”
눈앞에 어처구니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촬영 전에 봤던 창덕궁의 모습은 사라지고, 볼썽사납게 부서지거나 반파된 전각들만 잿더미 사이로 드문드문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불에 탄 기둥과 깨진 기왓장 조각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우거진 잡초들과 모래가 사실은 타버린 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정도로 썩어버린 나무들이 길바닥에 널려 있었다.
“방금 까지 촬영하던 그 창덕궁 맞아? 뭐야? 다음 촬영준비 중인가? 콘티론 이 배경이 아닌데? 바뀐 건가?”
눈앞의 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웠다. 자인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아플 정도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젠장.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워?”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하늘에 떠 있는 해는 겨울 날씨를 부정하듯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니야. 자인아, 내가 너무 당황해서 잠시 더운 걸 거야. 진정하자.”
자인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어느새 손부채질을 하기에 바쁜 자신을 발견하고 울상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침착하냐고!”
그때 그녀의 혼란을 더해주듯 영차영차 하는 소리와 뚝딱거리는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자인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뿌연 먼지 사이로 폐허가 된 창덕궁을 정리하는 사람들과 새로 전각을 짓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헉! 저 사람들은 또 뭐야? 스탭인가? 아, 아닌 거 같은데?”
촬영준비로 바쁘게 움직여야 할 감독과 스태프들 대신 사극에서 자주 보던 허름한 무명저고리 차림의 장정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 창덕궁 아닌가?”
다시 한 번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방금까지 촬영하던 창덕궁이 맞는 것 같았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진짜 미치겠네. 어? 그러고 보니…. 이쪽 길에 큰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없잖아? 왜 없지? 진짜 폭격이라도 맞았나? 그렇다 해도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하잖아. 아무것도 없는데? 설마 내가 촬영하던 곳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혹시나 또 다른 것이 없나 눈을 부릅뜨고 찾아 나섰다. 하지만 너무 많이 변해버려 다른 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맞는 거야 아닌 거야? 에잇, 어차피 안 돌아가는 머리 그만 쓰고 한번 물어보자. 사람들도 많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누군가는 알겠지.”
자인은 걸음을 옮겨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저기… 저기요. 아저씨, 여기 창덕궁 맞아요? 지금 뭐 하는 중이에요?”
“…….”
“안녕하세요. 혹시 스탭이세요? 왜 한복을 입고 일하세요?”
뭐가 그리 바쁜지 사람들은 자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마다 자기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뭐야? 내가 투명인간이야? 왜 대답들이 없어?”
몇 번의 물음에도 답이 없자 자인은 다른 이들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자인의 시야에 관복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와! 하다하다 이젠 코스프레야? 여기 도대체 뭐지?”
어안이 벙벙하여 한참을 서 있던 자인은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손뼉을 짝 쳤다.
‘아! 사극 영화가 크랭크인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영화촬영 준비 중인가? 그럼 여긴 영화 세트장? 근데 문화재를 이렇게까지 훼손하면서 스케일 크게 꾸며도 되나? 아니지, 오두막도 지었는데 뭐. 허가만 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아… 그래서 지금 공사 중인가 보네. 그럼 나는? 나는 왜 여기 있지?’
자인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싸매며 정답을 찾아보려 애썼다.
‘혹시 문이 두 개였나? 그래서 한쪽은 이곳으로 연결된 건가? 아니야. 내가 똑똑히 봤는데 분명 하나였어. 그럼 뭐지? 자인아. 제발 생각 좀 해보자. 머리를 쓰라고….’
그때였다.
-촬영팀에서 만든 거래. 이름하여 이동식 오두막.
순간 용수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의 초등학생 같은 장난기도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개용수! 감히 오두막을 나 몰래 옮겨놔?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잡히면 넌 죽었어!”
자인은 긴장이 풀려 안심이 되는 한편 용수에 대한 분노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인은 당장 오두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걸어가던 자인은 폐허가 된 창덕궁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지? 신인…배우인가?’
그때, 곤룡포를 입은 왕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얼마나 매섭던지 자인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살인마 연기하던 배우인가? 눈빛이 왜 저래?’
왠지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인이 누구인가. 연예계 생활만 십수 년째 아닌가. 자인은 처음 보는 배우에게 기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인은 고개만 까닥거리며 최대한 도도하게 인사했다. 자신의 행동에 왕의 눈썹이 꿈틀거린 건 아마도 착각이려니 생각하며.
그런데,
‘뭐야? 설마 이리로 오는 건가? 왜, 왜 와?’
갑자기 왕이 호위들과 함께 다가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의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인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후다닥 모퉁이를 돌아 오두막 안으로 도망쳤다.
“어우! 잘생기면 뭐해. 역시 요즘 신인들은 무섭다니까.”
냉큼 문을 닫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신인배우가 진짜 왕처럼 느껴졌다.
“후아. 감독이 누군지 몰라도 대박 캐스팅이네. 송보검보다 더 진짜 왕 같았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앉을 자리를 찾던 자인은 또 한 번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오두막에 돌아오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자인의 예상은 빗나갔다.
오두막 안에 있어야 할 캐리어 가방도, 용수가 걸터앉아 있던 탁상도, 의자도, 옷을 갈아입던 간이탈의실도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개용수 이 자식이! 나 나간 사이 짐도 다 옮긴 거야?”
자인은 오싹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용수의 장난으로 치부하려 했다.
“개용수 너… 여, 여기 있지? 죽을래? 장난 그만 치고 당장 튀어나오지 못해? 나 갑자기 무섭다고….”
처음 소리 지를 때와 달리 갈수록 자인은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바로 그때,
쿵쿵쿵!
누군가가 오두막 입구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