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종훈이 (1)
태수는 결국 잠을 설쳤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태희가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할 때도 싱크대가 계속 신경 쓰였고 태준이의 아침밥을 챙겨줄 때도 괜히 싱크대 앞에서 서성였다.
그 결과 동생들이 모두 등교하고 나서도 괜히 싱크대가 신경 쓰여 9시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태수는 9시가 되자마자 바로 싱크대에서 가방을 꺼내 은행으로 향했다. 그런 다음 예금 계좌에 가져온 돈 전부를 입금시켰다. 10년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태수는 통장에 찍힌 여덟 개의 동그라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종훈이를 만났다.
이 시간이면 등교하고도 남아야 할 종훈이가 집 앞 골목길에서 개미 구경을 하고 있으니 태수는 의아함을 느꼈다.
태수가 말했다.
"종훈아, 여기서 뭐해?"
"태수 형아!"
태수의 물음에 종훈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수에게 안겼다.
조그마한 종훈이를 안아든 태수가 종훈이의 코를 닦아 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우리 종훈이, 학교도 안 가고 왜 이러고 있을까?"
"오늘은 학교가 개교기념일이라서 학교 안 가도 돼요."
"이야, 우리 종훈이 개교기념일이라는 말도 할 줄 알아?"
"저 받아쓰기 백 점이에요."
"밥은 먹었고?"
"할머니랑 먹었어요."
"그래? 뭐하고 먹었는데?"
"김치랑 계란."
종례 할머니는 또 파지를 주우러 나가신 모양이다.
태수는 보호자도 없이 또 하루 종일 할머니를 기다려야 할 종훈이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출근하면 종훈이 점심은 어떡하지?'
한 번 눈에 밟히기 시작하자 끝도 없이 생각났다.
물론 태수가 누굴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종훈이네보다는 나았으므로 충분히 챙겨줄 여력은 되었다.
태수는 종훈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 다음 종훈이를 앉혀 놓고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돈도 생겼겠다, 더 이상 일할 필요도 없는데······ 그냥 오늘 쉴까?'
관둔다는 건 생각도 못 해 본 터라 단순히 하루를 쉬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어차피 일을 관둔다고 해도 당장 할 일도 없었고 동생들한텐 마땅히 핑계 댈 구실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도 제대로 못 잤기에 이 상태로 출근할 바엔 차라리 집에서 쉬는 게 나았다.
태수는 결심한 듯 전화기를 들어 사장님께 전화했다.
"···그래, 쉬어라."
사장님한테는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평소에 신뢰가 두터운 태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평소엔 휴일도 반납한 채 기계처럼 일만 해댔기에 태수에게는 충분히 쉴 자격이 있었다.
"사장님한테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막상 휴일을 받았다고 생각하자 잠이 깨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날 새우기로 한 거 그냥 잠을 포기하고 제대로 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종훈아, 오늘은 형이랑 둘이서 놀까?"
"정말요?"
"그럼. 평소에 종훈이가 할머니 말씀도 잘 듣고, 받아쓰기도 백 점 맞고 그래서 오늘은 종훈이한테 상을 줘도 될 것 같은데?"
"와!"
종훈이는 정말 순수하게 기뻐했다.
태수는 문득 태준이가 초등학생일 때가 생각났다.
태준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태수는 막 중학교에 들어가던 차였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태수네 가정은 화목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왠지 모르게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형 좀 씻고 올게."
잠에서 확실히 깨기 위해 태수는 냉수로 씻었다.
그런 다음 옷을 갈아입고 종훈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태수가 물었다.
"종훈아. 오늘 같은 날은 점심을 어떻게 먹었어?"
"이걸로 편의점 가서 먹었어요."
종훈이는 주머니에서 '희망 급식'이라고 적힌 복지 카드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형편이 안 되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동사무소에서 발급하는 일종의 복지 카드였다.
태수가 알기엔 그 카드는 한 끼에 4천 원 정도 지원해 주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4천 원이면 김밥 집에서 라면 한 그릇과 김밥 한 줄 사먹는 게 고작이라 영양가 면에서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웃음을 잃지 않고 되려 종훈이를 칭찬했다.
"이야! 그럼 종훈이는 할머니가 없어도 혼자서 밥 잘 챙겨 먹었다는 거네?"
태수의 말에 종훈이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태수는 그런 종훈이가 너무나도 기특한 나머지 오늘 하루만큼은 최선을 다해 종훈이를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 생각했다.
"종훈이는 평소에 뭐 하고 싶었어?"
"저는······."
종훈이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머뭇거리는 듯했다.
아마도 태수의 눈치를 보는 듯싶었다. 태수가 그 사실을 빠르게 캐치하고 얼른 말했다.
"형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라서 종훈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는데."
"정말요?"
"그럼! 물론이고 말구."
기껏해야 놀이공원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종훈이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친구한테 가고 싶어요."
"친구?"
"네."
"친구, 누구?"
"수훈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친구 집이 조금 멀어서 혼자서는 못 가요."
"그래? 그럼 한번 가 보자. 친구가 어디 사는지는 알아?"
"정말요? 정말 가도 돼요?"
대체 얼마나 먼 곳에 있길래 친구네 집이 먼 곳에 있다고 하는 걸까?
태수는 신이 나서 먼저 신발을 신고 나가는 종훈이를 서둘러 따라나섰다.
"응?"
그러나 종훈이가 향한 곳은 점심을 사먹는다는 아래쪽의 편의점이었다.
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종훈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종훈이는 사탕을 샀다.
그것도 하나에 200원 하는 막대사탕을 15개나 사고 천 원짜리 초코바를 사서 점심 값 4천 원을 모두 사용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봉투에 담은 뒤 태수에게 다가와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형도 이거 먹어요!"
"그래, 고마워."
군것질을 하지 않는 태수였으나 군말 없이 사탕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태수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가는 종훈이에게 태수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사탕은 왜 이렇게 많이 샀어?"
"아. 이거는요, 수훈이 동생들이 많아서 동생들한테 줄 사탕이에요."
"동생들?"
"네."
들을수록 알쏭달쏭했다.
종훈이는 태수의 손을 거의 끌고 가듯이 잡아끌었다.
태수는 그런 종훈이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가듯 따라갔고 한참을 걸은 끝에 종훈이가 말한 친구네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란 희망의 집
"여기는······."
한참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보육원이었다.
태수는 그제야 친구네 집이 멀다고 한 것도, 친구의 동생이 많다고 한 것도 이해가 됐다.
태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형아, 빨리 가요!"
그런 태수를 잡아끈 것은 종훈이였다.
태수는 일단 종훈이를 따라 보육원 안에 들어갔고 보육원에 도착한 종훈이는 태수의 손을 놓고 익숙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열심히 뛰어갔다.
"수훈아!"
"어? 종훈아!"
종훈이는 '사랑방'이라고 적힌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는 각종 장난감과 책이 구비된, 보육원에서 운영하는 자그마한 놀이방에서 놀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태수는 어색한 모습으로 종훈이를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뒤섞여 노는 종훈이를 보며 어떤 말을 해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구세요?"
그때였다.
뒤편에서 어느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체구에 안경을 착용하신 인자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태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수가 얼른 자기소개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종훈이라는 아이의 옆집 형인데······."
"아, 종훈이가 왔군요! 어서 오세요. 저는 이곳 파란 희망의 집, 보육원장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다름 아닌 이곳의 원장님이셨다.
원장님은 태수가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자 원장실로 올 것을 제안했다.
원장실에 들어온 태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자그마한 테이블 앞에 앉아 차 한 잔을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래요. 종훈이네 옆집 형이시라고···?"
"아, 네. 저는 기태수라고 합니다. 그냥 옆집 사는 형인데 종훈이가 오늘 학교도 안 가고 집 앞에 혼자 있길래··· 뭐, 어쩌다 보니 친구를 보고 싶다고 해서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됐네요."
"호호, 그렇군요. 눈치를 보니까 여기는 처음이신 것 같은데?"
"네. 여기에 보육원이 있다는 것도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보육원이라는 존재에 대해 잘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여기엔 수훈이라는 아이가 한 명 있는데 종훈이와 수훈이는 같은 반 친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끔씩 종훈이가 보육원에 놀러오기도 한답니다."
"아아······."
"종훈이는 나이도 어린데 생각이 참 깊은 아이에요. 밥 사먹으라고 받은 급식 카드로 여기 올 때마다 초콜릿이랑 사탕을 사서 오는데 그럴 때마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런데 태수 씨는 오늘 바쁘신데 종훈이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 온 거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저한테 종훈이 맡기고 가셔도 됩니다. 제가 이따가 종훈이 데려다 주면 되거든요."
"아, 아닙니다. 저도 오늘 마침 휴무고 해서 그냥 종훈이를 돌봐줘야겠다 싶더라구요. 그리고 얼마 전에 종훈이 할머니가 집에 늦게 들어오신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까 그··· 치매 증상을 좀 보이셔서 얼마 전에 지구대에서 모셔 온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왠지 모르게 종훈이한테 신경이 좀 쓰이더라구요."
"종훈이네 할머니가요? 그건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그러면 안 되는데 큰일이네······."
원장님도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이곳 파란 희망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이 개인이 운영하는 비인가 보육원이라는 사실과 시설의 규모, 수용하고 있는 아이들의 수 등등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원장님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진짜 대단한 일을 하시네요."
"호호, 대단하기는요. 제가 사랑을 베푼 만큼 아이들도 커서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안다면 그거야말로 참 값진 일이 아닐까요?"
태수는 그녀의 말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해서 남에게까지 사랑을 베풀지 못할 까닭은 없다.
이것은 태수가 늘 명심하고 있던 사실이었고 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부분이었다.
태수가 물었다.
"아이들이 총 20명이라구요?"
"네, 그런데요?"
"괜찮으시면, 오늘 아이들이 먹을 점심은 제가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예? 태수 씨가요?"
"제가 겉보기에는 이래도, 이래저래 사정이 좀 있어서 돈은 좀 많습니다. 그러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뇨, 무리라뇨.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마음 같아선 매일같이 와서 봉사하고 싶지만 저도 동생들을 키우는 입장이라 일 때문에 그렇게는 힘들 것 같고··· 이렇게라도 해야 오늘 종훈이를 위해 뭔가를 했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요."
"그럼,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역시 배달 음식이 좋겠죠? 괜찮나요?"
"아, 네! 그런데 얘들이 한참 클 때라서 무지하게 먹어댈 텐데······."
"아휴, 그런 걱정일랑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가서 애들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네요. 뭐 먹고 싶은지.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태수는 가벼운 목례 후 원장실을 나섰다.
그런 다음 사랑방 문을 활짝 열고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피자 먹고 싶은 사람,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