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흘란의 송곳 같은 질문에 라세탄의 고개가 주억거렸다.
“물론 충분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달의 임무는 수송이지 복제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혹여 복제인간 생성 설비가 완벽하다 해도 치료제가 없는 현 상황에서는 그것도 불완전합니다. 왜냐하면,”
이어진 라세탄의 설명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던 사람들의 심정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치료제가 없는 지금, 복제인간의 수명은 길어도 한 달을 넘기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복제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을 복제하는 것은 공장에서 안드로이드를 찍어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복제에 있어서 장기나 다른 신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뇌에 있었다. 복제할 때마다 뇌를 스캔하는 것은 원본, 즉 원래의 뇌에 상당한 손상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적정 복제 횟수가 최소 몇 년 단위라는 라세탄의 말을 듣고서는 망연자실했다.
“박사,”
웅성거리는 주위와는 달리 이 상황을 충분히 예상한 듯 베흘란은 담담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냉동 수면 말이오. 수면 상태에서는 어떻습니까? 병이 활성화되나요? 확인된 게 있소?”
“없습니다. 냉동 수면에서는 알려진 어떤 바이러스도 발병할 수 없습니다.”
베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냉동 수면은 최소의 열량으로 가사 상태에 빠지는 것, 즉 체내에 잠복한 바이러스는 숙주의 체온이 올라가고 다시 활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비활성화된 상태로 남아 있을 터였다.
그때 시그넬린의 서슬에 조용히 관망하던 자베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다면 일단 에녹스에 도착할 때까지는 안전하다는 거군. 나머지 일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되고.”
그러나 라세탄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진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꽉 다문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말씀드린 대로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냉동 수면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라세탄의 또 다른 고민이자 에녹스3으로 향하는 최종 관문,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행성과는 달리 자원이 한정된 두 번째 달에서 300만이나 되는 대규모 인력이 동시에 냉동 수면에 들어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큰 작업이었다. 천천히 진행하지 않으면 달의 동력은 순식간에 소모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우주의 미아가 될 터였다.
따라서 원래 계획은 총 십여 차례, 약 3년에 걸쳐 차례대로, 청해진 순번에 따라 수면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3년이라는 세월은 급박한 현 상황에서는 영겁과도 같은 긴 시간이었다.
현재 1차 접종자들에게서만 발생한 질병이 2개월 사이에 다음 접종자들에게서도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군, 시간이 없어. 시간이….”
베흘란이 상심하듯 중얼거렸다.
이대로라면 아틀란티스의 300만 명 중 살아남는 이는 채 절반도 되지 않을 터였다.
“아니,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소? 원래 순번 대로 진행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자베르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0여 개로 나눠진 수면 그룹 중 첫 번째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베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나라면 가장 먼저 수면에 드는 짓은 하지 않겠소. 분명 후회하게 될 테니. 아니 후회도 사치겠군요. 그럴 여력이 있을지나 모르겠군.”
베흘란이 말했다.
“베흘란 당신, 아마 7번짼가 그렇지? 그래서 딴지라도 걸겠다는 거요?”
“그럴 리가.”
베흘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속한 첫 번째 무리가 수면에 들어갔다 칩시다. 그럼 순번이 한참이나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보고만 있겠소? 이대로라면 뻔히 죽을 걸 아는 그들이 말이오.”
“기, 기가 차군. 뭐,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자베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애써 속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도 방금 깨달은 것이다. 남은 이들이 가만히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마 모든 수면 용기가 파괴되고 종국에는 파멸에 이를 테지요. 자, 주위를 둘러보세요.”
베흘란의 말에 자베르가 홀린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욕망, 무조건 살아남겠다는 생존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수백 개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기가 질린 자베르는 들릴 듯 말 듯 한 욕지기와 함께 말끝을 흐렸다.
“빌어먹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백억의 동족을 외면했고 뼈 마디마디가 삶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 군상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자신의 차례가 아니라고 순순히 삶을 포기할 리가 만무했다. 결국 내전과 폭동으로 공멸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베흘란은 이것을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해결책에 대해서 말해 볼까요?”
시그넬린이었다. 급박한 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어조의 그녀는 더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베흘란은 느꼈다. 순간적이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던 시그넬린의 눈매를.
‘시그넬린. 역시 당신은 해결책을 알고 있었군.’
익숙한 표정이었다.
한때 연인이었던 과거, 항상 자신의 결정을 베흘란에게 검증받아야만 안심하던 시그넬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이 도출한 방책에 대한 의견을 물으려 하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베흘란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번째 달의 주 추진체는 총 6개입니다. 그중 3개만 작동시키고 나머지 동력을 모두 냉동 수면으로 돌리는 겁니다.”
“나쁘지 않군요. 하지만 단점도 있을 텐데. 그것도 말씀해 주시죠. 베흘란 장관님.”
시그넬린의 입꼬리가 눈에 띌 듯 말 듯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 아니 베흘란과 자신만이 아는 만족감을 표출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6개의 주력 추진체로 1,200년 동안 항해를 해야지만 에녹스3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진체가 반으로 줄어든다면 예상 도달 시간은 예측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지체될 것입니다. 흠….”
잠시 베흘란의 눈이 감겼다.
예정대로라면 변수를 감안해도 늦어도 1,500년 안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진체가 줄어든다면? 이것은 재난이었다.
6개의 추진체가 3이 되는 ‘6-3=3’의 단순한 계산법을 적용할 수 없었다.
‘6개의 온전한 추진제로 항해했을 시 발생하는 가속력, 이 가속력이 줄어든다면…,’
대략 생각을 정리한 베흘란이 말을 이어나갔다.
“최소 5천 년 이상 더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순간 시그넬린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졌다. 지금 에녹스3으로 가는 것은 식민지 건설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수천 년의 허송세월은 그다지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시그넬린의 입에서 한숨 섞인 푸념이 새어 나왔다.
“후우. 5 천년이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의장에게로 향했다. 이제 곧 그들의 운명이 그녀의 입에서 결정될 것이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마침내 시그넬린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요. 베흘란 장관님의 의견이 현시점에서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그리고 확실한 해결책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진행 하겠습니다.”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부 만족할만한 결정이었다.
어쨌든 자신들은 죽지 않아도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시그넬린이 시끌벅적하던 좌중을 향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았음을 인지한 사람들이 다시 의장에게 집중했다.
“이제 방향은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박사, 첫 번째 접종자 중 생존자가 얼마나 된다고 했죠?”
“5만 명입니다.”
“5만이라…, 부관, 전부 처형하세요.”
“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놀란 부관의 동공이 튀어나올 것 같이 확대되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시행하세요.”
“알, 알겠습니다.”
그때 라세탄이 퇴장하려던 부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5만 명 중에서 4만 명은 아직 발병도 하지 않았어요. 이건 학살입니다!”
“라세탄 박사.”
한껏 흥분한 라세탄을 잠시 바라보던 시그넬린이 그녀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밀착시켰다.
“달에 승선한 300만 명의 쓰임새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겁니다. 당연히 초기 접종자 10만 명은 그들대로 쓰임새가 있는 거고. 박사, 당신은 지금부터 발병하지 않은 4만 명의 뇌를 정제해서 치료제를 만드세요.”
“의장님, 제발,”
흐느끼다시피 하는 라세탄을 향한 시그넬린의 태도는 더없이 냉담했다.
“민중이란 소문에 약한 존재들입니다. 벌써부터 건강한 뇌를 섭취하면 병을 예방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는 거, 박사도 알잖아요. 이런 것들은 애초에 뿌리 뽑아야 합니다. 튼튼한 제방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는 법이죠. 흥, 인류애? 동정? 지금의 우리에게 그따위 것들은 사치랍니다. 라세탄 박, 사, 님.”
자신의 이름을 힘주어 곱씹는 시그넬린의 말에 라세탄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참, 그중에서 쓸만한 기술자들 백여 명은 남겨 놓으세요. 그 정도는 배려하죠.”
“알겠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쓸만한 기술자들 백여 명에 의장의 아들 네시안이 포함되어 있을 거란 사실을.
‘미안하네, 라세탄,’
베흘란은 힘없이 돌아서 가는 라세탄의 눈빛을 끝내 외면하고 말았다.
지금의 그에게 시그넬린은 감당하기 힘든 버거운 상대였다.
***
에녹스3, 1만 킬로미터 상공.
거대한 구체 하나가 에녹스3의 외기권으로 서서히 진입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동선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방향을 수정하고 있었다.
잠시 후,
쉴새 없이 움직이던 구체는 마치 명당자리라도 찾은 것처럼 일 순간 동작을 정지했다.
“행성의 중력권에 진입했습니다.”
”오 분 뒤, 모든 추진체가 소등됩니다.“
구체의 울퉁불퉁한 평원에 세워진 삼각뿔 형태의 상황실에서 조종간을 잡은 안드로이드들이 쉴새 없이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1번 엔진 소등!“
안드로이드의 복창과 함께 3개의 주 추진체의 열기가 차례대로 사그라들었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모든 엔진들이 하나씩 멈추기 시작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출력 정지!“
그렇게 주 엔진의 점등을 시작으로 수십 개가 넘는 보조 엔진들의 동력도 하나, 둘. 마치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상실되고 있었다.
”모든 추진체 소등, 행성 궤도에 진입합니다.“
마침내 구체가 궤도에 진입했다. 이제는 에녹스3의 위성으로 전락한 검은 구체의 정체는 바로 아틀란티스의 두 번째 달이었다.
”5, 4, 3, 2, 1! 궤도 안착 성공!“
머나먼 여정 끝에 마침내 안식을 얻은 아틀란티스의 달이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두 번째 달, 이제 곧 자전에 돌입합니다!“
아틀란티스의 두 번째 달,
아니 그것은 달이라기보다는 외계의 공격으로부터 문명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아틀란티스의 마지막 생존자 300만 명이 탑승한 거대한 우주선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추진체 소등완료.“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구형 안드로이드의 멘트와 함께 마지막 33번째 추진체의 열기가 서서히 꺼져갔다.
모성 아틀란티스를 떠나온 6천 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내 뿜어지던 수많은 추진체의 열기가 전부 사그라든 것이다.
곧이어 아틀란티스의 달은 이제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듯 에녹스3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기 시작했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양 한 줌의 이질감도 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그때였다.
”후우우.“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한 사내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는 마치 입술에 접착제라도 발라 놓은 듯 수차례 인중을 씰룩거리다 힘겹게 한 마디를 뱉어냈다.
”드, 드디어 도착인가.“
장발을 어깨까지 드리운 중년의 사내, 그는 바로 베흘란 톨베르트였다.
베흘란은 적정 온도에도 불구하고 바들바들 떨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관님. 이것 좀.“
그때 안드로이드 블라이나가 윤기 있는 흑발을 쓸어 올리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내밀었다.
”고, 고맙네.“
막 냉동 수면에서 깨어난 베흘란은 마치 얼음장 위에 앉은 듯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하며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