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라세탄, 뭘 꾸물대나? 설마 말하는 법이라도 잊어버렸나?”
바이단이 하얀 백태로 가득 덮여 보기만 해도 역겨운 혀로 연신 입술을 축여가며 이죽거렸다.
“허어 답답하구먼. 정말 이 노인의 입을 빌 생각인가?”
그러나 대화의 상대는 분명 라세탄임에도 불구하고 바이단의 시선은 시그넬린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묻겠다는 듯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음, 그러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라세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려던 차였다.
“라세탄,”
시그넬린이 눈짓으로 그녀를 제지하고 나섰다.
“그건 제가 설명드리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가 싶던 시그넬린이 순식간에 바이단의 면전에 다다랐다.
“바이단님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뭐?”
상대의 황당한 말에 바이단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나는 말장난 따위는 좋아하지 않네 시그넬린.”
“그럴 리가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그넬린이 말을 이어나갔다.
“치료제가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반쪽짜리일 뿐이죠.”
“반쪽?”
바이단의 반문에 시그넬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여러분, 우선 치료제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순간 모든 이들의 상반신이 앞으로 쏠렸다. 그들은 모든 감각기관을 활짝 열고 의장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촉각을 곤두세웠다.
시그넬린이 잠시 말을 멈춘 채 그런 그들을 눈으로 훑어나갔다.
“….”
멸망해가는 아틀란티스에 남겨진 백억의 인구.
그들을 버리고 두 번째 달에 승선해 고향을 등진 300만 명의 피난민들.
게다가 그들은 최근에서야 겨우 외계 침략자의 추적에서 벗어났다. 이제 계획된 대로 에녹스3으로 이주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밋빛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그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뇌가 녹아내리는 최악의 질병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바야흐로 그 치료법이 공개되려는 순간이었다.
”치료제는 인간의 뇌를 정제해서 추출합니다.“
순간, 웅성이던 좌중이 정적으로 휩싸였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정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뇌 자체를 용해해 불순물을 없애고 순수한 물질을 얻는 과정.
그것은 하나의 생명을 희생해 다른 생명을 살린다는 뜻임을 단박에 깨달았다.
결국 치료제의 추출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산 사람은 살아야지.“
바이단이었다.
마치 자신의 말에 동의를 구하는 듯 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쓰윽 훑으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많은 생명을 담보로 여기까지 왔어.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말이야. 아메리의 시그넬린이 그 뜻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바이단에게 쏠려있던 이목이 순식간에 시그넬린에게로 옮겨갔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는 그의 말에 사람들은 의장의 다음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이단님. 혹시 마지막 성관계는 언제 하셨나요?“
”뭐?“
시그넬린의 느닷없는 질문에 바이단의 동공이 커졌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재차 되물었다.
”방금, 성관계라고 했나? 맞나?“
”네. 그런데 너무 직설적이었나요? 그럼 이렇게 질문드리죠. 바이단님. 지금 생식이 가능하신가요? 종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열량 소비가 가능한가 말입니다.“
”흠. 그런 뜻이었구먼.“
그제야 상대의 질문을 이해한 듯 그의 움푹 팬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이봐요 의장,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감히 우리 몬티아를 어떻게 보고,“
”얘야. 앉거라.“
바이단이 항의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아들 마리드를 향해 손짓을 했다.
”우선 들어보자꾸나. 이유가 있겠지. 참, 이 노구의 마지막 성관계는 기억도 나지 않네. 너무 오래돼서 말이야.“
”아버지, 그래도.“
그러나 마리드는 더 이상 바이단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더 없이 온화한 말투와는 달리 상대를 향해 뜨거운 노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버지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몬티아가의 두 부자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한 시그넬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달에 탑승한 마지막 생존자들의 수는 3억도 아닌 겨우 300만입니다. 그중에서 반을 희생해 반을 살린다? 그렇다면 과연 생식이 불가능한 바이단님같은 노인들이 설 자리가 있을까요? 아무리 대 가문의 일원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흐흠,“
헛기침과 함께 방금까지만 해도 형형한 노기를 뿜던 바이단의 눈에서 독기가 사그라들었다.
자신에게 모욕을 안겨 준 시그넬린이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한때 아틀란티스를 이끌어가던 4대 명문가. 그러나 지금 시국에서는 한낱 허울만 남은 과거형일 뿐.
모든 권력은 이제 아메리, 즉 시그넬린 1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 자신 같은 노인이 희생되는 건 지금의 시그넬린에게는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내가 성급했구먼. 이 아이의 무례를 용서하게.“
힐끗 마리드를 곁눈질하던 바이단이 시그넬린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시그넬린. 자네가 말한 대로라면 내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네, 원래는 그랬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계획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라는 게, 음, 분명 아틀란티스의 미래에는 부정적이겠지만 바이단님에게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요.“
시그넬린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로 돌아갔다.
”원래대로라면 경쟁력 있는 150만 명을 위해 나머지 150만 명이 희생해야 하지만…,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여우 같은 노인네.’
잠시나마 경멸의 눈빛을 보냈던 시그넬린은 상대가 알아차릴세라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효과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연령, 성별등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만 치료제의 효과는 10일 안팎. 대략 이 주 정도입니다.”
시그넬린의 말에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이 주간이라고요?”
“그게 무슨 치료제야!”
이곳저곳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그런 그들을 시그넬린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자신에게 정보를 전해 준 당사자 라세탄조차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 참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던 차에 그녀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그넬린의 입술이 달싹이며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베흘란….“
회의 시작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베흘란이 어느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베흘란 톨베르트, 그는 아틀란티스를 떠나온 이래 두문불출한 채 더 이상 정부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간 여러 일 들이 많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는 전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은 채 시그넬린과 아메리가의 독선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뇌가 녹는 병? 시그넬린, 그래서 나를 부른 것인가….’
그렇게 느닷없이 나타나 상황을 지켜보던 베흘란은 그제야 시그넬린이 자신을 호출한 이유를 깨달았다.
외계 침략자들의 추적을 뿌리치자마자 맞닥뜨린 새로운 위협, 이렇게 자신들의 생존에 치명적인 전무후무한 질병에 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쪽의 의미가 그런 것이었군. 후우.“
그때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자베르 아이데그가 바람이 빠지는듯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시그넬린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라세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야 모두, 들을 준비가 된 것 같군요. 박사.“
잔뜩 숨을 죽이며 사태를 지켜보던 라세탄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단상에 올랐다.
”휴우, 그럼 현 사태를 모두 인지하셨으리라 보고 부연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라세탄은 어느새 촉촉이 이마를 적신 땀을 손등으로 훑어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치료제는 더 이상의 성능개선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뇌는 아직 우리 아틀란티스의 수준에서는 풀기 힘든 영역입니다. 게다가 이곳의 시설로는 지금의 연구성과 이상의 결과를 얻기 힘든 상황입니다.“
”에녹스3에 새로운 주거지가 이미 건설되어 있지 않나? 거기라면 모든 시설들이 준비되어 있을 텐데?“
자베르의 말에 군데군데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나 라세탄은 이내 좌우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뇌의 영역은 아직 우리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참혹한 질병이 나타난 거고요. 말씀하신 새로운 주거지에 도착한다고 해서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박사가 예상하는 그 기간이라는 건 대체 어느 정도요?“
”하아….“
자베르의 집요한 질문에 라세탄은 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백 년? 천 년? 이런 답을 원하신다면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답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우리 문명 밖의 일입니다.“
”장난해? 행성 최고의 과학자라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고작 문명 수준 밖의 일이라고?“
자베르의 험담과 함께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절망적인 분위기는 이어진 라세탄의 말에 기름을 부은 듯 더욱 타올라 버렸다.
”문제는 병이 1차 접종한 10만 선발대의 대부분에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고작 몇 달 만에 말입니다. 이제 2차, 3차 접종한 나머지 290만 명도 위험합니다.“
사람들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이 병의 생존율이 현재까지 0에 수렴한다는 것을.
추세대로라면 머지않아 자신들의 차례가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시겠지만 이미 우리 모두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지금은 보균자일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균자에서 발병자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대책이 뭐냐고?“
라세탄이 피곤한 듯 손으로 두 눈을 감쌌다.
잠시 후, 온기를 접한 눈이 편안해지자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상황실 이곳저곳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수백의 눈길을 더는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시간을 벌어야죠. 완벽한 치료제가 나오기까지 말입니다. 몇천 년, 아니 몇만 년이 되던.“
”몇 만 년? 당신 미쳤어?“
자베르가 몇 만 년이라는 말에 마치 잡아먹을 듯이 항의를 하자 라세탄이 뱉어내다시피 다음 말을 이었다.
”복제인간. 복제인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복제인간? 오. 그래. 그게 있었지!“
마치 이제야 원하던 답을 얻었다는 듯 자베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바로 그거야. 그럼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하지만 복제인간도 완벽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좋은 복제품이란 원본도 좋아야 가능한 것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원본, 즉 우리는 이미 오염됐습니다.“
”야, 라세탄, 너 정말!“
잠시 안심했던 마리드가 어이없다는 듯 주먹을 치켜들며 라세탄을 위협했다.
그때였다. 금방이라도 박사의 안면에 주먹을 꽃아 넣을 듯하던 그의 행동이 멈췄다.
”니. 니들 뭐야!“
어느새 경비병들의 총구가 사방에서 드리워진 것이다.
”지금은 비상시국, 다음이라는 건 없습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자중하세요 자베르님.“
시그넬린의 무미건조한 말은 자베르에게는 어떤 협박보다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그는 입술을 씰룩이며 자리에 앉았다.
”계속하세요. 박사.“
잠시 머뭇거렸던 라세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복제인간의 뇌 크기, 즉 신체를 지금보다 작게 설계한다면 발병도 늦어지고 훨씬 적은 치료제로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한시적이지만 어쨌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때였다.
”두 번째 달에 그렇게 많은 복제인간을 생성할 시설이 있나?“
잠자코 있던 베흘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