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까지 늘어진 치렁치렁한 금발을 찰랑이며 라세탄이 결박된 외계인의 옆에 섰다.
겉모습만 본다면 전혀 과학자처럼 보이지 않는 아틀란티스 생물학의 정점에 있는 이 젊은 여성은 좌중을 향해 간단한 목례를 한 후에 단상에 섰다.
“존경하는 의장님께서 언급하셨다시피 이 외계 생명체는 1함대의 희생으로 얻어진 귀중한 실험체입니다.”
이어진 라세탄의 설명에 의하면 결박된 외계인은 그들의 모함에서 출격해 1함대와 2행성을 공격하던 수백 대의 전투기 중의 하나에 탑승했던 조종사였다.
“저 외계 생명체는 공간 도약 장치를 파괴하기 전, 아군의 핵 공격에 방어막이 벗겨진 적 함재기 8대를 나포해 아틀란티스로 보낸 포로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놈들의 모선은 핵에도 전혀 타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서두를 연 라세탄의 설명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이 미지의 생명체를 인계받은 후 저는 동료들과 함께 면밀히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 목적은,”
잠시 말을 끊은 라세탄은 자신의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시그넬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자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시그넬린의 고개가 끄덕이자 라세탄은 침대에 부착된 단추를 눌렀다.
그때, 단상 아래의 누군가가 라세탄에게 그녀가 방금 하려던 말에 대해 반문했다.
“라세탄 박사, 방금 그 말, 연구 목적이란 게 뭡니까?”
그때 질문자는 주위가 웅성거리는 것을 느꼈다.
결박되어 있던 외계인의 신체가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를 구속하던 의료용 침대가 일으켜지고 있었다.
그렇게 외계인의 몸이 바닥과 일직선이 되자 라세탄이 의료용 피스톨을 외계인의 가슴 부분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르륵….
정체 모를 약물이 외계인의 몸에 주입되자마자 놈의 목에서 나는 것이 분명한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늘어져 있던 그의 몸이 꿈틀대며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탄성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군인들 중에서도 사령관을 비롯한 일부 고위 장성들만 알고 있었던 외계 생명체,
더군다나 살아있는 그것의 모습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잠시 잊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저것 봐! 팔, 팔이 움직였어!”
누군가의 말처럼 팔이 꿈틀대는가 싶더니 곧이어 외계인의 눈꺼풀이 하나씩 벗겨졌다.
이윽고 상황실의 모든 이목이 외계인에게 집중되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차례대로 네 개의 눈을 모두 뜬 외계인의 가슴이, 정확히는 가슴으로 추정되는 상반신이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불안정하군.’
베흘란은 외계인의 불안정한 호흡 패턴을 확인하고 그가 지금 굉장히 불안에 떨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럴 수가, 정말 살아 있어!”
“거기 좀 앉아 봐요. 안 보이잖아!”
이런 어수선한 주위 분위기와는 달리 베흘란의 날카로운 시선이 외계인의 신체 구석구석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키는 작은데, 흠… 골격이 꽤 단단해 보여.’
아틀란티스인의 반 정도 되는 작은 키에 단단한 껍질로 뒤덮인 외계인의 골격은 상당히 견고해 보였다.
특히 무릎과 팔꿈치 등 각 관절로 이어진 부분은 그 크기가 상당했다.
‘아무래도, 저들이 사는 행성은 중력이 아틀란티스보다 훨씬 높은 곳이겠군.’
작달막한 키,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없을 만큼 견고해 보이는 외계인의 관절은 모성의 엄청난 중력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는 걸 베흘란은 파악했다.
그때였다.
그르르륵,
주위의 시선에 반항이라도 하듯 마치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발가벗겨진 채로 구속된 외계 생명체는 네 개의 회색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조금씩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그를 구속한 의료용 침대가 들썩였다.
투입한 약물의 효과인지 외계 생명체의 몸부림은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둔탁한 금속음뿐.
족쇄에 묶인 신체와는 달리 전혀 구속되지 않은 외계인의 입은 굳게 닫힌 채 신음조차 흘려보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를 벗어나려는 듯 의미 없는 발버둥만 치고 있을 뿐이었다.
“박사.”
외계인의 소리 없는 발악을 지켜보던 시그넬린이 아틀란티스 생명공학의 1인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 더 기다려야 하나요?”
신임 의장의 말에 시간을 확인한 라세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끝낸 라세탄이 구속용 침대에 부착된 버튼을 눌렀다.
그때였다.
“무슨 짓인가 라세탄!”
깜짝 놀란 베흘란이 벌떡 일어나 단상을 향해 달려 나갔다.
척, 척, 척.
버튼을 누르자마자 외계인을 구속했던 장치가 모두 떨어져 나간 채 단단하고 작은 생명체가 바닥에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세탄이 작동시킨 버튼이 외계인의 구속을 전부 해제시켜 버린 것이다.
그그그극.
목을 긁는 듯한 외계인 특유의 소리가 단상 주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잔뜩 몸을 웅크린 그는 마치 우리에서 풀려난 맹수처럼 주위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외계인이 풀려났다!”
“이 봐 경비, 빨리 막아!”
저런 괴물을 풀어준 라세탄을 원망할 새도 없이 사람들은 일순간 큰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외계 생명체의 뼈마디 하나하나가 곧게 펴지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불안에 떨고 있던 미지의 생명체는 이제 여기에 없었다.
그그그극!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절대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듯 웅크렸던 그의 관절이 팽팽해지며 막 앞으로 도약하려던 순간이었다.
꾸어억!
놈의 입에서 비명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상황실에 모습을 드러낸 후,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외계 생명체는 연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앞을 막아선 경비들에 의해 단상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던 베흘란은 멍하니 현 상황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앞의 사람들을 향해 뛰쳐 나가려던 외계인의 동작이 일순간 정지되어버린 순간,
털썩,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외계인이 마치 고목이 쓰러지듯 무릎이 꺾이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조종하던 끈이 끊겨 버린 꼭두각시 인형, 마리오네트와 흡사해 보였다.
끄어어억!
곧이어,
살아 있는 생명체의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포효가 외계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세상에!“
불과 일 분 전까지만 해도 상황실을 벗어나려 애쓰던 사람들은 일순간 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단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방금 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덮쳐 갈가리 찢어 놓을 듯 흉흉하던 괴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신체에서 관절이라 불리는 모든 결합체들이 전부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베흘란의 날카로운 시선이 라세탄에게 향했다.
‘라세탄, 자네가 말하려던 연구 목적이 바로 저것인가?’
라세탄은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단상에 올랐다.
”연구 목적은,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이것입니다.“
라세탄은 가끔 꺽꺽대는 신음만 내고 있는 외계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1함대가 넘겨준 저 들의 사체 네 구와 살아있는 생명체 넷을 이용해 생체 병기를 만들었습니다.“
라세탄의 손짓에 스크린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장면들이 투사되었다.
그간 그녀의 주도하에 행해졌던 생체 실험의 결과물들이었다.
”제가 첨언 할 필요도 없이 외계인의 문명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단기간에 저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비대칭 무기, 즉 생채 무기가 유일했습니다.“
라세탄이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그녀답지 않게 구구절절 말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흠. 하긴. 핵도 통하지 않는 놈들에게 생체 무기만 한 것도 없었겠지. 하지만….’
베흘란은 각종 실험들에 의해 관절이 무너져 나가고 해부되어 전시된 외계인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생체 병기를 만드는데도 꽤 시간이 걸립니다. 저들에게만 특화된 바이러스나 병균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최소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래서 저는 다른 곳에 시선을 돌렸습니다.“
라세탄의 손에서 투사된 레이저 포인트가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외계인의 무너진 관절을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저들의 관절은 매우 튼튼합니다. 높은 중력에 적응한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웬만한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합니다.“
라세탄의 말을 뒷받침 하듯 화면에는 무거운 금속 해머의 충격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외계인의 생체 실험이 송출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신경계나 호흡기에 침투하는 바이러스보다는 이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물론 훨씬 덜 치명적이고 시간도 많이 걸리겠지만 저들을 무력화시키는 데는 충분합니다.“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였다. 라세탄의 의도를 이해한 것이다.
시간이 부족한 아틀란티스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관절을 무너뜨리는 바이러스는 공기 및 단순 접촉만으로도 감염됩니다. 적들이 아틀란티스에 상륙한다면 20척의 함대는 단 하루 만에 모두 감염될 것입니다.“
흡족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주목하고 있는 시그넬린을 바라보며 베흘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돋았다.
‘시그넬린. 당신 표정을 보니… 흠, 이미 아틀란티스의 대기에 저 바이러스가 가득하겠군.’
그때 자베르 아이데그가 의아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 치며 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문제가 될 게 없는 것 아닌가? 놈들이 아틀란티스에 발을 디디는 순간 전멸하는 건 시간 문제가 아니오 박사?“
순간 주위가 웅성거렸다.
자베르의 말은 합당했다. 물론 적들이 상륙한다면 큰 피해는 있겠지만 대신 외계인들은 관절이 무너지는 처참한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갈 것이 분명했다.
이 말인즉슨 고향을 버리고 머나먼 에녹스계로 피난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베르가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구태여 아이데그의 두 번째 달을 개조해 아틀란티스를 떠날 필요가 없잖소.“
역시 가문의 재산인 위성을 내어놓는다는 게 영 내키지 않은 듯 자베르는 열변을 토해냈다.
”그건 곤란합니다. 자베르님.“
그때 시그넬린이 그의 말을 막았다.
”자베르님이 말한 것은 올바른 선택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정대로 아틀란티스를 떠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그넬린의 서늘한 시선이 자신과 마주치자 자베르는 슬쩍 눈길을 옆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20척의 적들을 전멸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세탄 박사.“
시그넬린이 다시 단상 뒤로 물러서자 라세탄이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바이러스는 감염만 될 뿐 발병하지는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목표가 단지 아틀란티스를 침공한 적들의 전멸에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발병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목적은 적들의 전멸이다? 그게 무슨, 지금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라세탄?”
시그넬린의 서슬에 기가 꺾였던 자베르가 라세탄을 향해 다시 날을 세웠다.
“음, 아닙니다. 제가 감히.”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라세탄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말 그대로 감염일뿐입니다. 바이러스 잠복기간은 최대 일 년, 아틀란티스 침공이 마무리되어 모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성에 발을 디디는 순간 바이러스는 발병됩니다.”
“흠, 그게 그런 말이었군.”
그제야 라세탄의 진의를 파악한 자베르가 멋쩍은 듯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그넬린이 두 팔을 위로 치켜들며 포효하듯 외쳤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두 번째 축제가 될 것입니다!”
우와와!!
그리고 터져 나오는 환호성.
그것은, 광기에 젖은 지도자에 동화된 집단 광기의 절정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흘란은 아래로 고개를 늘어뜨렸다.
‘어쩌면, 저건 우리의 모습일지도…’
뜨거운 여름, 바싹 달궈진 도로 위에 늘어져 버린 이름 모를 동물의 사체처럼 아예 바닥과 밀착해 버린 외계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베흘란의 눈빛이 착잡해졌다.
‘후우.’
문명의 충돌. 그리고 종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외계 생명체의 꺼져 가는 숨결을 느낀 베흘란은 결국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수고했어요 박사. 복제 인간과 뇌 개선 계획은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시그넬린의 말에 라세탄은 기다렸다는 듯 단상을 내려가 자리로 사라졌다.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홀가분해 보였다.
‘복제 인간? 뇌 개선 계획?’
외계인의 참혹한 모습에 잠시 감상 적이 되었던 베흘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