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단상에 올랐을 때와는 달리 시그넬린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았다.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노새처럼.
“이상 제가 왜, 에녹스3의 파충류들을 멸종시켰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됐으리라 봅니다.”
시그넬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수백 명의 인파를 훑고 지나가다 한 곳에 멈췄다.
베흘란은 그 따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내가 나선다고 해서 죽은 파충류들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니….’
이미 모든 게 끝났음을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베흘란에게 또 다른 걱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그넬린. 다음 계획은 뭔가? 설마 아틀란티스인 모두를 에녹스3에 이주시킬 작정인가?’
생각에 이에 미치자 베흘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불가능의 영역이다, 절대 불가능의….’
외계의 침공까지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100억이 넘는 인원을 다른 행성에 이주시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적, 물리적 모든 면에서 말이다.
“자, 혹시 이의 있으신 분은 지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마든지 소명해 드릴 테니까요.”
그러나 그 누구도 시그넬린이 소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나마 젊은 관료들이 품었던 의장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도 외계의 침공 앞에 조용히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때, 장교들의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에녹스3의 이주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세부 사항 말입니다.”
네시안이었다.
그는 베흘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자신의 어머니에게 송곳 같은 질문을 던졌다.
‘녀석, 이 자리가 어떤 곳인 줄 알고.’
하지만 베흘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사관 학교를 갓 졸업한 초급 장교에게 아무런 질책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시안이 누구의 아들인지, 아메리 가문이 아틀란티스에서 가지는 위상에 대해서 말이다.
“네시안, 네가 나설 자리는 아닌 것 같구나.”
감히 의장인 자신에게 당돌한 질문을 던진 햇병아리 장교의 얼굴을 확인한 시그넬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는 아메리가의 장자가 아닌, 아틀란티스 우주군 장교의 자격으로 묻고 있는 겁니다, 말씀해 주시죠. 의장님.”
네시안은 기세등등한 시그넬린의 위세에 조금도 휘둘리지 않고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존경하는 의장님 이하 사령관님, 그리고 의원님. 간과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틀란티스의 인구는 120억이 넘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실어 나를 함선은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아시다시피 1함대는 전멸했고 2함대는 고작 20척 내외입니다.”
살짝 달아올랐던 시그넬린의 얼굴이 원래의 냉담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여느 사람을 대하듯 무심히, 자신의 아들에게 말했다.
“계속 말해보세요.”
네시안이 아메리가의 일원이 아닌 우주군 장교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후우···.“
살짝 긴장되는 듯 네시안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현재 아틀란티스에서 가용 가능한 우주선은 2함대와 식민행성을 오가는 대형 수송선 정도입니다.”
상황실은 다시 긴장감으로 팽배해졌다.
멀쩡한 행성 하나를 멸망시키자마자 외계의 침공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빠진 아틀란티스,
사람들은 피신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네시안이 일깨워준 것이었다.
“공간 게이트가 있지 않나. 에녹스계와 이어진 게이트 말이네.”
그때 늙수레한 행정부의 관료 하나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네시안에게 말했다.
“도약 장치는,”
네시안이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베흘란이 나섰다.
“그건 제가 설명드리죠. 공간 도약 장치는 24시간 기준으로 세 번만 작동할 수 있소. 무한정으로 사용 가능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베흘란을 향해 네시안이 가벼운 목례로 답하며 말했다.
“장관님 말씀대로입니다. 자칫 과부하가 걸릴 경우 도약 장치가 폭발하거나 이동 중인 함선이 공간과 공간 사이에 갇혀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질문을 했던 관료가 멋쩍은 듯 자리에 앉자 네시안이 다시 나섰다.
“공간 도약으로 이동한다는 가정하에 계산했습니다. 우선 2함대 소속의 20척입니다. 한 번에 탑승 가능한 수는 6천 명으로 함선당 대략 300명 남짓, 물론 승무원을 포함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수송선의 화물칸을 개조했을 때 탑승 가능한 수는 대략 천 명, 외계의 습격으로 피격된 것을 제외하고 남은 수송선은 2대 2천 명입니다. 따라서 공간 도약 1회에 이동 가능한 수는 총 8천 명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네시안의 설명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짧은 시간에, 대단하군.”
“저 친구가 수석이잖아. 동기들 중에서도 발군이라던데.”
그렇게 시그넬린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공간 도약 1회에 8천 명씩, 일 3번 가능하다는 가정하에, 하루에 이동 가능한 수는 2만 4천 명입니다. 적의 침공까지…”
잠시 말을 멈춘 네시안의 표정이 복잡미묘하게 변해 갔다.
그리고 시그넬린을 바라보며 겨우 입술을 떼 내었다.
“기껏해야 600만 명 정도만 피신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까 의장님?”
아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시그넬린의 얼굴에 번지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졌다.
“근사치입니다만, 흠… 말씀해 드리죠. 원래는 이 자리가 아니라 각 지휘부를 통해 알릴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네시안에게 고정됐다.
“공간 도약 장치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네??”
공간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말에 네시안의 동공이 확장됐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그녀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수송선이 에녹스계에 도착하는 즉시 공간 게이트는… 파괴될 것입니다.”
시그넬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크린에 거대한 수송선 두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녹스3의 지하 동공에 새로운 거주지를 건설할 각종 장비들을 실은 수송선들이었다.
그렇게 수송선들은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커먼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수송선이 에녹스계에 도착했습니다.”
수송선이 공간 도약을 무사히 마쳤다는 상황 장교의 보고를 받은 시그넬린이 말했다.
“실행하세요.”
그때였다.
콰카카캉!!
고막이 떨어져 나갈듯한 굉음과 함께 스크린이 온통 밝은 빛으로 도배 되었다.
공간 도약 게이트가 파괴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상황에 경악했다.
“…!!”
거대한 게이트가 있던 공간에는 파괴된 잔해만 어지러이 떠돌 뿐,
대부분은 먼 우주로, 일부는 대기권을 뚫고 아틀란티스를 향해 불타올랐다.
‘후우, 무슨 생각이지. 당신.’
베흘란은 답답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유성비라고 좋아할 지상의 사람들이 떠올랐으며, 한편으로는 게이트가 사라진 이상 더는 희망이 없다는 또 다른 생각이 그를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은 공간 도약 장치가 파괴된 현 상황에서 어떻게 에녹스계로 이동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시그넬린은 마치 너희들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말씀드리죠. 우리는 공간 게이트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적의 과학 기술이 아틀란티스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인정하시죠? 몇 번은 모르겠지만 장치를 통해 수십, 아니 수백 번을 넘나든다면 그들은 머지않아 우리의 흔적을 찾아낼 겁니다. 그런 이유로 게이트를 파괴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건지….’
이런 암울한 생각이 그들의 뇌리에 스며들 무렵 시그넬린은 자베르 아이데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베르님.”
“네?”
뜬금없이 자신이 지목되자 자베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데그 가문이 내놓아야 할 게 있습니다. 아틀란티스를 위해서 말이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베르의 작은 눈이 연신 끔벅거렸다.
“바로 아이데그가의 위성입니다. 아틀란티스의 두 번째 달.”
아이데그가문의 문양이자 아틀란티스의 상징이기도 한 작은 위성,
시그넬린은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장, 위성은 아이데그의 정신이자 상징이요. 그걸 어떻게…”
그러나 곧, 자베르는 입을 닫고 말았다.
에녹스3의 괴멸과 외계의 침공.
이 모든 것은 베흘란의 톨베르트 가문을 제외한 세 가문이 사전에 교감을 가진 일이었다.
어차피 아틀란티스가 멸망하면 그따위 위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생각이 이에 닿자 자베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인 동의를 한 것이다.
“그럼 찬성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시그넬린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이데그가의 위성에는 여러 기반 시설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오호, 역시 시그넬린이야. 그럴 생각이었구먼. 어이 자베르, 좋게 생각하게나.”
바이단이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을 마지않았다.
아이데그가의 위성.
그곳은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광물 채굴을 위해 꽤 많은 인력들이 상주했었다.
게다가 과거 대 암흑기에는 아이데그가의 군사기지로 활용되어 많은 제반 시설이 건설되었고 조금만 수리 한다면 지금도 여전히 사용 가능했다.
“위성의 시설을 복구하면 적어도 300만 명 정도는 거주할 수 있습니다, 아니, 거주라기보다 승선이라는 말이 어울리겠군요.”
베흘란은 그제야 시그넬린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그넬린… 당신답군. 위성으로 이동할 생각이었어. 에녹스3까지.'
우선 자체 추진력이 없는 위성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추진체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에녹스3에 추락시킨 소행성에 설치된 것의 몇십 배는 더 크고 몇십 배는 더 많은 수의 추진체를 위성 곳곳에 설치해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총동원령을 내려 인력과 돈, 자원을 갈아 넣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시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그넬린은 그런 자신의 아들을 향해 더없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300만 명. 이것이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네시안은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관.”
시그넬린이 옆의 장교를 호출하자 곧 메인 스크린의 화면이 전환됐다.
그러자 수많은 글자가 화면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름이었다.
사람들의 이름.
“위성에 승선할 200만 명의 명단입니다. 기술자, 과학자, 군인 등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필수 인력들이죠. 그리고 나머지 100만 명은 각, 가문들에게 안배할 것입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입에서 옅은 숨이 흘러나왔다.
자신은 살 수 있다는 안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그렇게 스크린의 화면에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한참 동안, 선택받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도배 되었다.
‘음.’
잠시 후, 스크린을 주시하던 베흘란의 미간이 움츠러들었다.
200만의 이름으로 수 놓였던 화면이 꺼지고 상황실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망막세포가 빛에 적응하는 동안 시그넬린은 또 다른 지시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우리도 뭔가, 준비할 수 있다는 겁니다. 들여보내세요.”
그때 좌중이 어수선해졌다. 진원지는 출입구 쪽이었다.
출입구에서 하얀 방역복을 입은 일단의 군인들이 단상 쪽으로 무언가를 운반하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휘장에 가려진 채 이동 중이었다.
“여러분!”
시그넬린이 자신의 앞에 도착한 휘장의 끝을 잡으며 말했다.
“자, 이것이 1함대가 전멸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시그넬린이 검은 휘장을 힘차게 걷어냈다.
그러자 휘장이 바닥에 떨어지며 기묘한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료용 침대에 결박된 채 누워 있는 괴생명체.
사람들은 기괴하게 생긴 의문의 생명체를 두려운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헉!! 뭡니까 저게!”
누군가 큰 소리로 묻자 시그넬린이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외계인입니다. 1함대를 괴멸시킨 존재들이죠.”
딱딱한 투구로 둘러싸인 듯한 피부, 굵은 두 다리와 그에 비해 가녀린 팔,
네 개의 눈과 큼직한 머리를 가진 외계인은 아틀란티스인의 반 정도 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충격적인 외계생명체의 등장에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오시죠. 박사.”
그때 시그넬리의 호명과 함께 인파를 뚫고 단상으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생물학의 일인자 라세탄 바라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