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단이 단상에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시그넬린이 나섰다.
아직도 영문을 모른 채 어안이 벙벙해하는 인파를 뚫고 주인 없는 단상을 차지한 그녀는 낮은 어조이나 딱 부러지는 말투로 좌중을 압도했다.
“신임 의장 시그넬린 아메리입니다. 존경하는 바이단님의 설명을 들으셨다시피 급박한 현 상황을 감안하여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어수선하던 상황실은 카리스마 넘치는 시그넬린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곧이어 그녀는 어느새 옆을 지키고 있던 우주군 상황실 책임자에게 물었다.
“준비됐나요?”
“네, 의장님. 화면 송출 대기 중입니다.”
“시작하세요.”
시그넬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메인 스크린의 화면이 새카맣게 전환되었다.
“저기가 어디지?”
“우주 같은데.”
마치 시커먼 대형 천 조각을 벽에 걸어 놓은 듯한 스크린의 화면에 주위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베흘란은 저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곳은 우주가 시작되는 지점, 정확히는 아틀란티스 대기권의 끝자락인 외기권에 인접한 곳이었다.
“와!”
스크린의 화면이 푸른빛이 감도는 아틀란티스를 슬쩍 비추자 일부 참석자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압도적인 신비로움이랄까.
그렇게 잠시 인공위성 카메라에 노출됐던 아틀란티스가 사라지고 화면은 다시 검은 우주로 전환되었다.
그때 서서히 이동하던 화면이 갑자기 환한 빛을 뿜어내었다.
“저건?”
눈부실 만큼 강한 빛의 원인은 태양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는 거대한 인공 구조물, 바로 공간 도약 게이트 때문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베흘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 때문이었나. 하지만….”
베흘란은 두 개의 달 사이에서 빛나던 정체불명의 물체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이 반사하던 빛의 면적을 계산해본 베흘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늘에서 빛나던 것이 저 게이트가 맞는다면 적어도 지금 크기의 두 배 이상은 더 커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때 회의에 참석한 장관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시그넬린을 향해 마치 항의 하듯이 소리쳤다.
“의장님! 대체 우리가 처한 위기는 뭐고 저 공간 게이트는 또 뭡니까?”
하긴 너무 뜬금이 없긴 했다.
아틀란티스의 대위기를 언급하며 갑자기 의장직에서 사퇴한 전 의장 바이든이나 의장직을 승계하자마자 일언반구도 없이 외기권에 설치된 공간 도약 게이트를 보여주고 있는 신임 의장 시그넬린이나 이해되지 않기는 비단 저 고위 관료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거대한 구조물인 공간 게이트가 아틀란티스의 대기와 인접한 곳에서 설치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체 추진력이 없는 게이트가 자칫 대기권으로 진입해 추락이라도 한다면 지금 아틀란티스가 당면한 위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못지않은 대재앙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 식민지 행성 두 곳을 연결하는 두 개의 공간 게이트는 외기권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장관님,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준비한 대로 진행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지켜보시죠.”
대가문의 수장답게 시그넬린은 장관의 돌발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받아넘겼다.
그러자 잔뜩 목소리를 높이며 기세 좋게 발언했던 고위 관료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시그넬린의 기세에 눌린 듯 장관의 눈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몬티아, 아이데그의 두 대표마저 자신을 힐끔거리자 그는 주뼛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베흘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이 나서기에는 명분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한 그때였다.
‘헉, 저건!!’
깜짝 놀란 베흘란의 동공이 커졌다.
저 멀리 공간 게이트를 향해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진입하고 있었다.
몇 초 후, 베흘란은 그것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행성이었다.
‘바로 저것이었군!’
블라이나도 알아내지 못했던, 두 개의 달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던 물체의 정체는 바로 저 소행성이었다.
소행성은 미끄러지듯 움직이다 게이트 앞에 이르자 서서히 멈춰 섰다.
‘어떻게, 소행성이 스스로 움직이고 멈출 수 있는 거지?’
베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길쭉한 소행성의 꼬리 부분에 부착된 거대한 추진체를 발견한 것이었다.
“진입하세요.”
시그넬린의 말에 소행성의 꼬리에 달린 추진체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소행성은 다시 게이트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엔진 출력 10, 게이트 개방!”
마치 운동경기를 중계하듯 상황실에 설치된 스피커로 소행성의 이동이 실시간으로 보고되고 있었다.
‘대체. 저걸로 뭘 하려는 거야 시그넬린.’
베흘란은 주위를 훑어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베흘란이 개입해주기를 바라는 듯 보였으나 그는 아무 말 없이 스크린만 응시했다.
“게이트 진입 시작, 출력을 5로 낮추겠습니다.”
소행성의 머리가 천천히 게이트 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둥근 구체의 게이트 안쪽이 빠르게 회전하며 소행성의 머리부터 서서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폭이 게이트와 거의 일치할 정도로 거대한 소행성은 몸체는 그보다 몇 배는 더 길었다.
그렇게 길이가 1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길쭉한 소행성이 게이트를 서서히 통과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큰 뱀을 삼키고 있는 거인의 입처럼 보였다.
“통과 완료!”
절제된 장교의 멘트와 함께 소행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곧 게이트가 회전을 멈추고 화면은 정적에 싸였다.
“소행성 위치는?”
“막 에녹스계에 도착했습니다. 화면에 연결하겠습니다.”
시그넬린의 질문에 벽 가득히 메운 스크린의 화면이 잠시 꺼졌다가 다시 연결됐다.
화면에는 방금 아틀란티스의 게이트를 통과한 소행성이 에녹스3 외기권에 설치된 또 다른 게이트를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에녹스3의 게이트.
베흘란의 제안으로 수십만 개의 블록으로 재조립된 공간 도약 게이트에서 애벌레처럼 길쭉한 소행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수십 초면 충분했다.
곧이어 스피커에서 상황실 장교의 상기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주 엔진 소등. 목표는 에녹스3. 방향 수정 시작.”
게이트를 빠져나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소행성의 전신에서 옅은 화염이 분사되었다.
너무 작아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수십 개의 작은 추진체가 설치된 게 분명했다.
소행성은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수한 추진체들에 의해 조금씩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설마!!!’
순간 베흘란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그넬린을 향해 소리쳤다.
“시그넬린! 당장 멈추시오!”
추진체가 달린 거대한 소행성이 에녹스3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소행성을 에녹스3에 추락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이것은 대재앙의 전조였다.
“에녹스3의 생명체를 몰살시킬 셈인가? 당신,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베흘란의 돌발행위로 장내는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흥분 가라앉히시죠. 모두 죽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저 땅의 주인이 바뀌는 것일 뿐. 그리고 베흘란."
순간, 시그넬린이 자신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베흘란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입조심 하시죠. 여기는 신성한 의회입니다. 나는 의회의 수장이고.”
“닥쳐!!”
흥분한 베흘란이 단상을 향해 뛰쳐 나가려 할 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무장 군인들이 순식간에 베흘란을 에워쌌다.
무리 중의 하나가 베흘란을 위협하며 말했다.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장관님.”
자신을 향해 드리워진 총구에 흠칫 놀란 베흘란이 시그넬린을 향해 매서운 눈길을 쏘아붙였다.
“나, 베흘란은 아틀란티스의 과학부 장관이기 전에 톨베르트가의 수장이다. 이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에녹스3이 처음 발견됐을 당시 그곳은 이미 파충류들의 세상이었다.
무게가 수십 톤이 넘는 거대한 파충류들이 육지와 바다, 그리고 하늘을 지배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들은 단세포의 원시 생명체가 아닌 이미 진화에 돌입한 고등생명체였다.
따라서 이들과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틀란티스인들이 에녹스3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파충류들은 멸절되어야만 했다.
이에 당시 아틀란티스의 여론은 파충류들을 청소하고 에녹스3을 제2의 아틀란티스로 만들자는 강경파와 대학살은 절대 안 된다는 온건파로 나누어져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렇게 에녹스3의 파충류들은 그들 의사와는 무관하게 아틀란티스를 대혼란에 빠뜨렸다.
그렇게 출구 없는 혼란이 지속될 무렵 에녹스3의 극지방에서 논쟁에 종지부를 지을 무언가가 발견됐다.
그것은 바로 지표에서 약 200킬로미터 아래에 있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그 크기는 약 1억 명이 살고 있는 수도 아틀란티아에 비견될 정도로 광활했다.
거대한 강과 우뚝 솟은 산맥. 풍부한 산소 등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했다.
빛, 즉 인공 태양만 설치한다면 충분히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지하 동공의 발견은 온건파뿐 아니라 모든 아틀란티스인들을 흥분시켰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나름의 피난처 정도는 되는 거대한 지하 세계.
이로써 지상의 파충류들은 파충류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충분히 공존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여론은 급속도로 온건파로 기울기 시작했다.
게다가 파괴와 학살이 과거 대 암흑기를 도래하는 도화선이 될지도 모른다는 연합정부의 우려로 에녹스3의 파충류들은 종말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학살극을 벌여? 이유가 뭔데?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거냐고!”
“이제 시작이에요. 베흘란. 이유는 조금 후면 알게 될 겁니다.”
베흘란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몬티아와 아이데그의 두 대표들, 그리고 각 군의 수뇌부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저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시그넬린이 왜 이런 대 학살극을 벌이려고 하는지를.
“방향 전환 완료됐습니다. 충돌 예상 지점, 에녹스3 동남쪽 해수면!”
좌우, 앞뒤. 쉴새 없이 움직이던 소행성이 어느새 에녹스3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행성을 비추던 인공위성의 카메라가 잠시 방향을 돌려 에녹스3을 향했다.
점점 화면이 확대되는가 싶더니 언뜻 보면 아틀란티스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에녹스3의 전경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기울기 60도로 조정. 최대 충격 각도입니다.”
“진행하세요.”
시그넬린의 지시에 소행성의 주 엔진이 다시 불을 뿜었다.
“주 엔진 가동, 10, 15, 35, 55…,”
소행성의 엔진 출력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다.
“100, 최대 출력입니다!”
천천히 움직이던 소행성은 최대 출력에 이르자 에녹스3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소행성은 총알처럼 뛰쳐나갔다.
“외기권 진입!”
탄력이 붙은 소행성은 어느새 에녹스3의 외기를 뚫고 대기권에 진입했다.
“외부온도 상승, 5천도, 2만도!”
처음에는 샛노랗던 소행성은 대기권을 돌파하며 불길에 둘러싸이는가 싶더니 곧 거대한 화염 덩어리로 변했다. 그것은 3만도가 넘는 엄청난 고온이었다.
그리고 해수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충돌 10초 전, 9초, 8초,”
그때 다른 한 대의 카메라가 한가롭게 양치류를 뜯고 있던 한 무리의 파충류들을 비췄다. 목이 긴 이 녀석들은 신기하다는 듯 하늘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불덩어리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몇 초 후에 일어날 자신들의 운명도 모른 채.
“3, 2, 1 충돌!!”
번쩍하는가 싶더니 엄청난 섬광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