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시안이 내뱉은 의외의 말에 베흘란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정말이냐? 그게 완료됐다고?”
“네. 베흘란 프로젝트, 그러니까 에녹스3에 공간 게이트가 완성됐다고 분명히 들었어요. 게이트의 위치는 에녹스3의 외기권에서 가깝다고 했고요.”
네시안의 말에 방금까지도 피로에 젖어 있던 베흘란의 눈에는 이채마저 어렸다.
“그런데 정작 과학부의 수장인 내가 모르고 있었다?”
“어…, 저도 그게 의외였어요. 아저씨가 전혀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서. 이런 경우는 아틀란티스에 연합정부가 출범한 삼백 년 이래로 처음이죠.”
네시안이 베흘란의 표정을 살피며 쭈뼛거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 네시안!!”
생각보다 격앙된 베흘란의 반응에 네시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밀려들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잠시 상대의 표정을 살피던 네시안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넸으나 베흘란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그렇게 한참 동안 기계음만 가득하던 엘이베이터의 정적을 깨뜨린 건 베흘란이었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에녹스…”
에녹스라는 단어를 힘없이 내뱉은 베흘란은 칼리지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때를 떠올렸다.
대 암흑기 이후 정국이 안정되어가자 폭발적으로 늘어난 아틀란티스의 인구, 그리고 그에 비례해 빠르게 소진되어가는 자원들.
이를 타개하고자 백여 년 전에 기획된 프로젝트가 있었으니 바로 새로운 행성을 찾아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 후 아틀란티스 정부는 아틀란티스와 유사한 환경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항성계를 선별한 후 엄청난 경비를 소모해 수십 개의 무인 탐사선을 우주로 날려 보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정말 무모한 계획이기도 했다.
아틀란티스가 소속된 은하계에만 4천억 개가 넘는 행성들이 존재했고 우주에는 그런 은하계만 천억 개가 넘었다. 심지어 그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고 기껏해야 자원채집이 가능한 행성 몇 개를 찾아 식민지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막대한 자원이 투입된 우주탐사에 대한 회의론이 슬슬 무르익고 있던 무렵 아틀란티스에 엄청난 낭보가 전해졌다.
우주의 망망대해를 탐색하던 탐사선들 중 하나인 에녹스가 아틀란티스에서 8광년 떨어진 곳에서 항성계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빛을 내는 항성을 중심으로 주위를 공전하는 8개의 행성!
물론 우주를 방랑하던 탐사선들이 새로운 항성계를 발견한 것이 그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지표면의 70프로가 물로 덮여 있었으며 풍부한 산소, 그리고 바다와 육지에 가득한 생명체들. 태양에서 세 번째에 위치한 행성이 바로 그 낭보의 주인공이었다.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항성계를 탐사선의 이름을 따서 에녹스계라고 명명하고 항성, 즉 태양을 에녹스0, 이후 차례대로 에녹스1부터 8까지 순번을 붙였으니 생명의 행성, 즉 세 번째 행성을 에녹스3이라 불렀다.
이에 고무된 의회에서는 푸르른 생명의 빛을 발산하고 있는 에녹스3의 탐사 계획을 세웠다.
대규모 유인 탐사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하지만 탐사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커다란 벽에 봉착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광속으로 주행할 수 있는 우주선은 없었다.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한두 번이 아닌 지속적인 왕래가 모성과 이루어져야 한다.
기껏해야 우주선의 속도가 광속의 2프로였던 당시 기술로는 무려 8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에녹스3에 도착하기까지 최소 몇백 년은 걸릴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공간 도약 게이트.
우주선 자체적으로 공간을 도약할 수 있는 기술은 없었으나 게이트를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이미 가까운 자원채굴 행성에 공간 도약 게이트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으니 아틀란티스와 이어진 새로운 게이트를 에녹스3에 설치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타당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자체 추진력이 없는 게이트를 다른 태양계로 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아틀란티스의 우주선 중에서도 가장 크다는 자원채집 선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게이트를 견인선으로 에녹스3에 운반하는 데에는 수백 년이 아니라 천년, 아니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연합정부는 이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포화상태의 인구, 점화된 자원 부족 현상. 혼란은 더 큰 혼란을 부추기는 법.
과거의 대 암흑기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바심이 난 4대 가문은 빠른 결과를 원했다.
바로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 주인공은 바로 과학부의 신입이었던 베흘란 톨베르트였다.
이 엄청난 난제를 베흘란이 해결한 것이다.
이른바 초소형 우주선 프로젝트.
아틀란티스 과학부에서는 그것을 제안한 베흘란의 이름을 따 베흘란 계획이라고 명명했다.
‘베흘란 계획’은 어찌 보면 정말 간단한 이론이었다.
어른 주먹만 한 소규모의 우주선 수십만 척을 건조해 에녹스3의 상공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주먹 정도의 작은 크기라면 대략 광속의 50프로에 육박하는 속도를 낼 수 있었기에 16년 정도면 예상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탑재된 인공지능의 주도로 수십만 개의 우주선, 아니 블록들이 유기적으로 결합 되어 마침내 거대한 하나의 게이트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초대형 수송선이 거뜬히 통과하고도 남을 만큼의 크기로 말이다.
물론 조립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오류는 아틀란티스에서 전파를 쏘아 실시간으로 수정할 수 있었다.
“휴우. 내가 제안한 계획이 완성됐다는 공치사나 들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다만,”
그 결실이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정작 과학부의 수장인 베흘란은 그것을 지금에서야 알았다는 사실에 옅은 한숨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내게는 왜 비밀로 했을까?”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아무래도 어머니가 관련된 것 같은데…”
결국 말끝을 흐리고만 네시안이었다.
석연치 않은 현 상황은 베흘란과 네시안 모두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며 엘리베이터 안을 다시 침묵으로 감쌌다.
***
지하 100층 우주군 상황실.
벙커에 가까운 투박한 입구를 지나 상황실에 들어선 네시안은 겉보기와는 달리 압도적인 분위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천 명이 운집하고도 남을 광활한 공간이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네시안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우와!”
한쪽 벽을 장식한 거대한 메인 스크린과 아래에 설치된 크고 작은 수백 개의 보조화면.
그리고 아래에서 쉴새 없이 뭔가를 조작하고 있는 상황실 요원들.
장교들 외에도 민, 관에서 파견된 주요 인력들이 근무하고 있는 상황실에는 자신의 원소속을 나타내는 문양을 가슴에 새긴 수백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급히 설치된 게 분명한 수십 개의 좌석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착석해 있었다.
“정말이군. 군 수뇌부들까지 참석한다는 게. 그런데 저 여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가던 베흘란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생물학의 권위자인 라세탄 바라이드였다.
“라세탄!”
베흘란이 라세탄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장관님.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말끔한 제복 차림의 장교 하나가 베흘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저는 이만.”
“아, 그래. 나중에 보자꾸나.”
네시안과의 인사를 마친 베흘란의 시야에 그새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은 라세탄이 들어왔다.
베흘란은 어쩔 수 없이 라세탄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장교의 안내로 각 가문의 수장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어서 오세요. 베흘란.”
미리 착석해 있던 시그넬린이 마치 안드로이드 블라이나를 연상시키듯 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베흘란을 맞이했다.
“오랜만이군.”
네시안의 그것과 판박이인 갈색 눈동자, 그리고 이미 중년을 넘어선 그녀는 이마에 새겨진 주름을 감안하고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애써 시그넬린에게서 시선을 돌린 베흘란은 다른 두 가문의 수장들과도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흠, 왜 저러지.’
순간 베흘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원래 거북한 관계인 시그넬린이야 그렇다 해도 몬티아와 아이데그, 두 가문의 대표들의 태도가 영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방금 눈을 마주쳤을 때 애써 외면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베흘란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특히 지금 연합정부의 의장이자 몬티아가의 수장인 바이단의 태도가 눈에 띄게 어색했다.
‘늙은 여우 같은 자야. 느낌이 좋지 않은데.’
베흘란은 끝끝내 시선을 외면하며 심리적 거리를 두는 바이단을 주시했다.
바이단 몬티아.
베흘란의 아버지 세대였으니 적어도 나이가 백 살은 고사하고 이미 백 이십은 넘었을 터였다.
인공장기와 각종 약물로 연명하며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권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바이단. 초췌한 몰골이 흡사 걸어 다니는 시체를 연상하게 했다.
그런 바이단의 뒤에는 아버지의 과욕으로 가문의 만년 후계자로 전락한, 자신의 아버지 못지않게 백발이 성성한 바이단의 장자 마리드 몬티아가 인상을 찌푸린 채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자,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소.”
베흘란을 끝으로 참석 인원의 확인이 끝나자마자 현 정부의 의장인 바이단 몬티아가 단상에 올라 회의 시작을 알렸다.
“우선 급하게 회합을 요청했으나 빠짐없이 참석해 주신 존경하는 각 가문의 대표들, 그리고 군의 장성들과 장관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바이단은 각 가문의 수장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공식 석상에서 어울리지 않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음…. 이 자리에 서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이제 어쩔 수 없군요. 이런 사실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바이단은 목이 타는지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짧은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근래에 없던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이는 아틀란티스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흘러온 일만 년 역사 이래 가장 큰 위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틀란티스가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의장의 말에 단상 주위는 웅성거리는 소리로 휩싸였다.
어수선한 상황실을 이리저리 휘휘 둘러보던 바이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재해가 아닙니다. 아틀란티스의 존립, 나아가 120억 아틀란티스인 모두가 절멸할 수도 있는 위기에 직면했음을 여러분들에게 알립니다. 이에 고심 끝에, 이 사람의 힘으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에 도저히 역부족이라 여기고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나 바이단 몬티아는 이 시간부로 의장 자리를 반납하겠습니다.”
아틀란티스가 절멸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의장의 지위에서 하차하겠다는 바이단의 말에 주위는 마치 난전에 온 것처럼 술렁대기 시작했다.
‘저 늙은이가 의장직을 내려놓는다고?’
베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권력욕이라면 시그넬린도 두 팔 들고 고개를 저을 사람이 바로 바이단이었다.
반면 의장직을 내려놓겠다는 바이단의 말에 그의 아들 마리드 몬티아의 얼굴에는 화색이 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이어진 바이단의 말에 마리드의 표정은 굳어지다 못해 경악스럽게 변했다.
그리고 비단 경악스러운 것은 마리드 뿐만이 아니었다.
“신임 의장은…, 시그넬린 아메리입니다.”
아틀란티스의 법에는 현 의장이 사퇴할 때 남은 임기를 맡을 차기 의장을 직접 지명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이에 마리드는 차기 의장은 당연히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단은 불과 작년에 의장직에 올랐다. 아직 2년이나 남았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남은 임기는 자신이 물려받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마리드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했다.
‘말도 안 돼, 바이단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그넬린에게!!’
베흘란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곳, 대 청사에 도착했을 때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불안의 실체가 결국 현실화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