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무지막지한 놈이군.”
딱 반초, 그는 천마에게 겨우 반초 차이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서서히 무너지는 몸과 정신 속에서 그는 결국 살아남지는 못했다.
양패구상.
열 번의 환생의 굴레 중 아홉 번째, 무림의 세계에서 삶을 끝내고 이제 마지막 환생의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육신이 잠든다.
이계부터 시작해 무림의 중원까지.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난 아홉 번의 삶들.
암전이 찾아오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익숙한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섯 번째쯤의 삶이었나? 갓난아기로 태어나 세 살 만에 단명한 기억이 떠올랐다. 심장병 탓에 겨우 3년을 살았던 그곳, 지구. 그것도 대한민국이었다.
우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와 거의 흡사한 환경.
“다시 지구인가?"
주변의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넓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가구, 전자기기들. 한눈에 봐도 귀티가 흐르는 방이었다.
딱봐도 재벌가의 삶이라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우현이 방을 가만히 둘러보고 있던 그때 순간, 밀려드는 기억의 조각들.
한 자락, 한 자락씩 떠오르더니 점차 명확한 형태를 갖춰갔다. 정보의 내용들을 이랬다. 칠성그룹, 국내 재계 순위 1위. 사생아. 멸시. 무시. 무관심.
모친은 자신을 낳다가 사망.
“으윽!”
순간, 두통이 감각 기관을 타고 온몸을 옥죄듯이 엄습했다.
우현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정보들.
아니, 이제는 그저 정보가 아닌, 기억이었다.
열 번째 환생.
그러나 이번엔 환생이 아닌, 빙의라고 해야 정확했다.
몸 주인의 삶은 처참했다.
3남 1녀 중 막내. 유약한 성격. 삶을 방관하는 태도. 그리고 자살 시도.
우현은 지난 아홉 번의 삶 속에서 하루살이와 물고기로도 살아봤다. 그러나 단 하루를 살아야 하는 하루살이로 존재할 때조차, 그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았다.
독수리에게 "좆밥" 소리를 들어도 꿋꿋했다.
첫 번째 삶이었던 이계의 소드마스터, 그리고 바로 직전의 삶이었던 무림맹주를 제외하면, 그는 대부분 약자의 삶을 살아왔다.
이전의 아홉 번은 창조된 삶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지금은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몸 주인은 타락한 삶을 살며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진 상태였다. 긴 투병 끝에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그가 빙의했다.
행복한 삶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어서 밀려오는 또 다른 기억들.
‘헌터라?’
세계 랭킹 상위 10인의 정확한 정보. 국내 주요 기관과 단체. 마물에 대한 정보들까지.
우현의 머릿속으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몸은 F급이었군.’
끝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년 F등급. 가문의 지원은 전무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주변에 남아있는 세명이 전부였다.
“도, 도련님!”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자가 들어왔다.
“아이고,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흑흑.”
후다다닥,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
두 명의 남자아이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헉! 지, 진짜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어!”
얼마나 놀랐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도련님. 허허헝.”
두 번째 아이는 아예 울음을 터뜨렸다.
우현의 기억을 정리해 보니 자신에게 남아 있는 건 유모 한 명과 두 명의 사내아이뿐이었다.
그래도 완전한 고독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놈, 성격은 왜 이렇게 음울한 거야?
본래 몸 주인의 성격을 깨닫자, 그는 가장 먼저 그것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은 김우현이었다.
우현은 전생의 소드마스터, 돌돔, 하루살이, 호랑이, 개구리, 갓난아기, 소공녀, 하녀, 무림맹주 등 다양한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성격을 겪어왔다.
그 모든 경험이 지금의 자신 안에 남아 있었다.
‘어떤 설정으로 살아야 하지?’
죽었다 깨어났으니, 이번 생은 기존의 성격과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아니, 살아주고 싶었다.
‘그냥 모든 걸 적절히 섞자.’
우현은 다소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누가 죽기라도 했어? 왜들 그렇게 호들갑이야. 날 봐. 살아있잖아.”
“흑흑흑. 도련님, 한 달 만에 깨어나셨어요. 의사도 가망 없다고 했는걸요!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 계세요? 정말 괜찮으신 거죠, 도련님?”
유모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우현은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다.
‘아, 이들에겐 죽음이란 거대한 재해 같은 거구나.’
그는 이제 막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했다.
호리호리하지만 선한 눈빛을 가진 마윤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토닥이며 목소리 톤을 조금 높였다.
“이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안심해. 억울해서 못 죽겠더라고.”
우현은 대충 핑계를 대며 상황을 넘겼다.
다시는 자살 시도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그 또한 김우현이라는 존재가 이대로 삶을 비루하게 끝내는 걸 원치 않았다.
세 사람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랐다.
생전 처음 듣는 그의 밝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마윤이 훌쩍거리며 말을 받았다.
“맞아요! 이대로 삶을 끝내시기에는 너무 억울하잖아요, 도련님···”
그 말을 탁수가 다시 받았다.
“저희가 도울게요!”
“저희만 믿으세요.”
유모, 마윤, 탁수.
세 사람 모두 같은 마음을 보였다.
우현은 오늘 처음 보는 그들이었지만, 기억과는 별개로 왠지 그들에게 정이 가는 걸 느꼈다.
유모는 갓난아이 때부터 자신을 키워왔고, 두 사람 역시 열 살 때부터 자신을 섬기며 살아왔다.
원래 몸 주인 김우현에게 이들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우현은 일단 눈으로 이 세상의 시작인 집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유모와 두 녀석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부탁했다.
“유모, 나 배고픈데 식사 좀 준비해 줄래?”
“아이고 참! 제 정신 좀 봐요. 당연히 시장하시겠죠. 제가 얼른 죽 준비해서 드릴게요. 한 달 동안 수액으로만 영양분을 공급받으셔서 일반식은 갑자기 드시면 안 돼요. 죽으로 드세요. 괜찮으시죠?”
“응. 고마워, 유모. 그렇게 해줘.”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도련님.”
“천천히 해. 아직 견딜만 하니까. 그럼 나는 잠깐 산책 좀 다녀올게.”
“네 그러세요. 윤아, 수야, 도련님 잘 모시고 다녀오렴.”
“네. 저희만 믿으세요. 자, 도련님 나가시죠.”
“그래, 부탁한다.”
몸이 너무 약해져 있었기에 부축이 필요했다.
우현은 방을 나와 집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집은 서초동에 위치해 있었고, 독립된 부지 안에 다세대 단독 주택처럼 여러 건물들이 넓게 포진해 있었다.
쉽게 말해 풀빌라 형식이었는데, 우현이 거주하는 D급 섹터가 가장 작았으며, 위로 급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크고 화려해졌다.
S급 섹터에는 가주가 거주했고, A급 섹터는 직계 가족들이 차지했다. B급은 친인척, C급은 하우스 키퍼 및 직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D급은 사생아들이 거주하는 구역이었고, 우현은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건물에 방치되어 있었다.
직원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곳, 그것이 바로 사생아들의 구역이었다.
“참나, 어이가 없네.”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그래도 같은 피가 섞인 친자가 아닌가?
그럼에도 이런 취급을 당한다는 건, 이곳의 사람들은 이해득실을 철저하게 따지는 성향이라는 뜻이었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중원 무림도 아니고.
현대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여겨지다 보니, 사생아가 회사의 요직을 맡거나 후계자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철저히 외면당하는 것이 당연했고, 사고를 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목적도 있을 터였다.
그래도 칠성그룹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의식주는 남부럽지 않게 해결해주고 있었다..
사생아 섹터인 D급 구역에도 자신 말고 사생아가 한 명 더 있었다.
자신의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또 다른 거처가 있었지만,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출했다고 했나?”
전혀 근거 없는 추리는 아니었다.
사생아인 자신조차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한 달 동안 코마 상태였던 자신을 찾은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기적적으로 깨어났음에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건 뭐, 집에서 기르는 개보다도 못한 신세잖아.”
대략적인 것들을 파악한 후, 우현은 다음 날부터 조금씩 걷는 양을 늘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운동량을 증가시키며 식단도 일반식으로 바꿨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 앞 잔디밭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고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바로 직전 생이었던 중원에서, 무림맹주로 살아가면서 평생을 훈련하고 가다듬은 내공 심법이었다.
전생의 지식들이 모두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고, 깨달음까지 온전했다.
하지만 맹주였던 시절 단전의 내공이 사라졌고, 소드마스터였던 첫 번째 생에서 사용했던 마나 또한 증발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계나 중원과 달리, 지구의 대기 속 마나는 지나치게 혼탁했다.
게이트가 생기고 마물들이 쏟아지면서, 지구는 점점 더 오염되어 갔다.
마력도, 내공도 쉽게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모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우현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심법에 매달렸다.
무림맹주였던 직전 생이 가장 익숙했기에, 자연스럽게 내공을 형성하는 법부터 떠올랐다.
마력을 만들지 못해서 심법을 운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도 없고, 일정도 없고,
F급 헌터라서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몇 달 동안 같은 행동만 반복했다.
육체도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이제는 격한 운동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근육량이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우현은 대기 중의 기운을 몸으로 흡수하는 심법을 연공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애초에 몸으로 흡수하려 하지 말고,
대기 중의 기운을 한 지점으로 끌어당겨 모아두면 되지 않을까?
그는 모든 공력을 소모해, 기운을 한 곳으로 모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몸에 엄청난 부담이 갔다.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없었고, 곧바로 기운이 흩어지며 그는 늘어져 버렸다.
‘공력을 이용해 기운을 한 곳에 모아두고, 응축된 기를 밀도 있게 조금씩 받아들이면 어떨까?’
하지만 육체와 내공이 따라주지 않아, 금세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텅 빈 단전에 내공이 서서히 차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내공은, 이전보다 더욱 정순하고 깊이가 더해져 있었다.
한 곳에 모아둔 기운은 흩어졌지만,
대기 중으로 퍼진 내공이 다시 돌아오면서, 더욱 순화된 형태로 단전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무림의 방식처럼 주천을 돌려 내공을 회복하는 개념이 아니라,
대기 중에 퍼진 기운이 다시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정화되는 원리였다.
이계보다는 어렵고, 무림보다는 쉬운, 중간 개념의 내공 수련법.
이계에서는 대기 중의 기운이 풍부해 마나 생성과 증폭이 쉬웠다.
하지만 지구는 다르다.
게이트가 생기고 마물들이 등장하면서, 대기 중의 마나가 오염되었고,
그로 인해 마나와 내공을 정제하는 과정이 더욱 까다로워졌다.
“신선한데.”
우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수련을 지속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