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은 세상에서 가장 하얀 개다. 백설이 태어났을 때, 곧 하얀 털이 나기 시작하자 그의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할아버지는 마른 혀로 백설의 털을 정성으로 핥았고, 그 덕분인지 백설은 하얀 개들이 사는 이 섬에서도 가장 하얀 털을 가질 수 있었다.
백설이 사는 곳은 귀한 보석처럼 작디작은 섬이다. 백설은 개들만 사는 이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섬이 너무 작아 반대쪽에서 짖어도 다른 반대쪽까지 소리가 들렸다. 섬 꼭대기에 올라가면 주변이 훤히 보였다. 온통 에메랄드 빛 바다였다. 파도는 아침 밤 가릴 것 없이 절벽을 마구 긁어댔고,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개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행복한 낮잠에 빠지곤 했다.
섬의 개들은 스무 마리 가까이 되었다. 전부 백설의 가족들이었는데 백설처럼 모두 눈처럼 하얬다. 삼촌, 외숙모, 아빠, 엄마, 할아버지. 전부 너무 하얘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중 백설과 백반은 가장 막내였다. 둘은 서로 사촌지간이면서도 같은 날 태어나, 마치 쌍둥이처럼 마음이 잘 맞았다. 백반 역시 하얀 털이 싱그럽게 자랐지만 백설처럼 하얗지는 않았다. 백설은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백설은 섬 꼭대기에 가는 걸 좋아했다. 머루알보다 까맣고 맑은 눈동자로 먼 바다까지 내다봤다. 널따란 도화지 같은 바다에 햇빛이 부서져 눈이 따가웠다. 백설과 가장 친한 사촌 백반은 바다를 보는 걸 좋아했다. 섬 꼭대기에 가면 항상 백반이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는 분명 수많은 섬들이 있을 거야.”
백반이 언젠가 한번 말한 적 있었다.
“정말? 하지만 바다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걸.”
“응. 저 바다 너머에 말이야. 바다보다 더 먼 곳.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말이야.”
백설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었지만 백반은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마치 저 수평선 너머에 무언가 보인다는 듯 말이다.
“태양을 봐. 저 태양이 갑자기 생겨났겠어? 분명 바다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만든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야. 바다 너머에서 여기로 건너와 살기 시작했을 거야.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라서 우리가 모르는 것뿐이라고.”
“에이, 설마.”
“아냐. 난 믿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모르는 먼 옛날.”
백반은 섬 곳곳에 버려진 천막, 엄청난 크기의 밭과 나무, 이제는 넝쿨과 낙석에 가려진 거대한 바위 건물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 작고 하얀 개들이 만들기엔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백설이네 가족들은 그 유적들에서 지혜를 얻어 밭을 갈거나 집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부 흉내낼 순 없었다. 훨씬 뛰어난 기술력으로 건물을 짓고 해안가에는 방파제를 만들었다. 백설이네가 이를 아무리 연구해도 고대 선조들의 지혜를 따라갈 수 없었다. 백반은 그 흔적들이 바다 너머에서 온 자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개들은 거의 없었다.
“저 바다에 뭐가 있다고. 바다 위에 떠다니면서 살고 있다는 거야?”
백설은 며칠 전 삼촌이 바다에 빠졌다가 간신히 헤엄을 쳐서 살아 돌아왔던 일을 떠올렸다. 저 거친 파도를 뚫고 평생을 헤엄치며 살 수는 없었다. 백설 역시 수영을 할 줄 몰라 바다가 무서웠다. 바다는 섬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가까이에선 이빨을 드러낸 뭇 개보다 무서웠다.
백반은 종종 그런 얘기를 들어놓다가도, 태양이 바다 속으로 녹아들어갈 때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는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 . . . . .
백설은 훌륭한 농부다. 다른 가족들은 대부분 어업을 하거나 사냥을 했다. 백설이 훌륭한 농부로 성장한 건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할아버지는 가족 중 유일하게 농업을 했고, 백설의 아빠가 그 농업을 물려받아 백설에게 전수해주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너무 늙어 더 이상 농업을 할 수 없었지만 때때로 흙의 냄새를 맡고는 물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거름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알려주곤 했다. 백설은 곧장 잘 터득했다. 소질이 있었다. 해가 쨍한 날에는 물을 많이 주고, 먹구름이 많은 날에는 물을 조금 주었다.
이따금 날아드는 철새를 제외하고는, 계절마다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벌레들을 제외하고는. 이 섬에는 오로지 하얀 개들만 살았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 섬에서 살았다고 했다. 백설은 발사탕을 핥다가 할아버지한테 크게 혼나는 날이 있어도 잠들기 전, 꼭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보챘다. 할아버지에게서 듣는 옛날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섬에는 제대로 된 길도 없고 밭도, 낚시터도 없었다고 했다. 지금처럼 살기 좋아진 건 모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섬을 열심히 가꾸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섬이 어떤 날씨를 두려워하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았다. 파도가 산처럼 높거나 번개가 치는 날에는 섬을 토닥토닥 위로했다. 백설은 그런 할아버지가 좋았다. 가을이면 직접 재배한 옥수수를 곶게 빻아 빵을 만들었는데 할아버지는 백설의 빵을 좋아했다.
“백설이 네가 만든 빵에서는 포근한 냄새가 난단다.”
“포근한 냄새가 뭐예요?”
“그리고 네가 만든 빵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어떻게 기분이 좋아져요?”
할아버지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백설이 항상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종종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을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백설이 만든 빵을 먹으면 항상 달콤하게 잠이 들었다.
“한 번은 이 할애비가 어렸을 때, 나무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었단다. 아마 백설이 너만 할 때였을 거야. 저 절벽 아래에 있는 느티나무 알지? 그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는 처음 듣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아직도 그 노래가 잊혀지지가 않는단다.”
“어떤 새요? 갈매기? 지빠귀? 딱새?”
호기심이 많은 백설은 할아버지에게 더욱 바짝 다가가 물었다.
“아니. 이 할애비도 처음 보는 새였어. 그 뒤로 그 새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단다.”
“그 새는 어디에서 날아왔을까요?”
“글쎄다.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모르지. 그토록 구슬픈 노래는 생전 처음이었으니. 딱 한 번 들었는 데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단다.”
할아버지는 띄엄띄엄, 그 곡조를 흥얼거렸다. 백설은 혀를 내밀고 할아버지의 멜로디에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그 새가 나에게 물었어. 여긴 어디니? 나는 길을 잃었어. 날개가 너무 고되어 잠시 앉아 쉬고 있어. 이렇게 오래 비행한 건 처음이야.”
할아버지가 노래를 멈추고, 그때가 생각난 듯 다시 말했다.
“그래서요? 할아버지는 뭐라고 했어요?”
“집. 우리 집이야. 맞아. 그렇게 말했어.”
할아버지는 그러더니 잠에 들었다. 요즘 들어 할아버지는 말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에 들곤 했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나이가 들어서라고 했다. 백설은 할아버지의 낡은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쓰기 좋은 나뭇가지를 주워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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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있으면 네게도 동생이 생길 거다.”
백설이 잠들기 전, 아빠가 말했다.
“정말요? 정말이에요?”
백설에게 동생은 처음이었다. 백반에게 동생이 있는 걸 매번 부러워했는데 이제 백설도 어엿한 형이 되는 거다. 엄마 배가 작은 옥수수 빵처럼 부풀었다. 백설은 그런 엄마 배가 신기했다.
“엄마 배가 볼록 나왔지? 동생이 엄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단다.”
엄마가 다정하게 말했다. 백설은 얼른 동생을 만나고 싶었다. 동생을 만나면 무엇부터 해야할지 매일 밤 고민했다. 맛있는 빵을 만들어주고, 함께 밭을 가꾸며 멋진 개로 커가는 상상이 구름처럼 마구 커졌다.
간밤에 파도가 요동쳤다. 누가 먼저 하늘에 닿나 시합이라도 하듯 파도는 마구 솟구쳤다.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에 창문은 엉엉 울었다. 하늘엔 달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믐달이었던 달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백설은 몸을 한껏 웅크리고 할아버지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는 해가 뜨고 고운 하늘이 개면 파도는 방금 잠이 든 강아지처럼 얌전해질 거라고 했다. 그리고 백설이 날카로운 이빨 같은 파도를 보지 못하도록 꼬리로 백설의 눈을 가볍게 가려주었다. 백설은 마음이 편해졌다.
아침이 되자 할아버지의 말대로 매섭던 바다는 보드라운 천 자락처럼 가라앉았다. 백설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맑은 하늘이었다. 멀리 하늘과 수평선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백설은 백반과 함께 섬 꼭대기로 올라갔다.
“바다는 매번 모습이 바뀌어. 단 한 번도 똑같은 모습을 한 적이 없어.”
백반과 함께 삶은 완두콩을 먹으며 바다가 얼마나 넓을 지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백설은 백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바다를 멀리 내다보았다.
“백반아. 저건 뭐야?"
멀리. 작은 검정콩만한 것이 보였다. 그건 수평선에 떠 있었다. 백반은 시력이 좋지 않아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검정콩만 하던 건 점점 커져 백설의 까만 코 크기가 됐고, 빠르게 빠르게 더 커졌다. 마치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갈매기의 크기가 점점 커지듯이 말이다. 그건 물 위에 떠서 섬을 향해 오고 있었다.
“뭔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바다 위에 떠서 말이에요.”
백설이 황급히 집으로 내려가 가족들에게 검은 물체에 대해 말했다. 아빠는 백설의 말을 듣고 섬 꼭대기로 갔다. 백설도 아빠를 따라 섬 꼭대기로 향했다. 아빠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백설은 용감하게 아빠를 쫓아갔다. 할아버지는 혹시 모르니 가족들에게 얼른 몸을 숨기라고 했다.
강아지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할아버지는 별 일 없을 거라며 강아지들을 핥아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할아버지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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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물체는 아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그건 마치 호미 날처럼 생겼는데 물 위를 떠다녔다. 검은 호미는 벌새의 날갯짓 같은 소리를 내며 바람보다 빠르게 섬으로 와 절벽 해안가에 멈춰 섰다. 가까이 와보니 백설의 집을 열 채나 합친 것보다 훨씬 큰 크기였다. 아빠와 백설은 돌 뒤에 몸을 숨겼다. 우렁찬 소리는 이내 찾아들었다.
검은 호미에서 무언가 움직이더니 두 다리를 길게 뻗어 섬으로 올라섰다. 백설과 같이 개와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것들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다. 두 발로 걷고, 머리부터 다리까지 일자로 곧게 선 모습이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까닥이며 고개를 돌리며 섬을 관찰하는 듯했다. 가슴 위치에 달려 양쪽으로 쭉 편 앞다리는 사마귀처럼 흐느적거렸다. 총 여섯 마리가 호미에서 내렸는데 전부 검은 피부를 갖고 있었다.
백설이 경계심을 드러내려 턱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아빠는 백설에게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그들은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헤치며 섬에 길을 만들었다. 개들이 몇 날 며칠을 걸려 만들던 길을, 그들은 삽시간에 만들어냈다. 긴 앞다리로 쥔 도구를 이용해 여름 내내 자란 풀들을 다 잘라냈다. 그들은 섬 꼭대기까지 올라가 섬을 둘러보고, 고대의 유적들을 살폈다. 특히 거대한 건물을 주로 살폈다. 그들은 다행히 섬 반대편에 있던 백설이네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해가 기울 때 쯤, 물에 뜬 것을 타고 다시 바다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아빠와 백설은 얼른 집으로 가 가족들에게 그 생명체들에 대해 알렸다. 백설네 가족들은 모두 걱정이 앞섰다. 그들은 누구며 어디에서 왔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바다에서 떠다니며 살아가는 생명체. 바다와 땅을 자유롭게 다니는 그 불가사의한 존재들 말이다. 새처럼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처럼 네 발로 걷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또 섬에 올지도 몰라. 또 오게 되면 그들을 두 번 다시 섬에 발을 못 붙이게 혼쭐을 내 줘야해.”
삼촌은 그들이 또 올 것을 대비해 전쟁을 준비해야한다고 했다.
“2년 전 괭이갈매기들이 우리 섬을 점령했던 거 기억나지? 우리가 멋지게 싸워서 갈매기들을 해안가에 묶어놓았잖아. 그때처럼 본 때를 보여줘야 해.”
가족들은 전부 그때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백설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아빠에게서 익히 들은 내용이었다. 아빠는 그때 뒷다리를 다쳐 여전히 다리를 절뚝인다고 했다.
“아니에요. 그들이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건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종족이라는 거예요. 그들에게 해안가 일부를 개방해주거나 하는 방법으로 손을 잡아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 해요. 우리가 괭이갈매기들을 공격했던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어요.”
평소라면 삼촌 뒤에 숨어 잠자코 있었을 백반이 앞으로 나서 말했다. 백반은 떨고 있었다.
“바다를 건너 왔다고? 도대체 어디에서 왔다는 말이야? 저 너머엔 바다 밖에 없는데. 저것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게 아니면. 바다에서 솟았다는 거야?”
삼촌이 곧장 다시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개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그들이 또 오게 된다면, 우리는 어차피 그들과 함께 살 수 없을 거야. 누구 하나는 죽게 되겠지.”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소리 냈다. 그게 정말일까?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을까? 백설은 순간 발바닥에서부터 몰려올라오는 공포를 느꼈다. 한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 없었다. 마치 끝없이 가라앉는 바다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은 개들보다 훨씬 키도 크고 몸집도 컸다. 물어뜯을만한 입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기다란 두 앞다리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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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공포에 떨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나날들을 보냈다. 벌써 몇 날을 보냈지만. 그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떄의 그 감정을 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자꾸 지나다보니, 어쩌면 다같이 나쁜 악몽을 꾼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과 크고 깊게 패인 발자국을 보면. 다시 그 공포가 밀려왔다.
외숙모는 이제 세상에 멸망이 온다며 소리쳤다. 삼촌과 아빠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발톱을 날카롭게 깎았다.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가족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위로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