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아야코, 기지개를 켜다.
아야코의 전화였다.
우리나라 말로 했다.
분명 주위 사람을 의식한 말이었다.
나는 가증스럽게 태연한척했다.
- 알았어, 금방 갈게...
사랑해, 하려다가 말았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도 아니고 가식적(假飾的)이었다.
아양으로 죄를 덮으려는 거 같아서
꼭 죄를 인정하는 거 같았다.
죄라? 뭐지, 그게?... 나는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착함이 상처를 준다는 아야코의 말을 되새겼다.
* * *
- 조서방,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하느님이 급하게 쓰실
일이 있어 아버지를 불렀다고 생각하게나...
내가 밖에 혼자 있다가 들어오자
스에마쓰 혼 장인이 걱정되는지 한마디 했다.
물론 일본말로 했지만 조서방이라는 말은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뭘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몽대는 내 사위니 우리 패밀리다,
현재 스에마쓰 그룹의 실질적 오너인
나 스에마쓰 혼이 선언한다였다.
- 네, 알겠습니다, 식사도 부실하셨을 텐데 많이 드시지요...
- 언제나 봐도 몽은 늠름해, 몽 어머니...
이젠 몽 놓치기 싫으니까 아들 서로 바꿔요?
- 좋죠, 저는 쌍수를 들게요, 이렇게...
- 저도 대환영...
쥰페이 엄마 말에 즉각적으로 엄마가 두 손을 들었다.
쥰페이도 두 손을 들었다.
-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우리 베아트리체 엄마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헤...
- 그래요, 몽대는 이미 제 아들입니다,
절대로 줄 수 없어요,
대신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확인 사살을 원하는 내 말에 베아트리체 엄마가
조용히 나근나근 그러면서도 말에 힘을 실었다.
조선의와 조한은 여전히 산스크리트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가끔은 고대 희랍어도 섞어서 썼다.
그 새 많이도 친해졌다.
누가 봐도 다정한 남매였다.
남매는 용감하다는 말이 갑자기 떠올라
속으로 쿡하고 웃었다.
아야코는 냉랭한 표정으로 밥상 위에 놓인 생선을
두 손으로 북북 찢어서 엄마 숟가락 위에 올렸다.
모두 놀라기도 했지만 부러워하는 눈치고,
엄마는 그걸 즐겼다.
놀라기도 한 것은 그 당사자가 아야코라는 것이었다.
천하의 아야코가, 올림포스 신전의 신들도
아야코에게 상대가 될까, 하는
고귀하고 지난(至難)한 존재의 아야코가
조선 시대 인고(忍苦)의 며느리가 하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게 신기했다.
당황한 건 유리나였다.
쥰페이와 결혼을 앞둔 약혼자 입장이라 진땀이 났다.
쥰페이 엄마에게 생선 뼈를 발라준다는 게
문화적 충격이라 그랬다.
그러나 아야코는 아랑곳없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건데 왜 그래? 였다.
베아트리체 엄마 숟가락에도
뼈를 바른 생선 살을 아야코가 올렸다.
베아트리체 엄마가 흠뻑 감동에 젖어 어쩔 줄을 몰랐다.
- 몽대야 내가 아야코 앞에서 오금을 못 펴겠더라,
아우라가... 큭...
베아트리체 엄마가 화장실 가다가 나를 만나자
내게 한 말이었다.
그런데 생선 살을 발라 밥을 뜬 숟가락 위에
올려줬으니 감동일 수밖에...
- 키워 봐야 소용없어...
- 엄만, 한이 아내가 해줄 겁니다.
- 손자며느리 얻기 전에 죽으면?
- 할 수 없죠.
아야코의 냉정한 말에
야마우치 미호 장모가 일부러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손자 조한이 생선 살을
미호 장모 숟가락 위에 올렸다.
- 아이구 내새끼, 여러분,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미호 장모가 조한 엉덩이를 톡톡 치고는
함박웃음으로 말했다.
- 베아트리체 어머니 결혼식을 여기서 할까 합니다.
쥰페이의 급습이었다.
- 야 임마, 베아트리체 엄마의 아들은 나 하나야,
어디서 넘봐?!
사실 속으로 기뻤다.
쥰페이가 일본에서 결혼식을 하지 않는다는 건
큰 사건이었다.
쥰페이는 노무라 가문이고 유리나는 혼다 가문이다.
두 가문은 일본의 대표적인 노블리스 가문이며
일본을 상징하는 가문이다.
- 베아트리체 엄마가 네 엄마면 내 엄마이기도 해,
어디서 세 살 먹은 어린애 투정이야,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
- 콜!
내가 대꾸하기 전에 쥰페이 어머니의 간단명료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 미투!
전형적인 일본 미인 혼다 유리나 어머니도
질세라 찬성표를 던졌다.
혼다 유리나는 잘생김을 대표하는 아버지와
일본 순수미인 베스트 3를 20년째인
혼다 유리나 어머니의 합작품이다.
즉 좋은 것만 잘생긴 것만 유리나가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근 10년 만에 만난 유리나의 미모는 성숙미를 담아
출중(出衆)을 뛰어넘었다.
농담으로 내가 유리나에게 허리 안아도 돼?
하면 유리나는 지체하지 않고 응, 했다.
보통은 이게 미쳤나? 죽고 싶어?
아니면 까불지 마, 라고 했을 텐데 유리나는 거침없었다.
애정의 깊이는 쥰페이 만큼 못했지만,
우정의 깊이는 끝 간 데가 없었다.
고마웠다. 가시나 9년이 훨씬 지나 해후했는데도
우리 우정이 변함없다니...
- 그럼, 몽과 아야코의 결혼식은 일본에서 하자.
어머니 곽세린 여사의 발언은 돌발을 뛰어넘었다.
모두 놀라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 어머니 우리 결혼식 했어요.
- 맞아요, 제가 화동(花童)이었어요.
아야코 말에 미나미가 살을 덧붙였다.
아야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야코 눈치를 봤다.
- 안 돼, 인정 못 해, 결혼은 두 집안의 결혼이어야 해.
- 당연하죠.
얼굴에 화색이 돌며 미호 장모가 손뼉을 가볍게 쳤다.
- 일본 먼저 한 뒤 한국에서 식을 올린다.
왜? 내가 혼주니까, 이의(異意)는 없다.
엄마는 단호했다.
천하의 아야코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바랐을지...
* * *
헬리콥터 프로펠라 소리가 밤하늘을 덮었다.
한 대가 아니었다.
여러 대 소리였다.
- 사돈 우리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마음의 정리가 되면...
- 며칠 있다가 찾아뵙겠습니다,
몽대 작은 아빠도 일본에 있고 해서...
- 네? 그래 주시면 너무 좋지요, 기다리겠습니다.
- 우리끼리 나이트클럽도 가요, 큭...
- 너무 좋죠, 너무 좋죠...
엄마의 돌발에 미호 장모도 맞장구쳤다.
- 혹 오해가 있을 거라서 말씀드리는데
저희 부부도 제 딸 보지 않은 지가 9년이 넘었습니다.
- 네?!
엄마가 놀랐다.
나도 놀랐다.
모두 놀랐다.
- 그럼, 손자는...
- 모자간에 만남도 9년만입니다.
돌도 지나기 전에 사라졌으니까요.
- 근데, 저렇게...
- 다정하냐고요? 모자간이니까요,
그래서 핏줄이 무서운가 봐요.
- 정말 말씀 잘하셨습니다,
정말 요만큼 오해할뻔했습니다.
엄마가 손톱만큼을 가리켰고
미호 장모가 엄마 손을 잡았다.
식사를 마치고 헬기장으로 모두 나갔다.
- 조심해서 가세요, 나중 어머니 모시고 갈게요.
- 그래라... 손자 며칠 뒤에 봐, 조서방도 올 거지?
- 저는 할 일이 있어서...
- 그래도 식 올릴 땐 올 거잖아?
- 참 당신도 그것도 질문이라고,
이이도 숫기가 없어서 그래.
미호 장모가 혼 장인과 나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쥰페이 엄마도 혼다 유리나 집에서 보낸 헬기를 타고
유리나 아버지 엄마와 함께 떠났다.
쥰페이 아버지는 쥰페이 할아버지가 직접 운전하는
5억 불 상당의 호화 요트를 타고 먼저 갔다.
대기해 있던 헬기가 내려서 일본에서 온 문상객들을 태우고 떠났다.
작은아버지와 숙모, 사촌 동생 카나와 미츠토시 차례가 왔다.
카나와 미츠토시는 자진해서 내게 달려들어 안겼다.
- 봐줄 수 있는 티켓은 다 썼어, 명심해.
- 네, 알겠심다, 공주마마,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카나의 말에 내가 굽신거렸다.
- 모성 본능 유발자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으려면 잘해, 형...
-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만일 네 형수한테 쫓겨나면 너하고 살게.
- 그건, 싫어, 거실에서 자, 난 형수를 절대 못 이겨.
- 싸우지도 않고 벌써 져?
- 해 봐야 승산 없어... 형 잘 부탁드립니다, 형수님.
- 네, 되련님, 걱정마시고 조만간에 봬요.
아야코가 미츠토시와 대화할 동안
내가 숙모를 안고 한 바퀴 돌았다.
숙모는 예나 지금이나 얼굴이 발개졌다.
- 숙모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몸매는 여전하시네.
금속 마녀가 내 말이 부끄러운지 내 어깨를 톡 쳤다.
- 내가 너무 무심했지?
- 아녜요, 내가 일부러 수면 밑으로 숨었는걸요.
- 형님이랑, 꼭 와, 일본 결혼식은 내가 주관해도 돼?
- 그러세요, 저는 너무 고맙죠, 헤...
- 아 정말, 너무 좋다, 너무 기대된다.
- 이젠 미움의 색은 바래졌습니까?
- 아직...
숙모는 갑자기 돌아섰다.
9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눈물이 맺혔다.
아야코가 숙모의 어깨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