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불이 꺼진 공유주방 밖으로 3명의 남성 목소리가 들린다.
형사1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인천경찰청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세입자 되시나요?
드레 (목소리) 네. 어쩐 일이신지요?
형사2 (목소리) 이곳에 공유공간이 있다고 하던데 안내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드레 (목소리) 가던 길이긴 한데….. 무슨 일로….?
형사2 (목소리) 여기 집주인이신
형사1 (목소리, 형사2의 말을 막으며) 자세한 이야기는 드릴 수 없는 점 사과드립니다. 공무집행 중이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레 (목소리) 따라오시죠.
바깥 현관 등이 켜지고 남자 3명의 그림자가 주방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인다.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남자 3명이 그 앞에 서 있다.
드레의 손에는 장을 본 봉투가 들려 있다.
출입문이 열리고 드레가 출입문 앞에 신발을 벗고 들어선다.
출입문이 높은 턱 위에 설치되어 마치 계단을 내려와 집으로 들어서는 것 같다.
드레 (출입문 바로 앞 작은 현관에 놓인 실내용 슬리퍼를 신으며) 여기 턱이 높아서 조심하세요. (실내화 걸이에서 손님용 실내화 두켤레를 꺼내) 이거 신으세요.
형사들 뒤따라 들어와 실내화로 갈아신는 동안,
드레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장 본 것을 올려두고, 방과 화장실 사이에 있는 조명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켠다.
형사1 다가구주택에 이런 곳이 있는 게 신기하군요.
드레 (외투를 벗어 식탁방에 걸어두며) 권사님이, 아, 이곳에서는 닉네임을 부르는 데 주인 어르신 닉네임은 권사님이에요. (방을 빠져 나오며) 권사님이 하숙집 주인이 꿈이셨다면서 지하에 있는 빈방을 내놓지 않으시고 공유공간으로 만들어주셨어요.
형사1 (공유주방 한쪽에 걸려 있는 말씀 액자를 보며) 주인 어르신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나요?
드레 인근 교회에 다니신다는 건 들었어요. 이전에 언덕 초입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다른 어르신들이랑 교회 차를 기다리시는 건 봤어요. 여기서 예배도 가끔 하시고요.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거 같은 데 권사님은 절대 범인이 아닙니다. 저희를 위해 이 공간도 제공해주시고, 밥도 거의 공짜로 얻어먹고 있는데 아들을 죽였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제가 여기 들어온 지 10개월이 다 되어가는 데 아드님은 몸이 안 좋으시다며 저희가 있는 시간에는 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드님이 지병으로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권사님이 너무 여린 분이라 충격을 받으셔서 잘못된 자백을 하셨을 거예요. 중년 아들을 아직까지도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는 게 대단하다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도 최근 코로나 때문에 일주일간 어머니 병수발 들러 본가에 간 적이 있는 데 그 일주일도 지옥 같았어요.
형사1 의무기록을 확인했지만 사망하신 아드님이 지병으로 병원에 방문한 이력은 없습니다. 코로나 시국에도 치료를 받은 기록이 없으니 저희는 사망자가 죽기 전까지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형사2 근데 여기서 예배로 드렸다는 건 외부인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겁니까?
드레 외부인이 별도로 들어오는 건 아니고, 저희가 개인 일정으로 공간 사용이 필요하면 사전에 권사님께 사용 목적, 초대 손님 인원수, 이용시간과 날짜 적어서 문자를 보내면 아까 문 앞에 게시판 같은 거 보셨죠? 거기에 게시합니다. 원칙은 한 달 전에 고시하는 건데 전날에 급하게 문의드려도 큰 변수 없으면 이용하게 해주세요.
형사2 하숙집 주인이 꿈이라는 80대 노인이 요즘 시대에 나온 공유공간 운영 방법이랑 똑같이 운영하시네요.
형사1 듣고 보니 그렇네. 나도 가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운영하는지도 몰랐는데 말이야.
드레 아드님이 계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팬트리방을 보여주며)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용량 식자재를 구입하셔서 이곳에 정리하거든요. 비쩍 마르신 권사님이 혼자 여기 물건을 채우고 꺼내서 사용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제 생각에는 잠깐이지만 저희가 없는 시간에 아드님이 오셔서 이 공간운영을 도와줬을 거라 생각합니다.
형사2 물건 정리하는 것도 도와주고, 공유공간 스케줄 관리하는 것도 아들이 했다면 지병이 있는 건 확실히 아니겠네요.
형사1 이곳에 지분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지.
드레 지분이 없어도 자식이면 안 도울 수 없죠. 권사님이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챙기시는 데 그 정도는 자식 된 도리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형사2 보통은 그렇지만 사건이 발생한 이상 보통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드레 설마 지분 다툼이 있어서 권사님이 아드님을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제가 보장합니다. 권사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세요! 돈에 욕심이 있는 분이시면 저희한테 어떻게 이곳을 사용할 수 있게 배려를 해주셨겠어요?
형사1 (드레를 만류하며) 흥분 가라앉히십시오. 살해에 대한 명확한 증거도 나온 상황이 아니라 형사로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는 거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드레 살해증거가 없다는 건 사체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가요?
형사2 (형사1에게) 이런 걸 말해도 되나요?
형사1 (형사2에게) 정보를 얻으려면 정보를 흘리는 것도 방법이지. (드레에게) 권사님의 자백 말고는 그 흔한 방어흔도 발견이 되지 않았습니다.
드레 그럼 자살인 건가요?
형사2 자살을 해도 흔적은 남기 마련인데 그런 것조차 없었습니다.
드레 그럼 어떻게 사람이 죽죠?
형사2 그래서 저희가 그걸 찾으러 왔겠죠?
형사1 권사님이 아드님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까?
드레 아드님 이야기를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형사1 왜 좋아하지 않았죠?
드레 정확히는 본인 이야기를 하는 걸 안 좋아하셨어요. 거의 저희에게 물으셨고 저희가 답하는 형식의 대화였어요. 저희가 가끔 권사님에 대해 물으면 웃으며 말을 돌리시거나 못 들은 척 다른 볼 일을 보러 가시거나 했어요.
형사2 일부러 피했다. 역시 사이는 안 좋았네요.
드레 사이가 안 좋다 말할 수는 없죠. 저도 취업이 안 돼서 집에만 있을 때 부모님이 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그렇다고 제가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에요.
형사1 그럴 수도 있겠네요.
형사2 아드님이 매일 집에 있던가요?
드레 그건 알 수가 없죠. 본 적이 없는데요.
형사2 본 적이 없으면 집에만 있었다는 겁니까?
드레 옆집에 누가 사는 지 형사님은 본 적이 있습니까?
형사2 (잠시 고민하다가) 없네요. 사람이 사는 건 맞지만 제가 워낙 바빠서 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보니 하하하
형사1 형사님도 본 적이 없는데 저라고 봤겠습니까? 아마 이 공유공간이 없었다면 이 집 세입자분들을 모두 모르고 살았을 겁니다.
형사2,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형사1 (공간을 둘러보며) 혹시 소리는 못 들으셨습니까?
드레 무슨 소리요?
형사1 무슨 소리든 상관없습니다.
드레 혹시 권사님이 학대를 당하셨나요?
형사1 그런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드레 아니요. 보통 아동학대 관련한 기사 보면 주변 이웃들이 쿵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식으로 증언하니까 혹시나 해서요.
형사1 쿵하는 소리를 들으셨던 겁니까?
드레 (빠른 부정) 아니요. 이 집은 옛날에 지어진 집이라 그런지 층간 소음이 거의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혹시 권사님이 가정폭력을 당하셨나요? 여름에 반팔 입으셨을 때도 그런 흔적은 본 적이 없는데...
형사2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상흔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권사님의 살해혐의를 입증하는 건 권사님의 자백밖에는 없습니다.
드레 자백은 거짓 자백이에요.
형사2 거짓인지 아닌지를 입증하는 것도 증거가 필요합니다. 저희가 그 증거를 찾으러 왔고요.
드레 권사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형사1 적극적인 협조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성함도 여쭈어보지 않았네요.
드레 닉네임으로 말씀드려도 됩니까?
형사2 최선을 다해 돕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형사1 (형사2를 만류하며, 드레에게) 괜찮습니다. 지금은 탐문조사 중이라 편한 이름으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몇 호에 거주하시는 세입자이신지만 알려 주십시오.
드레 저는 201호에 사는 드레 라고 합니다. 주 출입문 정면에 보이는 집이에요.
형사2 주출입문은 이곳에 들어온 작은 회색문이 아니라, 골목 끝에 있는 큰 노란대문 말씀하시는 거죠?
드레,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형사2 다른 세입자분들도 알고 계시면 이야기해주십시오.
드레 공유공간 옆집이 102호고, 파니라는 작가분이 사십니다. 공유공간 윗집은 202호로 산다라와 강샘이라는, 모녀가 사시구요. 그 위에 301호가 권사님이 사시는 집입니다. 공유공간만 작은 쪽문으로 들어오고, 나머지는 모두 주출입문을 이용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형사1 완전 분리된 공간이라 같은 집인지 모르겠네요.
드레 이 집으로 배달을 시키면 대부분 102호 작가님 댁에 가져다 놔서 작가님이 매번 오배송된 물건을 이곳에 옮겨다 놓으세요.
형사1 이 집에 들어온 지 대부분 얼마나 되시는 지 아시나요?
드레 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들어온 지 10개월 차 되어가고요. 제가 들어오고 난 후 202호와 102호가 대략 한 달 간격으로 들어왔습니다.
형사2 처음부터 이곳이 있었나 보죠?
드레 제가 듣기로는 제가 들어오기 전에 수리해서 공유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보시다시피 모든 세입자의 집이 이 집 구조와 똑같습니다. 복도식 주방겸 거실은 요리하기에도 식탁을 놓아 밥 먹는 곳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지 않고, 그렇다고 가족이 공유하는 거실로도 활용이 불가능한 소통의 부재를 만들어주는 집 구조죠. 1인가구라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주방과 빨래공간이 없다면 집에 다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한숨) 상상도 하기 싫네요. 그냥 창고에 제가 얹혀사는 느낌이라 집에 와도 저의 쓸모없음과 마주할 겁니다. 이곳이 있어서 다들 들어오셨을 겁니다.
형사1 여기 세입자라면 무조건 이용할 수 있나요?
드레 무조건은 아니고, 인당 10만원을 내면 이 공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형사2 어르신이 장사 속이 밝으시네. 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서 매달 10만원이나 받다니 대단하신 분이네요.
드레 매달이 아니라 12개월치 사글세 낼 때 딱 1번 10만원을 추가해서 내는 거에요. 제가 여기 계약할 때 12개월치 월세랑 공과금, 공간이용료까지 해서 850만원 내고 들어왔어요.
형사2 (매우 놀라며) 1년에 850이요? 공과금 추가로 납부 하는 것 없이요?
드레 네. 그리고 여기 식자재비용도 따로 내지 않아요. 여기 들어올 때 낸 850만원이 다에요. 그러니 제가 아까 돈 욕심이 없는 분이라 말씀 드린 거에요.
형사2 (꿍꿍이를 속이고 매우 공감한다) 정말 돈 욕심이 없는 분이시네. (갑자기 친근하게 드레에게 접근하며) 혹시 여기 10개월 사셨는데 나갈 계획은 없으신가요?
드레 (단호하게) 이미 더 산다고 말씀드렸어요. 3개월 전에 계약 연장에 대해 말씀드리고, 돈은 2개월 전에 내면 되는데, 이번 주 중에 돈을 드려야 하는데, 사건이 터져서 권사님과 연락이 안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형사2 (뭔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 아~ 그렇군요~ 권사님은 경찰서에 있고? 제가 말하면 되겠네요~
드레가 형사2의 말을 듣고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형사1 근데 이 좋은 조건의 집을 어떻게 알고 오셨죠? 보니까 하숙이라는 간판도 안 붙어 있던데 혹시 전단 같은 거 보고 오셨나요?
드레 전 부동산 사장님께서 알려주셨어요. 좋은 어르신 한 분이 집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분들에게만 집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면서 마치 비밀의 화원처럼 이곳 주소지를 주셨어요.
형사1 직접 모시고 온 게 아니고요?
드레 네. 아무래도 집세가 워낙 싸서 남을 게 없다 생각하시고 그런 신 거 아닐까요? 계약도 부동산이 아닌 권사님이랑 직접 해서 복비도 안 냈고요.
형사1 요즘 전세 사기가 많은 데 의심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까?
드레 아.... 전혀 생각 못했네요. 빌라왕 빌라왕 말만 들었지. 현실감이 없었어요. 근데 알았다 하더라도 저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부모님 곁에서 나와 처음 구한 첫 집이고, 직장도 1년짜리 계약직이라 비싼 보증금 내고 2년짜리 계약하는 것도 부담이었어요. 학자금 대출금도 이제 갚기 시작했고, 거기에 월세보증금 대출이자에 월세까지
형사2 (이어받아서 더 감정적이다) 거기에 공과금에 식대만 해도 돈이 남지도 않아요. 저도 무지하게 들어오고 싶습니다 이 집. 여기 사니 마음이 편하시죠?
드레 그렇지도 않아요. 너무 많이 신세를 지고 있는 데 제가 그걸 갚을 여건이 없어 받기만 하니 양심이 너무 찔려 사는 게 그리 편하진 않아요. 하지만 여기 나갈 자신은 없으니 양심 없다 생각하고 그냥 사는 거예요.
도어락 열리는 소리
파니 등장
파니는 문을 열고 집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문을 붙잡고 게시판과 신발만 보며 말을 이어간다.
파니 (안을 보지도 않으며) 못 보던 신발이네? 오늘 손님 오기로 했어? 권사님 없다고 게시하지도 않은 약속 잡아서 사용하면 안 되는 건데~
파니가 시선을 돌려 집 안을 보자 형사들이 경찰명찰을 들고 파니에게 보여주고는 고개 숙여 인사한다.
경찰임을 알고 파니가 이상할 정도로 반가워하며 집 안으로 뛰어들어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는 못마땅한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 놓았던 식재료를 정리하고 요리를 시작한다.
파니 마침 형사님들을 찾아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권사님은 범인이 아니에요. 제가 그 증거를 수집하느라 동네 탐문조사를 했는데,
형사2 (파니의 말을 가로막으며) 잠시만요. 혹시 형사 행세를 했다는 겁니까?
파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편의점이나 세탁소에만 앉아 있어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작가적 관찰능력? 아니 이건 청각능력이라 해야 하나? 하하하
형사1 좋은 정보는 얻으셨습니까? 저희에게도 공유 가능하신가요?
파니 그러려고 알아본 건데 당연하죠. (핸드폰 메모장을 연다) 우선 제 질문은 소문에 근거한 거니 이해해주세요.
드레 (못마땅하다) 이 동네는 소통이 없어요. 소문은 전부 권사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짓뉴스입니다.
형사1 네. 걸러 듣도록 하겠습니다.
파니 첫 번째 질문입니다. 실은 사체가 오래전부터 방치되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드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권사님이 그럴 분이야?
형사1 (드레에게 손을 뻗어 그의 말을 만류한다) 간혹 그런 사건들이 요즘 많이 발생하고 있지만, 이 사건은 사망시간이 신고하기 몇 시간 전으로 추정됩니다.
형사2 (형사1에게 속닥거린다) 이렇게 자세히 말씀드려도 되나요?
형사1 거짓 소문으로 수사에 방해되는 것보다는 나으니 바로 잡을 필요는 있어.
형사2,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파니 두 번째 질문이요. 알코올중독자라, 이거는 증인이 있습니다. 편의점 사장님인데 권사님이 술을 거의 매일 사가시고, 술병을 1주에 한 번 10병씩 가지고 온다 하셨어요. 권사님은 술을 전혀 못 드시니, 아니 안 드신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안드셔서 술을 사갔다면 권사님이 아니라 같은 집에 사는 누군가가 마셨다는 거거든요.
드레 이 공유공간에서는 제일 중요한 규칙이 음주와 흡연 금지입니다.
형사1 아직 부검을 실시한 것은 아니라, 피해자의 1차 혈액검사상 알코올농도가 만취상태인 0.12% 정도로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중독성 사망수치인 0.3% 이상은 넘지 않았습니다. 답변이 됐습니까?
파니 그럼 왜 죽은 거죠?
형사2 기사에 보도된 대로 질식사입니다.
파니 아니 그건 저도 기사를 봐서 알아요. 기사 외적인 정보가 알고 싶은 거예요. 질식은 호흡곤란에서 오는 거니까 109키로 정도 됐으면 살이 너무 쪄서 똑바로 누워만 있어도 살이 폐를 눌러 질식해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형사2 100키로 넘는다고 살에 눌려 질식할 정도면 일본 스모선수들은 평균 120키로라는 데 전부 질식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형사1 비만으로 인한 질식사는 한국에서 흔하지 않습니다. 외국에서 간혹 보도가 되기는 하는 데 평균 300키로 내외의 몸무게였습니다.
파니 98년도에 대구에서 80키로그램 여성이 자다가 자기 살에 눌려 혈액순환이 안 돼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고작 80키로그램인데도 비만으로 질식사한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형사1 (흥미로워하며 메모지에 기록한다) 관할이 아니라 몰랐는데 수사에 참고하겠습니다.
그때 형사2의 핸드폰이 울린다.
형사2 (문자를 확인하고 형사1에게) 어르신이 예배 끝나고 돌아오셨답니다.
형사1 바로 가자고.
파니 아직 답을 안 주셨습니다.
드레 (못마땅하다) 파니!
형사1 아니요, 괜찮습니다. 권사님 증언에 따르면 술병으로 머리를 친 후,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하지만 그 어떤 상흔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사망원인을 찾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답변이 되었습니까?
파니 네, 이따 뵙겠습니다.
형사1 조사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드레 혹시 저희가 사용하면 안 되는 거라도 있습니까?
형사1 (집 안을 둘러보며) 괜찮을 거 같습니다. 혹시 이상한 게 발견되면 숨기지만 마시고 저희에게 보여주십시오.
파니 당연하죠! 저희는 선량한 시민입니다.
형사들 인사하고 퇴장.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바깥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방안을 채운다.
형사2 (목소리) 제 생전 선량하다 말한 사람 중에 선량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형사1 (목소리) 선한 양심이 아니라 선악의 양심이지.
형사2 (목소리) 맞아요. 필요에 따라 변모하는 선악의 양심
형사가 떠나고 파니는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는다.
일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는 그가 드레는 영 못마땅하다.
드레 (못 마땅) 음식 하고 있는 데 외출복 상태로 여기 앉는 건 아니지 않아?
파니 (여전히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암 쏘리!
파니, 식탁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어 걸다가 순간 드레의 말투가 걸리는지 요리를 하고 있는 드레를 잠시 주시하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식탁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파니 정말 이해가 안 가. 왜 권사님은 자기가 한 짓도 아닌 일을 자기가 했다고 했을까? 그저 자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그러기엔 너무 과한 벌을 원하시잖아. 여기 남겨진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너무 하셔...
파니의 말을 듣고 기가 막혀 파니에게 따지려던 드레가 밖에서 울려 퍼지는 분노에 가득찬 산다라의 소리에 말을 삼킨다.
산다라 (목소리) 미친 새끼야 네가 양심이 있긴 하냐? (사이) 뭐? 내가 양심이 없어? 야! 네 새끼 밥 먹이겠다고 돈 보내라는 게 양심 없는 행동이야? 네 새끼 밥 먹이고, 공부 시키고, 옷 사입히는 게 너한테 얻어먹는 거야?! 양육에 들어가는 당연한 돈을 안 보내는 새끼가 비양심이야,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내가 비양심이야?! (사이) 닥쳐, 개새끼야! 여자한테 미쳐도 곱게 미쳐. 사리 분별 똑바로 하라고!
파니 누나 또 양육비 못 받았나 보네. (자리에서 일어나 팬트리방으로 이동하며) 맥주 준비해드려야겠어.
드레 어딜 가나 양심 없는 새끼는 시간이 지나도 똑같네. 하긴 양심이 없으니 변할 수가 없는 거겠지.
파니 (냉장고에서 얼음컵과 맥주를 꺼내오며) 회사에서 또 괴롭혔어?
드레 아니야.
바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산다라의 목소리는 더 크게 방안을 울린다.
산다라 (목소리) 양심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애 생일날 그 미친년을 끌고 나오는 게 말이 돼? (사이) 뭐? 약속? 미친새끼야! 네 딸하고 약속은 15년 전 태어난 그 날부터 고정불변의 날짜야! (사이) 까먹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네가 양심 없는 새끼라는 거야! 양심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던가. 눈치도 없으면 예의라도 있던가! 넌 그 어느 한쪽도 없는 새끼라는 게 네 딸 생일날 그 미친년을 데리고 온데 부터 증명이 되는 거야!
도어락 소리
파니 (얼음컵에 맥주를 담아 들고 서 있다) 눈치 있게 행동해. 잘못하면 우리도 깨진다.
드레 너나.
파니, 드레의 말투가 영 걸리지만 무시하고 넘어간다.
문이 열린다.
산다라 그래!!!!
산다라가 신발 벗으려 하나 잘 안 벗겨진다.
파니가 얼음컵을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놓고 빠르게 산다라에게 다가가 산다라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을 들어준다.
그제야 벽을 짚고 신발을 벗는 산다라
그녀는 여전히 남편과 싸움을 하고 있다.
산다라 넌 내 ATM기계다 왜! ATM이면 ATM 답게 행동해! 돈 보내라면 돈 보내고, 더 내놓으라면 더 내놓으라고!
집 안에 들어선 산다라가 식탁방으로 향하자, 파니가 그 뒤를 따라 그녀가 외투 벗는 것을 돕는다.
산다라 어른이고 성인이고 자식을 낳은 아빠면 최소한 자식을 위한 양심 한 조각은 남겨야 하는 거 아니니? 와이프에 대한 양심은 하나 없었어도 네 새끼에 대한 양심은 남겨놔야 할 거 아니야! (식탁에 앉으며) 그래! 네 양심 한조각의 증명은 돈이야! 그러니까 당장 붙여, 돈! 그 미친년이랑 해외여행이라도 가고 싶으면!
산다라, 전화를 거칠게 끊는다.
파니, 기다렸다는 듯이 얼음컵을 그녀 앞에 둔다.
산다라, 숨도 안 쉬고 단숨에 맥주를 전부 들이켠다.
드레는 식탁에 올려진 맥주캔을 집어 출입구 반대편에 설치된 커튼을 친다.
그 안에 창문을 열자 102호와 201호로 향하는 계단 앞 마당이 보인다.
창문 높이와 마당의 높이가 똑같아 마당에 물이 차면 창문으로 들어올 것 같은 구조이다.
팬트리방쪽 창문에 분리수거함이 있다.
드레는 분리수거함 옆에 맥주캔을 내놓는다.
한 두 번 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그의 모든 행동은 익숙하다.
파니 출국금지 시켰어요?
산다라 부모가 부모의 의무를 행하지 않으니 법의 제재가 들어가는 건 당연한 거야. (혼잣말) 스위스? 그년이랑 스위스 여행 갈 돈은 있고 애 양육비 줄 돈은 없어? 돈이 없어서 6개월이나 양육비를 밀린 놈이 스위스~?? 양심 없는 새끼! (맥주를 마시려다가 없는 걸 알고) 더 없니?
드레, 산다라가 묻기 전에 맥주와 얼음컵을 3개 씩 챙겨와 식탁 위에 놓는다.
익숙하게 파니와 산다라도 맥주와 얼음컵을 챙겨 마시기 시작한다.
산다라도 새얼음컵에 맥주를 콸콸 담는다.
맥주 거품만 컵에 가득 차자 파니가 자신의 것과 바꾸어 준다.
드레 (자리에 앉아 맥주를 얼음컵에 옮겨 담으며) 자동이체로 하면 될 걸 매번 서로 피곤하게 왜 그러나 모르겠네요.
산다라 그게 양심도 머리도 없다는 증거지. (파니에게 맥주컵을 받으며) 땡큐. (사이) 나보고 뭐라는 줄 아니? 양육비를 내가 딴 놈한테 쓰는지 알게 뭐냐 하더라. 미친 거 아니야?
파니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발견 즉시 안 헤어지고 붙잡아 보겠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섹시컨셉을 하니까 빌미로 잡은 거라고.
산다라 야! 나 보기보다 섹시해! 공장 일하느라 꾸미질 못해서 그렇지. 한 번 보여줘?
파니 (화들짝 놀란다) 미쳤어!
파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치 더러운 것을 본 것을 본 것처럼 소스라친다.
산다라, 파니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네가 뭘 아냐”며 구박한다.
마치 친누나와 남동생 같다.
드레 궁금해서 그러는 데, 왜 붙잡으려 했어요? 전 가족을 두고 바람 핀 사람은 양심이 없다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지금까지도 피곤하게 만들잖아요. 그런 놈 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산다라 네가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솔직히 내 엄마가 이런 소리 할 때마다 말 같지도 않은 핑계라고 했는데, 그게 진짜 맞는 말이더라. 남편이 바람 핀 걸 알자마자 머릿속에 든 생각이 ‘우리 샘이 어떻하나?’ 였어. 난 경단녀라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구하기 힘든 데 이 새끼랑 헤어지면 우리 샘이 어떻게 키우나 그게 너무 걱정이었어. 양심 없는 놈이라 욕하면서 양심 없이 그 새끼에게 빌붙을 생각하는 내가 참 기생충 같더라. 하지만 그땐 나도 우리 샘이도 먹을 거 먹고 입을 거 입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려면 그 새끼 곁에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드레 (파니를 보며) 누구처럼 집에서 누나가 노는 것도 아니고 살림 다 하고 양육 다 하는 데 왜 양심이 없어요?
드레의 시선을 느낀 파니는 이상함을 확실히 느끼지만 우선 넘어간다.
산다라 그땐 그랬어. 그놈의 잘못을 보고 내 잘못 내 못난 부분만 보면서 이 사태의 문제를 나한테서 찾았지.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내 잘못만 보이는 거야. 내가 참 양심 없이 남편 돈으로 편하게 살았구나. 그러면서 고작 잠자리 하나 비위 맞추지 못했구나 싶더라고. 샘이 낳고 힘들어서 잠자리를 거부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그 문제만 봤던 거 같아.
파니 그걸 사는 게 생존 본능이야? (몸서리 친다) 우웩
산다라 야!!! 입 다물라고 했지!
드레 뭘 샀는데 그래요?
파니 너 들으면 기암할 걸?
산다라 닥치라고 이 새끼야! 양심 없이 비밀로 하기로 하고 떠벌리고 있어! 뒤질래?
파니 (걱정스럽게) 샘이는 보지 않았지? 어휴~ 그건 아동학대야~
산다라 나도 안다고!
드레 나만 모르니까 낄 수가 없네.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큰한 오뎅탕 어때요? 화났을 때는 얼큰한 게 좋잖아요.
산다라 지금 상태로는 얼큰으로는 안 돼. 죽음의 떡볶이를 먹어야 해.
파니 오 맛있겠다. 그거 시킬까?
드레 네가 살 거 아니면 가만히 있어.
산다라 시켜 시켜 내가 살게. 오뎅탕은 벨런스 맞게 순한맛으로 만들고.
드레 네.
산다라 그나저나 다들 권사님께 연장한다고 말씀은 드렸어?
드레 전 그런다고 말씀은 드렸는데 돈을 이맘때쯤 드려야 하는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알아보니까 만약 권사님이 체포되고, 유산상속자 아드님이 없으면 방계혈족까지 이 집이 넘어간다 하더라고요. 거길 넘어서 국가 사유재산으로 귀속돼도 문제고요. 분명 이 조건에 살 수 없을 텐데 말이에요.
산다라 그러니까! 나 지금 일을 투잡을 해도 애랑 둘이 살기 진짜 빠듯해. 여기서 그나마 권사님이 먹여주고, 공과금도 이미 낸 돈으로 해결해 주시니까 사는 거야. 그러고 보니 기생충이 따로 없네. 어딜 가나 기생충 인생이냐 젠장 (맥주를 들이킨다)
파니 사회가 그렇게 만든 건데 어쩔 수 없지 뭐.
드레 (결국 참지 못하고) 양심 좀 있어라! 우리를 위해서 자기 연금으로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거랑 똑같아! 근데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나와?
파니 넌 방법 있어? 너도 똑같이 여기 머물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양심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는 절대 살 수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도 기생충 인생이 바뀌는 거 아니니까.
드레 말을 삼킨다.
파니 너가 계속 내 말에 까칠하게 구는 게 내가 양심 없이 여기서 너랑 누나한테 얻어먹는다 생각해서 그런가 본데, 여기 살림살이 채워 넣고 관리하고 문제 있으면 수리하고 수리기사 부르고 하는 거 권사님이 아니라 내가 계속 해왔어.
드레, 처음 듣는 소리에 놀라서 산다라를 본다.
산다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드레에게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드레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나는 여기서도 따돌림 당하는 거야?
산다라 무슨 소리야! 나도 우연히 알았어. 아까 그..... (자포자기) 나도 모르겠다. 내가 남편한테 섹시함을 어필하려고 산 게 야한 속옷이야. 그.. 야동 코스튬 할 때나 입을 법한 그런.... (사이) 여튼 깜빡하고 내가 그걸 빨래통에 넣고 나중에 생각이 나서 조퇴하고 바로 뛰어왔는데 파니가 내 속옷을 눈을 감고 개고 있더라고.
드레 너가.. 빨래도 갰어?
파니 그럼 누가 하냐? 권사님은 보통 요리 준비하느라 바쁘고, 화요일은 전도 예배, 수요일은 수요예배, 목요일은 소그룹 예배, 금요일은 금요예배, 일요일은 주일 예배 다 가시느라 오전이든 오후든 반나절은 이곳에 안 계셔. 시간이 남는 내가 해야지 누가 하겠어. 대용량 식자재도 권사님이 아니라 내가 채워. 구매만 권사님이 하시는 거야.
산다라 그래서 물건 있는 위치를 권사님보다 파니가 더 잘 알았던 거야.
드레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숙인다. 들릴 듯 말 듯) 미안해... 묻지도 않고 나 혼자 생각하고 오해했어....
파니 (장난스럽게) 뭐라고? 안 들리거든?
산다라 미안하다잖아. 들어놓고 모른 척은! 됐어. 이제 끝.
드레 (큰 소리로) 미안해. 양심 없다는 말할 자격이 없는 데 실언... 아니 내가 감정적으로 아무 말이나 했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