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씨….”
토요일 아침 나의 첫 마디였다. 과음만으로도 버거운 나이인데 취침 시간이 훌쩍 지난 새벽에 잠을 잤다. 나의 몸이 제정신이냐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아직 좀 더 쉬라고 아우성쳤지만 그래도 아침 모닝똥은...
대충 세수만 하고 냉장고에서 500ml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2L 생수병이 더 절약되고 환경오염 방지에 더 좋다는 것을 알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의 편의를 위해 돈을 더 주고 환경파괴범이 되기로 자청했다.
물은 마시고는 침대에 다시 벌러덩 누워 핸드폰을 켰다. 예전엔 술자리가 끝나도 다시 볼일 있을 때까지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우리였지만, 이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해야 할 때가 되다 보니 잘 도착했다, 살아 있냐 정도의 메시지를 보내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어제 나만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아 서둘러 생존 신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지려는 찰나-
지이잉-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핸드폰은 기계이다. 고장 난 것이 아닌 이상 항상 똑같은 소리와 강도로 울리는 저 진동 소리가 이상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거북하고 불편한 진동음. 전자파를 읽어내는 초능력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 문자는 지금 날 힘들게 한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 정혜미: 오빠, 우리 좀 만날까?
확인하지 말걸. 나의 식스센스에 놀라며 스파이더맨처럼 손에서 거미줄이 나오나 확인하다가 다시 한숨 쉬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불편한 심장의 두근거림이 시작되자 핸드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두었다.
지이잉-
다시 한번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 확률적으로 그녀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다시 보내는 메시지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번 진동 소리는 묘하게 기대가 되고 설레고 반가운 진동음이었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 싶었지만 가끔 미친놈처럼 느꼈었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 한우주 주임: 해장하실래요?
원룸촌의 좋은 점은 없는 거 빼고는 다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중에 식당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종류의 맛집이 많았다.
“와…. 주인, 아니 주임은 맛집을 많이 알고 계시네요? 얼마나 돌아다니신 거예요?”
“짧은 문장 속에 다양한 코멘트를 달게 하시네요.”
“넹?”
둘 다 일어나서 샤워하고 바로 나온 듯 덜 마른 머리카락에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한우주 주임은 콩나물국밥이 마음에 드는 듯 식탐을 억제하지 못하고 펄펄 끓는 뚝배기에 쉬지 않고 숟가락질하였다.
“드디어 잘못된 호칭을 자각한 거에 칭찬하고, 여기 산 지 좀 돼서 웬만한 곳은 다 돌아봤어요.”
“올. 집에서 밥 먹을 땐 주임님께 컨펌 받고 먹어야겠어요.”
“여기서까지 우주 주임 결재를 봐줘야 하나요.”
“오, 깍두기도 맛있어요. 한 그릇 더 시킬까요?”
“어차피 곧 용량 다 채워가잖아요. 그만 드세요.”
“까비….”
아직 뚝배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건만 한우주 주임의 뚝배기 안은 비어있었다. 살짝 양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아직 먹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한우주 주임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닌 나의 뚝배기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줘요?”
“아뇨, 하하….”
말과 다르게 시선을 포기하지 않는 한우주 주임이었다. 급하게 물로 배를 채우던 한우주 주임은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갑자기요?”
“그냥 평소랑 분위기가 달라서요.”
“분위기가 어떤데요?”
“묘하게 차분하고…. 뭣보다 본인 밥도 준다고 하고….”
묘하게 열받는 포인트로 알아차린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잘 알아차렸네.
“지금 제 기분을 뭐라고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입대 전날과 같달까?”
“엥?”
“입대하는 게 개빡치고, 부정하고 싶어서 날뛰다가, 입대 전날이 되니 현실을 받아들이고 경건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절을 올리는 그런….”
“군대를 안 가봐서 모르겠어요. 여자라서 죄송합니다.”
“위험한 발언은 농담으로 쓰지 마세요. 전 온 세상 지구인을 사랑한답니다.”
“외계인은요?”
“이 이야기가 지구 밖 행성인들까지 연결되나요?”
“암튼 하기 싫은 걸 하러 간다는 말인 거네요?”
“빙고.”
한우주 주임이 내 말을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아니, 조금은 귀여웠다.
“잘하고 와요.”
“네?”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그래도 할 땐 잘하시잖아요. 군 생활도 잘했을 거 같고. 화이팅입니다.”
“푸하하하.”
심플했다. 저 심플하고 감정 소모 없는 저 말에 기운이 났고, 웃음이 났다. 나의 웃음에 어리둥절한 한우주 주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잡으셔야 해요.”
“덕분에 꽉 잡게 됐어요. 이 일이 끝나면 밥 한번 살게요.”
“고기?”
“아….”
“삼겹살?”
“하…. 좋습니다.”
지구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이었다. 새싹이 자라고 꽃과 나뭇잎이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세상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움츠렸던 나의 어깨도 걷는 동안 자연스레 당당하게 펴졌다. 발걸음도 가벼웠고 따뜻한 햇살에 미소가 지어졌다.
“여기야, 오빠.”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그녀는 나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하려다 황급히 손을 내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봄이 오직 안왔나보다.
“오래 기다렸어?”
“응? 아니. 카페에서 보자고 하지 왜 밖에서….”
“그냥,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직 추우려나?”
“공기는 쌀쌀한 것 같은데 햇살이 따뜻해서 괜찮을 거 같아. 그래도 긴 이야기는 안에서….”
“길지 않을 거야.”
“어?”
그녀에게 그 동안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녀만 생각하면 머리 속이 시끄럽고 가슴은 미친 듯이 뛰는 통에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었다. 첫 한마디만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되지 않았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나의 분노를 알게 하고 내가 찌질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고 그녀를 나만큼이나 아프게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나 좀 무섭네. 하하….”
“혜미야.”
“응?”
생각보다 담담한 나의 목소리에 그녀는 되려 놀랐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가 너였어.”
마음이 정해지니 머릿속은 고요했고 가슴은 차분해졌다. 나를 위해, 그녀를 위해 꾸미지 않아도 됐다. 그동안 고민했던 나의 첫마디는 진심과 진실이었고 그거면 됐었다. 나의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듯 고개를 떨궜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처음 했던 사랑이라 끝을 내는 법을 몰랐었나 봐. 아니, 끝을 내기 싫었던 것 같아.”
“어?”
“그래도 이제는 끝을 내야지. 나는 이제 행복해질 거야, 그러니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새삼스레 그녀를 저주할 것도 잘잘못을 따질 것도 없었다. 이제는 남이다. 정혜미라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 소모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굳이 불행했던 기억을 챙겨가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발길을 돌리려 하자 혜미가 급하게 나의 팔을 붙잡았다.
“저, 저기 오빠. 잠깐만. 이게 끝이야? 이렇게 그냥 가면 어떻게 해? 적어도 내 말은 한 번이라도 들어봐야지. 그땐 제대로 설명 못 했지만, 사실은-”
다급히 말하던 혜미는 미소 지으며 자기 팔을 천천히 내려놓는 나의 모습에 멈칫하였다.
“예전엔 진실이 궁금했고, 진심이 궁금했는데. 이제는 됐어. 무엇이든 상관없어. 그냥 우린 끝이 난 거야.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오빠….”
“봄이 왔어.”
“뭐?”
“나에게도 너에게도 똑같은 봄이 왔다고. 날이 좋으니, 밖에서 삼겹살 구워 먹기 좋은-. 아니, 아무튼 나 간다. 잘 살아!”
안녕.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은 사실 잘 모르겠어. 인사말 같은 거였나 봐. 그래도 불행하지는 마. 이제 잘못한 게 없으니, 길에서 만나면 피해 다니지 말고 눈인사 정도는 하자.
진짜 안녕, 정혜미.
와... 개쿨하게 끝내고 오긴 했는데 앞으로는 주말 이별은 피해야겠다. 일이라도 했으면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을 텐데 주말에 헤어지니 아직도 토요일 저녁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즐거운 저녁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고 나의 식욕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흠…. 삼겹살이 당기긴 하는데….”
혼밥이 더는 특이한 게 되지 않고 평범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어떤 음식이든 배달이 되었고 뛰어난 맛을 낸다. 파스타, 밀푀유, 생고기 등등 다양한 음식을 배달로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삼겹살만은 그 본연의 맛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고기는 자고로 즉석에서 구워 먹는 것이 제맛! 그러나 아직 혼자 고깃집에 갈 용기는 없었기에 구워진 고기를 배달시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자취 초반에는 원룸 안에서 한 번씩 고기를 사다가 구워 먹었지만, 이불, 옷, 벽지까지 스며드는 냄새며, 온갖 군데 튄 기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포기한 지 오래였다.
혁권이를 부를까, 하다가 혹시나 오늘 있었던 혜미와의 일이 그 녀석 귀에 들어갔으면 귀찮게 하길 뻔했기에 생각을 접었다.
“우주 주임 물어볼까?”
오전에 한 이야기도 있고…. 하, 근데 평소 식탐으로 봐서는 내 지갑이 버텨내지 못할 거 같은데…. 요즘 돼지고기도 너무 비싸다. 예전처럼 편하게 먹던 서민 음식에서 신분 상승을 한 지가 오래였다.
“그래도 고기 산다고 했으니….”
전화를 걸자 신호가 몇 번 가기 전에 바로 받는 한우주 주임이었다.
- 네, 주임님.
“뭐 하세요?”
- 넹? 저 삼겹살 먹으러 가려고요.
하…. 선약이 있었나 보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누구랑 가요? 친구 없다면서요.”
- 혼자 가는데요.
“?”
- ?
“제가 주임님을 너무 과소평가했어요. 저랑은 그릇이 다르네요.”
- 밥그릇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생각보다 많이 먹지는 못하는데.
“조금은 과소평가하는 게 맞겠네요.”
- 저 고기 먹을 생각에 너무 설레 거든요. 이 행복을 방해 말아주실래요?
“방해하는 게 아니라면 그 행복을 같이 즐겨도 될까요?”
- 엥?
“저도 고기가 먹고 싶어요.”
- 약속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약속 끝난 지 오랩니다.”
- 오, 그럼 좋아요. 사실 아까 주임님이랑 고기 이야기한 뒤부터 위장이 요동쳤거든요. 같이 이야기했으니 같이 먹는 게 의리인 줄은 알지만. 몰래 먹으려다 들켜서 사실 부끄러웠거든요.
“이상한 데서 부끄럼을 타시네요. 어디로 가면 돼요?”
- 집 앞에 대패 삼겹살집 거기 가고 있어요.
“아, 안돼. 거긴 안 돼요.”
- 왜죠?
“고기 질이 별로예요. 서비스도 안 좋고. 차라리 돌솥 삼겹살집으로 가시죠.”
- 아하, 주임님이 사시는 거니까 아무 데나 좋습니다.
“네?”
- 그럼, 그쪽에서 만나욥!
반문할 틈을 주지 않고 끊는 한우주 주임이었다. 뭐 사려고 했던 건 맞긴 하지….
삼겹살, 너무나 위대한 음식이다. 굽는 냄새만으로도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는 강력함과 구웠을 때 나는 특유의 지글거리는 소리까지, 삼겹살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냄새와 소리만 들어도 이미 틀림없이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먹어본 사람은 어떻겠는가? 한우주 주임과 나처럼 철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침을 흘릴 것이다.
“한우주 주임님, 침 닦아요.”
“쓰읍.”
“아니, 테이블에도 떨어져 있, 뭐야 물 엎질렀어요?”
“저희 물 따르지도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수저, 젓가락 세팅도 안 하고 있었네요.”
“해줘.”
“회사에서 봅시다.”
익숙하게 테이블 밑 서랍장을 열어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려는 순간, 빈틈을 포착한 듯 한우주 주임이 내 앞에 있던 집게로 손을 뻗었다.
“오소이!”
가까스로 내 앞에 있던 집게를 사수한 뒤 분해하는 한우주 주임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집게는 제 것입니다.”
“아직 반사신경 좋으시네요?”
“고기 굽기 가위바위보에서 제가 이겼잖아요, 결과에 승복하시죠? 그리고 ‘아직’은 무슨 의미인가요?”
“아. 고기 집게 없으면 현기증 나는데….”
“자, 보세요. 이 적당한 타이밍에 뒤집는 센스를!”
고기를 뒤집자, 불판이 세차게 다시 한번 소리를 내었고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삼겹살에 자태를 뽐내었다.
“대패는 금방 익기 때문에 진짜 잘 구워야 한다고요.”
“엌, 주임님 저 턱받이 해야 할 거 같은데.”
“앞치마라도 일단 하세요. 방금 테이블 닦은 거 아니었어요? 그러다 탈수증 오겠어요. 기다려요, 곧 다 익으니까.”
“고기만 드실 건가요?”
“술 말하는 건가요?”
“아뇨, 밥 말한 건데요.”
“볶음밥 안 먹어요?”
“그것도 먹을 건데요”
“?”
“욕심인데….”
“그럼 반 공기씩?”
“콜!”
하얀 쌀밥에 노릇한 고기. 밥알 사이로 돼지고기 기름이 스며들면 탄수화물의 극을 이룬다. 한 번 씹을 때마다 고소함과 특유의 감칠맛이 돌고 거기에 쌈장과 생마늘이 더해진다면…?
“한우주 주임? 지금 눈에 흰자만 보이는 거 같은데 정신 차리세요.”
“여기 비냉 하나 추가요!”
“그건 인정.”
“여긴 쌈 채소가 많아서 좋아요. 상추, 깻잎, 배추는 기본이고 열무에, 쑥갓에 당귀까지! 당귀를 주다니! 이 비싼 채소를…!”
“우세요?”
“모른척해 주세요.”
“그건 뭐예요?”
“이거요? 당귀인데 몰라요?”
“드셔볼래요? 한약 맛이라 호불호가 엄청나게 갈리기는 하는데….”
“그런 떨떠름한 표정 지으면서 권하면…. 그래도 먹어보겠습니다.”
“쳇.”
당귀 한줄기를 건네받은 한우주 주임은 신중하게 냄새를 맡아보더니 바로 진저리를 쳤다. 나이스.
“한국식 고수와 같은 향신료 채소라 아무나 못 먹습니다.”
“전 아무나 인가 봐요.”
상추와 깻잎으로 고기를 써먹던 한우주 주임이 오물거리며 말했다.
“표정이 낮과 다르게 되게 밝으시네요?”
“음…. 이별하고 왔거든요?”
“엥? 여친 있었어요?”
“아뇨, 과거와의 이별입니다.”
“당귀 그만 드세요. 취하신 거 같아요.”
“아무튼 홀가분하고 개운하답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축하드려요. 진짜 이별은 내가 했는데….”
“우울한 표정과 말투와 다르게 저작운동은 쉬질 않으시네요.”
“일단 먹고 나서 슬퍼할게요.”
“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