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랑 이 부분 계산이 잘못됐네요.”
“아, 죄송합니다.”
“한우주 주임은 앞으로 김민지 대리가 맡기로 했으니 본인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세요.”
최선하 실장의 말은 언제나 순수 악이었다. ‘악’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었으나, 언제나 아팠다. 그래도 저 말과 함께 공식적으로 나의 업무가 하나 줄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 며칠간 한우주 주임은 고선미 팀장과 김민지 대리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애먹었지만, 그래도 막상 김민지는 자기 일에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기에 최선을 다해 한우주 주임을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앉는 한우주 주임이 내게 속삭이며 말했다.
“대리님이 오늘 시간 괜찮다는데 치맥 어떠세요?”
별다른 약속도 없었고 친목을 다질 타이밍이다 싶었기에 순순히 수락하려던 찰나였다.
지이잉-
“아, 잠시만요.”
평소였다면 대답 먼저 했을 테지만 왠지 모르게 문자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주임님?”
한우주 주임이 아무 말 없는 나를 걱정스러운 듯 불렀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아, 아. 아닙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어쩌죠.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안 될 것 같네요.”
평소에 편하게 입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양복을 입는 것을 정말 오랜만이었다. 소개팅 나가거나 중요한 업무가 있을 때도 입지 않았던 정장을 옷장에서 꺼내었다. 소개팅이나 업무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에 꺼내어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 끝나고 난 뒤였지만 피곤한 느낌은 없었다. 택시를 타고 최대한 빨리 장소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임에도 그 넓은 주차장은 거의 다 차 있었고 저마다 어둡고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비로 들어가 실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아차 싶어 ATM기로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빠듯한 잔액 상황이었지만 뽑을 수 있는 최대치의 금액을 찾았다.
로비 한쪽에 마련된 봉투에 ‘유족 고현권의 지인 박지훈’이란 글을 쓰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3층으로 올라가자, 첫날이라 그런지 조문객은 별로 많지는 않았다. 문 앞에서 조문객과 이야기를 나누던 혁권은 나를 보자 미소를 지었다. 상복 차림에 안색이 창백한 녀석과 어울리지 않은 미소를 보자 마음이 내려앉았지만 나 또한 혁권을 따라 미소를 지어줄 수밖에 없었다.
영정 사진 속 혁권의 할머니는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시며 지어주었던 인자한 미소를 그대로 짓고 있었다. 울컥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평범한 남자였기에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할머님께 절을 올리고 혁권과 맞절하자 혁권은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평소라면 이런 짓을 했다간 뺨을 맞았겠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 또한 그 녀석을 안아주었다.
생각보다 장례식장 안은 한산했다. 그런 모습이 나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여, 술 한잔해야지.”
혼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온 혁권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럼 맥주 하나만 주라.”
“오케이.”
“성일이랑 태준이는 내일 온다고 하더라.”
“딴 지역에 사는 놈들이 무슨 여기까지 온다고 그래.”
“너 같으면 안 오겠냐?”
나의 물음에 혁권은 대답 대신 맥주를 따라주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너랑 애들 보면 할머니가 좋아하시겠다.”
“내 생각엔 성일이를 제일 반가워하실 거 같은데.”
“워낙 어른한테는 예의 바르고 싹싹 놈이니까.”
평소와 같은 시답지 않은 대화가 오갔으나 평소와 다른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친척들이 오자 혁권은 맥주 한 병을 더 갖다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혁권의 할머니는 혁권에게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자, 형제이자, 친구였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놈이 사람 구실 하면서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건 모두 할머니 때문이라고 늘 자랑스럽게 말하던 혁권이었다.
지이잉- 진동 소리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태균이었다.
“어, 여보세요?”
- 도착했냐?
“할머님께 절 올리고 맥주 한잔하고 있다.”
- 아, 시발. 우리 팀장 새끼만 아니었으면 바로 내려가는 건데. 죽어도 반 차를 안 써준다. 내가 이 새끼 꼭 죽이고 만다, 진짜.
“오늘은 누구 죽는다는 말, 농담이라도 하지 말자.”
- 하…. 그래, 미안하다. 혁권이는 어때?
“겉으론 괜찮아.”
- 그 새끼 힘들 때 괜찮은 척하는 거 짜증 나 죽겠어.
“또 죽는다는 말.”
- 아, 아….
“성일이랑은 내일 같이 들리려고?”
- 어. 성일이도 오늘 내려가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지. 내일 올 때 말해.”
- 또 식장 가려고?
“너희 얼굴도 볼 겸 와야지. 혁권이도 걱정되고, 여기 조문객이 너무 없어서 자리 좀 채워야 할 것 같아.”
- 오늘 반 차 못 쓴 대신에 며칠 연차 썼으니까 할머님 보내드리고 술 한잔하자.
“그래, 그러자. 조심히 와라.”
- 이응.
평소라면 적당히 식사한 후 바로 자리를 떴었겠지만 혁권의 상이기도 했고 조문객이 너무 없어 자리를 좀 더 지키다 갈 생각이었다. 혁권이 가져다준 맥주병을 막 까려고 할 때였다.
“역시 무조건 와 있을 거라고 했지? 우리도 일 끝나자마자 바로 온 건데 진짜 빨리 왔네.”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움보다 언제나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사람이 같이 왔을까 하는 두려움이 먼저 느껴졌다.
“안녕, 지훈 오빠.”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어색함이 묻어나는 인사를 하는 그녀였다.
“뭐야, 둘이 최근에 연락했다며, 왜 이렇게 어색해?”
나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으며 쭈뼛거리고 서 있는 혜미에게 어서 와 옆에 앉으라고 손짓하는 경은이었다.
“오랜만에 보네? 아무리 혁권 오빠랑 헤어졌어도 함께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연락 한번을 안 하냐?”
경은이 내가 들고 있는 맥주병을 가져가 자신의 잔을 채웠다.
“야, 너 차 가져 왔잖아.”
“대리 부르면 되지.”
혜미의 걱정을 가볍게 치워내는 경은이었다.
“혁권이 안 불편해?”
장례식장 직원에게 상차림을 부탁하는 손짓을 하고는 맥주를 벌컥 들이켜는 경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불편? 글쎄 1, 2년 사귄 것도 아니고 거의 10년을 사귀었는데, 헤어졌다고 불편하겠어? 아, 오빠랑 혜미는 불편할 수도 있겠네.”
저게 꼭 말을…. 나와 그녀는 악의 없는 경은의 말에 움찔했지만 정작 경은은 신경 쓰지 않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얼마 전에도 할머님이 김치 보내주셨어. 혁권 오빠랑 헤어졌다는 말도 했는데 손녀한테 김치 보내는 거니까 또 떨어지면 말하라고 하시더라. 이런 데 내가 어떻게 안 오겠어? 혁권 오빠 때문에 여길 안 온다고 하면 진짜 미친년이지.”
“야, 말 좀….”
혜미가 툭 치며 주의를 시키었지만, 경은은 직원이 가져다준 국에 밥을 말며 역시나 신경 쓰지 않았다.
“절은 올리고 온 거야?”
“응, 혁권 오빠는 다른 조문객이랑 있어서 사촌 형님이랑 절하고 왔어.”
“잘했네.”
야무지게 밥을 먹던 경은은 조문객과 인사를 나누는 혁권을 힐끗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휴, 딱 보니까 밥도 안 먹었네. 밥심으로 사는 사람이….”
“응?”
“아냐, 맥주나 한 병 더 먹자. 혜미 넌 안 마셔?”
“어? 오늘은 안 당기네.”
“장례식장에서 술맛으로 술을 먹냐. 기다려 봐, 맥주 하나 가져올게.”
“직원분 부를게.”
“됐어. 우리가 손님이냐?”
그게 아니라, 네가 떠나면 둘이 어색해진단 말이야…. 일부러 그랬다는 근거 없는 추측도 들었지만, 일단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자 괜한 답답한 마음이 들어 잔에 남은 맥주를 모두 털어 넘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남자친구야….”
시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또다시 나를 농락한 것이다. 나의 표정을 봤는지 그녀는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니. 남자친구였었어! 헤어진 상태였는데 며칠 전에 연락이 닿아서 어쩌다 다시 연락하다가…. 다시 사귀는 건 아니고! 안 좋게 헤어졌었는데 또 그 애가 오해를 하는 바람에 그냥….”
두서없는 말들로 문장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단어 하나하나만으로도 상황을 판단케 할 수 있었고 또 나를 7년 전 그날처럼 비참하고 처절하게 만들었다. 헤어진 남자친구, 연락, 오해…. 그 세 가지 단어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더 앉아 있을 이유도 없었고 사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잠깐만요.”
그녀도 덩달아 일어나려 했다.
“할머님이 쉬고 계시는 곳이야. 그만하자.”
나의 말에 그녀는 힘없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내가 지나가는 동안 경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혁권을 마주쳤다. 나의 짧은 눈인사에 두 사람 모두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나를 보내주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저들의 태도가 또다시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맡기 싫은 지독한 향기를 강제로 맡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떠올리기 싫었던, 잊고 싶었던 향기가 내 몸속으로 퍼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괜찮으세요?”
자리에 앉으며 한우주 주임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얼른 미소를 지었다.
“멀쩡합니다.”
“치맥 약속도 미루고, 그제랑 어제는 퇴근하고 바로 사라지시고…. 무슨 일 있으세요?”
평소라면 사적인 이야기라 말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름 친해졌다고 느끼는 한우주 주임이었기에 망설이다가 답해주었다.
“친구 할머님이 돌아가셨거든요. 부모님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란 친구라 며칠 장례식장에 있었어요.”
물론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 죄송해요.”
한우주 주임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의아했다.
“네? 뭐가요?”
“그것도 모르고 한가롭게 치맥 이야기나 하다니….”
“모르고 그런 건데요 뭘. 평소랑 같았습니다.”
“평소에 철이 너무 없었네요.”
“그걸 이제야-”
“네?”
“아닙니다. 아무튼, 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틀을 장례식장에 계셨으면 오늘 발인 아니에요? 친한 친구 같은데 안 가보셔도 돼요?”
이십 대 중반, 갓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병아리 같은 사람에게 발인이라는 단어를 듣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러긴 하는데…. 오늘 김민지 대리도 휴가고, 일도 바빠서 휴가 쓰기가 그랬어요. 이틀이나 왔으니 친구도 그만 오라고 하더라고요.”
“아…. 진짜 친한 친구인가 보네요.”
“근데 우주 주임님은 발인을 어떻게 아세요? 그 나이 때 장례식 문화를 알기 어려울 텐데.”
“아…. 장례를 치른 적이 있거든요.”
한우주 주임의 미소에 슬픔이 묻어나오는 것을 보고, 더는 묻지 않는 게 좋다는 본능이 확 들었다.
“이번 주는 아마 바쁠 것 같으니 치맥은 김민지 대리님과 먼저 드세요.”
“에이, 그래도 주임님 빼고 어떻게 그래요.”
“잘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올…. 저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쓸데없는 잡담이 오가던 중 외근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고선미 팀장을 발견하고는 얼른 일어나 인사를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한우주 주임도 센스 있게 같이 인사를 하자, 지친 와중에도 고선미 팀장은 손짓하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고생들 했어. 과장님이랑 실장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어?”
“넵, 점심까지 밖에서 드시고 오신답니다.”
“그래? 다행이네. 오늘 점심은 편하게 먹겠다.”
“하하핫….”
고선미 팀장의 말에 어색한 리액션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바로 나가봐야 해서 둘이서 편하게 식사해.”
“어잌후, 무슨 그런 섭섭하신 말씀을! 팀장님이랑 자주 식사를 하지 못해 만날 아쉬웠답니다.”
반자동으로 리액션이 얼른 튀어나오면서도 한우주 주임에게도 서둘러 눈짓을 하였다.
“네? 아, 네, 네. 그럼요. 팀장님이 점심이라도 같이 드시고 가시죠.”
“하하, 아이고, 말만이라도 고맙네. 근데 진짜 바로 나가봐야 해. 아래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거든. 근데 저긴 왜 휴가래?”
웃으면서 말하던 고선미 팀장이 비어있는 김민지 대리의 자리를 턱짓으로 가리키자, 한우주 주임이 대답해 주었다.
“친한 친구가 결혼한다고 결혼 준비 도와준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 슬슬 결혼할 나이대긴 하지. 김민지 대리도 어서 가야 할 텐데…. 에고, 전화 온다. 나갔다 올게! 점심 맛있게들 먹어!”
고선미 팀장이 서둘러 짐을 챙겨 나가자, 또다시 사무실엔 나와 한우주 주임만 남았다.
“저희도 점심 먹고 올까요?”
“좋아요!”
먹는 이야기에 한우주 주임이 방긋 웃었다.
“메뉴는…. 청국장?”
“아….”
한우주 주임이 정색을 하자, 서둘러 농담임을 알려주었다.
“우주 주임님이 먹고 싶은 거로 드시죠.”
“삼겹살?”
“매력적이긴 한데 업무 중이니 참으시죠. 냄새 진동하고 다니면 선임들 눈치에 체합니다.”
“돈가스?”
“돼지가 당기시나 보네요. 돈가스 가시죠.”
“저기 새로 오픈한 곳이 있더라고요.”
“모험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우주 주임 말을 따르겠습니다.”
“올….”
회사에서 막내라는 신분은 아무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럴 때만이라도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주자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