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상황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누군가의 신고로 온 경찰은 사람들을 해산시켰고 남자를 잡아갔다. 그녀 또한, 진술하기 위해 경찰과 함께 떠나기 전 나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모른척해 줘.”
그 말에 화가 났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나 또한 경찰에 끌려갈 것 같아서 그냥 한숨만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아차 싶어 서둘러 고개를 돌려 서율씨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그 자린…. 비어있었다.
“하…. 미친 새끼….”
제 복을 자기가 찬 것이다.
택시를 타고 집 앞 편의점에서 내렸다. 감정에 휩쓸려 술 마시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술을 마셔야 잠을 잘 것 같았다. 다 먹지도 못할 양이었지만 소주가 넉넉히 든 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한 모퉁이면 돌면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옆 골목길에서 또다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못 믿어? 못 믿어서 기어코 여기까지 쫓아 온 거야?”
“쫓아오다니?! 남자친구가 여자친구 집에 온 게 잘못이야?!”
“남자친구로 왔으면 남자친구답게 있었어야지! 화장실이며, 침대, 화장대, 찬장까지! 대체 뭘 찾고 싶은 건데?! 뭘 찾길래 내 눈치 보면서 몰래 쥐새끼처럼 뒤지냔 말이야?!”
“뭐? 쥐새끼?”
오늘은…. 그냥 이런 날이었나 싶었다. 그 재미난 개꿀잼 싸움 구경이 두 번이나 눈앞에 펼쳐졌지만…. 두 번 다 눈에 담긴 힘든 싸움이었다.
“손은 올리지 마세요.”
나의 말에 남자는 뜬금없이 등장한 낯선 나보다 자신이 올린 손을 보며 더 크게 당황했다.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손을 내린 남자는 눈앞에 눈물과 원망이 가득한 눈을 한 여자를 보고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방금 건…. 미안하다.”
“방금…. 건? 흥분을 가라앉혀도…. 아까까지의 일들은 기어코 너의 잘못이라 생각 안 하는구나?”
“나만 나쁜 놈 만들지 마. 너도 똑같잖아.”
“나 가봐도 되죠?”
말없이 그냥 가는 것도 이상해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용케 내 말을 들은 듯했다.
“같이 가요, 주임님.”
어두운 골목에서 싸우고 있던 건 한우주 주임이었다. 한우주 주임이 그 남자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떼자, 남자는 잠깐 인상을 쓰며 생각하더니 곧이어 인상을 쓰며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당신이 박지훈 주임입니까?”
“뭐, 뭐 하는 거야?!”
한우주 주임이 놀라 남자를 말렸지만, 남자는 한우주 주임을 뿌리치며 말했다.
“직장 상사면 상사답게 회사에서나 볼 일이지, 뭔데 애인 있는 여자를 데리고 밥 먹고, 술 먹고 뭐 하는 짓입니까?”
“강상훈!”
한우주 주임의 고함에 강상훈이란 남자는 한우주 주임을 노려봤다.
두 사람 문제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구나…. 강상훈이라는 남자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고, 이 상황이 기분 나쁘긴 하지만…. 그래도 이해는 갔다. 나 또한 저랬던 때가 있었기에….
“미안합니다.”
“주임님?! 주임님이 뭐가 미안해요?”
나의 말에 본인이 더 화가 난 한우주 주임이었지만 나는 말없이 손을 들어 한우주 주임을 말렸다.
“처음 봤지만, 그쪽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당신이 뭔데-”
“나도 그랬었거든요.”
“?!”
“나와 나의 여자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끼면서 사이가 멀어지고…. 진실이 거짓말처럼, 거짓말이 진실처럼 들렸고…. 또 웃기게 그럴 땐 주변에서 더욱 나를 흔들어요. 간신히 서 있는 것도 벅찬데 말이죠.”
강상훈이란 남자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한우주 주임을 사랑하나요?”
“다, 당연히-”
“그럼 한우주 주임을 믿으세요. 아니, 진짜 사랑하면 믿음이라는 말도 우습게 느껴질 거예요. 한우주 주임을 사랑한다면 그냥 한우주 주임을 더 사랑해줘요.”
“주임님….”
“믿어서 사랑하게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소개팅은 잘 안 됐어요?”
“보통은 ‘잘 됐어요?’라고 묻지 않나요.”
“아차차….”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내가 산 소주를 한우주 주임과 나눠마셨다. 강상훈이란 남자는 나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한우주 주임도 그런 남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그냥 내가 미친 새끼였어요.”
“네?”
“하…. 김민지 대리님 얼굴을 어떻게 보죠….”
“일단 치맥 사세요.”
“한우주 주임이 먹고 싶은 건 아니죠?”
“소주만 먹으려니 갑자기 땡기긴 했는데…. 근데 과자 같은 거라도 좀 사시지.”
“저기요?”
“아차차….”
“미안합니다.”
“어휴, 아닙니다. 신입 나부랭이가 감히 술 얻어먹으면서 안주나 찾다니…. 제가 죽일 년-”
“아니, 그거 말고.”
“네?”
“어찌 됐든 제가 한우주 주임 연애 문제에 껴있는 거잖아요.”
“아…. 그거라면 제가 더 죄송합니다. 제 연애 문제에 끼시게 해서….”
“그럼 퉁 칩시다.”
“건배할까요?”
집에서 마실 요량으로 샀던 소주였기에 컵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소주병 하나씩을 들고 ‘짠’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병을 부딪치자, 웃음이 났다. 나의 웃음에 한우주 주임도 뭐가 재미있는지 따라 웃었다.
“참 오늘 하루 다사다난하고 기네요.”
“그래도 마지막에 웃었으니 좋은 날일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요.”
“근데 아까 그거 누가 한 말이에요?”
“어떤 거요?”
“믿어서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 거라고 한 거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 있어요.”
“오, 제목이 뭐에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라는 영화에요”
“처음 들어보네요?”
“옛날 영화라 한우주 주임은 모를 수 있어요.”
“음…. 주임님이 재밌다고 하니까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나에게 주말은, 아니 보통 사람들에게 주말은 눈 몇 번 깜빡이면 사라지는 요일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번 주말은 하루가 일 년 같이 흘러갔다. 서율씨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을 했었고, 경찰과 함께 떠난 그녀에게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또 김민지 대리에게 월요일에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해결해야 할 결전의 날이 왔다. 월요일 아침 원래도 일찍 출근했지만, 평소보다도 더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김민지 대리와 둘만 있을 시간이 많이 없었기에 억지로라도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진짜 일찍 나오셨네요?”
김민지 대리도 평소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먼저 와 있는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아…. 그게….”
뭐라고 말하지? 제가 서율씨에게 무례를…. 아니지, 대리님께서 생각해 주셨는데 은혜를 원수로….
“서율이랑 잘 안됐다면서요?”
나의 밤샘 고민을 김민지 대리는 시원하게 날려 보냈다.
“네? 아, 네….”
“그래도 주임님 칭찬은 많이 하더라고요. 그러면 좀 잘해보지….”
“그, 그게….”
“어쩔 수 없잖아요.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아직 솔로인 친구들 더 있으니까 기다려 봐요.”
“아, 아뇨. 소개팅은 이제 괜찮아요.”
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왜요? 제 친구가 별로였나요?”
장난스러운 물음이었지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닙니다! 서율씨는 진짜 예쁘고, 성격도 좋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다만….”
필사적으로 변명하다가 그냥 그런 내 모습이 꼴 보기 싫어졌다.
“그냥 제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나 봐요. 준비가 다 될 때 제가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김민지 대리는 잠시 갸웃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준비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근데 대리님은 남자친구 없으세요?”
“저도 솔로입니다…. 하하하….”
“어…. 그럼 저도 소개팅 주선해 볼까요?”
내 말에 김민지 대리의 눈이 번뜩이는 게 느껴졌다.
“사실 주임님 소개팅 성공하면 부탁드릴까 했었는데 헤헤….”
알면 알수록 새로운 면이 보이는 김민지 대리였다. 사무실의 모습만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할 사람이라고는 절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럼 저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사실 인맥이 넓은 편은 아니었기에 곧바로 솔로인 남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김민지 대리에게 모지리 같은 내 친구를 소개해 줄 수는 없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공문 작성해 봤는데 한 번 봐주실 수 있으세요?”
빼꼼 고개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묻는 한우주 주임의 말에 모니터에서 천천히 눈을 떼며 말했다.
“어디 봐요.”
눈이 부었네. 온종일 운 건가? 이렇게 깡 좋고 당차던 여자가 눈이 부을 정도로 울었다니 마음이 불편했다.
“한우주 주임, 그런 건 이제 김민지 대리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오랜만에 내근하고 있던 고선미 팀장의 말에 나와 한우주 주임은 당황하며 슬쩍 김민지 대리의 눈치를 봤다.
“민지 대리 교육도 끝나 바쁜 일도 끝났으니까, 신입 직원 좀 챙겼으면 좋겠는데.”
갑작스러운 고선미 팀장의 직격탄에 김민지 대리도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다.
“실장님이랑 과장님께서 지시한 일인데요.”
오우 MZ….
“그건 민지 대리가 그동안 바빴으니까. 이젠 아니잖아?”
김민지 대리의 표정이 급속히 굳어졌지만 고선미 팀장의 표정은 평온한 상태 그대로였다. 저것이 바로 연륜인가…?
“알겠습니다. 한우주 주임님, 10분만 있다가 알려 드릴게요. 괜찮을까요?”
“네? 아, 네네. 괜찮습니닷!”
직장 상사의 정당한 업무 지시였기에 김민지 대리는 여전히 좋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우주 주임에게 불똥이 안 튀었다는 것이다. 고선미 팀장은 김민지 대리가 못마땅한 듯 한동안 김민지 대리를 쳐다봤지만 바쁜 고선미 팀장에게는 그 또한 사치였기에 얼른 다시 업무에 집중하였다.
- 김민지 대리: 죄송해요. 제 할 일이 맞기도 하고, 지훈 주임님한테 일을 계속 떠맡기려는 건 아니었어요.
김민지 대리의 메신저에 난감했다. 평소 김민지 대리를 알았기에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 김민지 대리: 근데 팀장님은 항상 저한테만 저러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좋게 말하면 될 일이었는데 굳이 다 듣는 곳에서 저러는지….
- 박지훈 주임: 팀장님이 오늘 좀 예민하신 것 같네요.
고선미 팀장이나 김민지 대리 둘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둘은 섞이지 않았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이미 두 사람 사이에 큰소리가 오갈 정도로 한바탕했다는 말을 차명환 과장에게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 다 기가 센 편이기도 했고 업무적으로 팀에 희생을 바라는 고선미 팀장의 업무 스타일과 공과 사를 구별하려는 김민지 대리의 업무 스타일이 부딪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마찰이었을 것이다.
- 김민지 대리: 이런 일로 주임님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 박지훈 주임: 아닙니다.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치맥이나 하면서 스트레스 푸시죠, 하하핫.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힐끗 한우주 주임을 바라봤다.
“숨 쉬어도 돼요.”
부은 두 눈을 놀란 듯 동그랗게 뜬 채로 모니터 보는 척하던 한우주 주임은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 한우주 주임: 저 어떡해요?
- 박지훈 주임: 일하러 왔으니 일해야죠.
- 한우주 주임: 그냥 주임님한테 배우면 안 돼요? 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 박지훈 주임: 지금 들숨 날숨 쉬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고선미 팀장님의 지시니까 일단은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한우주 주임: 저 버리시는 거 아니죠?
- 박지훈 주임: 원래 제 일이 아니긴 했는데….
- 한우주 주임: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하세요.
- 박지훈 주임: 저도 잡혀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