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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나'의 이야기
작가 : 쉼표
작품등록일 : 2024.6.7

매일 상상만 하던 헤어진 첫사랑에게 연락이 왔다!
평범한 일상을 꿈꾸는 평범한 지훈의 소소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13화. 좋은 여자 그리고... 최악의 남자
작성일 : 24-07-09 08:23     조회 : 10     추천 : 0     분량 : 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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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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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내가 간절히 원해서한 소개팅도 아니었고 그녀와의 마지막 문자 연락 때문에 서율씨를 만나는 것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만나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심장은 하루하루 더 빠르게 뛰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닌척해도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긴 했었나 보다.

 “자요, 꼭 깨끗이 세수하고 써야 해요.”

 내일 있을 만남에 자신이 아끼는 마스크팩을 받아 가라는 한우주 주임의 언성에 못 이기는 척 한우주 주임 현관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이 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깨끗이 세수하라는 한우주 주임의 말이 더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세수와 손발을 씻는 데 3분도 안 걸리는….

 “오늘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더니, 어째 더 안 좋아진 것 같네요?”

 안 그래도 하얀 피부를 가진 한우주 주임의 얼굴은 뱀파이어 마냥 창백해져 있었다.

 “저녁 먹은 게 체했나 봐요.”

 “평소 식습관을 생각하면 당연한 거긴 한데….”

 “네?”

 “아뇨, 아뇨. 약은 먹었어요?”

 “네, 마침 딱 한 개 남았더라고요.”

 “음…. 필요하면 말해요. 집에 소화제가 있거든요.”

 “주임님이 소화제를 드실 일이 있으세요?”

 “네?”

 “아뇨, 아뇨. 필요하면 연락드릴게요. 내일 소개팅 잘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닫으려는 한우주 주임에게 머뭇거리다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

 “약 먹었으니까….”

 “예?”

 한우주 주임이 현관문을 다시 열고 나를 바라봤다.

 “그…. 약 먹었으니까, 오늘은 마시지 말라고요….”

 내 눈길이 향하는 곳을 한우주 주임도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현관 쪽에 쌓인 술병을 보고는 아차 싶은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쓰레기 버리는 게 귀찮아서 미루다 보니…. 하하….”

 “분리수거는 꼭 하세요.”

 “지구를 사랑한답니다.”

 어색한 농담을 끝내고 계단을 오르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남자친구와 사이가 점점 안 좋아진다는 걸 얼핏 듣긴 했다. 치맥을 먹은 뒤로 부쩍 김민지 대리와 친해진 한우주 주임은 김민지 대리만 만나면 남자친구에 대해 상담을 나누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 탕비실에서 김민지 대리 앞에서 울고 있는 한우주 주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김민지 대리가 한우주 주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나에게 모른척하라는 눈짓을 하자, 순순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사실 아는 척하는 것도 이상했을 것이다. 김민지 대리는 나중에 따로 나에게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고 웃으며 농담을 했지만, 평소만큼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 웃음 때문에 김민지 대리가 한우주 주임을 얼마나 아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얼마나 한우주 주임의 상황이 안 좋은지 알 수 있었다.

 “모르겠다. 일단 내 앞가림부터 잘해보자.”

 

 봄이 상륙하기 직전의 계절이었지만 여전히 쌀쌀했다. 커피숍 안에서 약속을 잡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율씨를 기다렸다. 처음 출근하는 신입 직원 마냥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었다. 평소 세수할 때만 보던 거울도 집에서 나오기 직전까지 수십 번을 바라봤다. 섬유유연제에서 벗어나 아끼던 향수도 뿌렸고, 안 하던 왁스를 바르며 머리 세팅도 했다. 면도도 평소보다 더 꼼꼼히 했고 외투부터 속옷까지 제일 좋은 거로 입었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준비했었지만, 막상 자리에 나오니 왜 이렇게 부족해 보이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오후 6시 30분에 보기 했으니 아직 20분도 넘게 남았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보다 화장실에 들러 다시 거울 좀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부드럽고 낮은 음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일찍 나오셨네요?”

 체크무늬 재킷을 걸친 여자가 목도리를 풀며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민서율입니다.”

 쌍꺼풀이 없는 예쁜 눈에 눈웃음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키는 조금 큰 편이었고 마른 체형의….

 “아, 아! 박지훈입니다.”

 손을 내민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를 보며 눈짓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앉으세요. 마실 건 어떤 거로?”

 “어…. 뭐 드시고 계셨어요?”

 “전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저도 같은 거로 마실게요.”

 

 대화는 생각보다 끊이지 않고 잘 이어져 나갔다. 서로의 직장 이야기, 취미, 관심사 등등 오히려 첫 만남은 사실 의지만 있다면 이야기할 건 많았다. 다만 가벼운 소재가 떨어졌을 때가 문제였지만 말이다.

 서율씨는 본인이 말했던 대로 먹는 것에 취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초밥을 많이 먹지 못했다.

 “여기 추천해 주실 만한데요? 정말 맛있어요. 오랜만에 이렇게 많이 먹어봐요.”

 아직 먹을 준비운동을 막 끝낸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듯 젓가락을 내려놓는 서율씨를 보며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으려는 나를 보며 서율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더 드세요. 전 이제 맥주 마시려고요.”

 “오?”

 그 말과 함께 진짜로 병맥주를 시키는 서율씨를 보며 감동 먹을 뻔했다.

 “한 잔 드릴까요?”

 “조, 좋죠.”

 맥주를 따라주는 서율씨를 보며 물었다.

 “술은 좀 드세요?”

 “그냥 가볍게 즐길 정도로만 마셔요.”

 엄청난 고수가 아니면 술찌인데….

 

 그냥 술찌였다. 내 젓가락질이 서너 번도 왔다 갔다 하기 전에 서율씨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네, 네?”

 갑작스러운 꽉 찬 직구에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연락 주고받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 그게 아니라 소개팅이 오랜만이라 긴장됐나 봐요. 서율씨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의 말에도 말없이 나를 지긋이 바라만 보는 서율씨를 보며 다시 황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대화나 행동 하나하나에 배려심이 느껴지고 어떨 땐 먼저 리드하는 모습도 멋졌어요. 그리고 얼굴도 예쁘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래도 서율씨의 표정을 무표정에서 피식 웃게 만드는 거로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

 “좋은 여자고 예쁜 여자라면서요.”

 “그…. 렇죠?”

 “근데 연락 주고받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즐거워 보이지 않으세요. 마음에 안 든 게 아니면…. 다른 분이 마음 안에 있는 건가요?”

 서율씨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신의 빈 잔에 남은 맥주를 따르며 서율씨가 웃으며 말했다.

 “외로워서 소개팅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잊으려고 소개팅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게….”

 소개팅을 받는 순간부터 이 찝찝한 마음이 뭔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서율씨가 나에게 정답을 알려준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일부러 노리고 한 건 아니었지만…. 듣고 보니 서율씨 말이 맞아요. 미안합니다.”

 “사과하는 남자, 멋있긴 한데 그래도 미안해할 건 없죠. 어찌 됐든 좋은 인연이 시작될 수 있다면 무슨 마음이었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맥주를 들이켠 서율씨가 살짝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아직 지훈씨의 마음에 단단히 박힌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좋은 인연의 시작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너무나 멋진 여자였다. 이 좋은 사람을 놓치기 아깝다는 욕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서율씨의 말처럼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럴 자격이 없었다, 나에게는.

 “그만 일어날까요.”

 “좋아요. 오늘 식사는 제가 계산할게요.”

 “네? 그럴 순 없죠. 제가-”

 “쉿.”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는 서율씨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샀으니, 다음엔 지훈씨가 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좋은 인연으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밥 사주세요.”

 

 밖의 찬 바람을 쐬자, 술이 깨기 시작한 듯 서율씨의 얼굴의 홍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걷는 내내 대화 한마디가 없었지만, 아까까지 끊이질 않고 대화했던 시간보다 편하게 느껴졌다.

 “역시 토요일이라 사람이 많네요. 택시가 잡힐지 모르겠어요.”

 자연스레 말을 건넨 서율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저기 사거리만 건너면….”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려던 곳은 사람들의 인파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봐요.”

 남자의 고함이 들리자, 서율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평소라면 개꿀잼 싸움 구경을 하러 갔겠지만 서율씨를 그런 곳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싸움 난 것 같네요. 그냥 가시죠.”

 “네? 그래도….”

 “위험해요. 그냥 가요.”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나도 모르게 서율씨의 팔목을 가볍게 잡고 앞서 걸었다. 인파를 뚫으며 헤쳐 나가자, 서율씨는 순순히 나를 따라와 주었다.

 “첫 스킨쉽 치고 너무 투박하네요.”

 “네? 아!”

 내가 놀라 손을 놓으려고 하자, 서율씨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 놓으면 저 잃어버려요.”

 “더 꽉 잡아야겠네요. 잠깐 지나갈게요.”

 “오해라니까, 오빠!”

 인파를 거의 다 뚫었을 때쯤, 인파 안에서 들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싸움의 대상이 남자 대 남자가 아니라, 남자 대 여자라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사실 그것보다 더 신경이 쓰인 건….

 “지훈씨?”

 거의 다 지났던 인파 속으로 나도 모르게 다시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서율씨의 팔목은 놓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서 하면서도 서율씨는 이번에도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잠깐만요.”

 인파 속 가운데로 들어가자, 옥타곤의 철장처럼 사람들은 싸움의 무대를 둥그렇게 만들어 주듯 서 있었다.

 “꺅!”

 남자가 여자를 밀쳐도, 여자가 비명을 질러도, 여자가 바닥에 넘어져도…. 웅성웅성 거릴 뿐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지훈씨….”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겁을 먹은 듯 이번엔 서율씨가 다른 손으로 나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떨고 있는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씨발, 오해는 무슨 오해?! 딴 새끼를 있는 걸 방금 내가 봤는데, 그 딴말이 나와?!”

 바닥에 넘어진 그녀를 향해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분에 풀리지 않은 듯 다시 한번 욕지거리했다.

 “야, 여자가 바람피웠나 보다.”

 “나쁜 년이네.”

 “그래도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재미난 소재에 신이 났다. 위험한 상황임을 인지했음에도 자신에게 벌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서운 놀이기구나 스릴러 영화를 즐기는 것처럼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만 가요.”

 나의 표정이 굳어진 걸 알아챈 서율씨가 아까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서 신고할게요.”

 왠지 모르게 나를 붙잡은 손이 더 세게 쥐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나는 나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나에게서 떼어놓았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여자는 분명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여자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만큼 최악인 남자는 없었으나…. 나는 오늘 최악의 남자가 되길 원했다.

 나를 붙잡은 서율씨의 손을 떼어낸 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꽉 붙잡았던 나의 손도 천천히 힘을 풀어 놓아주었다.

 “지훈...씨?”

 나의 말, 표정, 행동…. 어느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의 마음에 박혔던 사람이에요. 아직도 저 사람을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제야 이해가 간 듯 서율씨는 자신의 두 손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여자는 분명 좋은 여자였다. 이 여자는 순순히 나를 최악의 남자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가세요.”

 

 “이, 씨발!”

 자신을 노려보며 손을 들어 올리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겁에 질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음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든 걸 포기하고 두 눈을 감으려던 순간 남자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또 다른 남자를 발견했다.

 긴가민가했다. 위험한 상황에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지훈…. 오빠?”

 지훈은 재킷을 벗으며 무심하게 그 남자를 지나쳐 그녀에게 왔다. 짧은 치마를 입고 넘어진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재킷으로 가려주었다. 걱정보다는 분노로 가득 찬 낯선 눈을 본 그녀는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부축하며 자리에서 그녀가 일어나자, 뒤에서 남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넌 뭐야, 개새끼야?!”

 그런 남자를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등지며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모른척할까…. 아니면 기다려 줄까…. 그것도 아니면 죽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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