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고 나오자, 기운이 쭉 빠진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나의 과거에 멋대로 한우주 주임을 끼워 맞춘 것 같아 여간 찝찝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쿨한 그녀답게 나의 말에도 별다른 내색은 않았지만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튼, 연락은 빨리해보세요, 김민지 대리님한테 언제 연락할 거 같냐고 카톡 왔었거든요.’
한우주 주임의 마지막 말이 떠오르자, 나는 다시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 박지훈: 안녕하세요. 김민지 대리님 소개로 연락드리게 된 박지훈입니다.
뭔가 덧없다는 기분이 들자, 의외로 가볍게 문자가 잘 써지는 듯했다. 카톡을 보낸 뒤 밥 먹을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진동이 울렸다.
- 민서율: 안녕하세요! 민서율이라고 합니다.^^
이모티콘과 함께 문자에서 밝은 기운이 느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박지훈: 연락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 민서율: 아뇨, 괜찮아요. 바쁘셨을 텐데 괜히 제가 미안하네요.
- 박지훈: 그럼 서로 미안한 마음은 퉁치시죠.
- 민서율: ㅋㅋㅋㅋㅋ 그럴까요?
- 박지훈: 식사는 하셨나요?
- 민서율: 아직이요. 퇴근을 아직 못했거든요….
- 박지훈: 저런….
- 민서율: 식사하셨어요?
- 박지훈: 전 이제 먹으려고요.
- 민서율: 배고프시겠다. 얼른 드세요!
- 박지훈: 퇴근하고 식사하시려면 저보다 더 배고프실 거 같은데 ㅠ
- 민서율: 저녁을 잘 안 먹어서 괜찮아요.
응? 저녁을 잘 안 먹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예상치 못한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얼른 다시 연락을 보냈다.
- 박지훈: 몸 관리하세요?
- 민서율: 아뇨.ㅋㅋ 원래 먹는 양이 좀 적어요.
- 박지훈: 아하…. 좋아하는 음식 있으세요?
- 민서율: 음…. 가리는 건 없긴 한데 딱히 뭘 좋아하지도 않아요.
- 박지훈: 아, 그러시군요.
에반데…. 먹는 낙으로 사는 나에게는 아주 큰 이슈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분위기로 연락을 마무리한 뒤 밥을 먹으며 혼자 고민에 빠졌다.
“먹는데 취미가 없는 여자라…. 그래도 얼굴은 봐봐야겠지?”
“연락은 해보셨어요?”
나의 아침 인사를 대충 받는 둥 둥 마는 둥 하면서 안 어울리게 음흉하게 웃으며 묻는 김민지 대리였다. 자신이 소개해준 친구였기에 이미 소식을 모를 리 없는 것만 굳이 묻는 이유는 이 재미난 가십거리를 참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네네.”
어색하게 웃으며 답하자, 더욱 짙은 미소를 짓는 김민지 대리였다.
“서율이 어때요?”
“어제 하루 대화해 봤는걸요.”
“에이, 그래도 느낌이란 게 있잖아요.”
“지금까지는 좋습니다. 하하핫.”
“만나기로는 했어요?”
“아직이요. 이번 주는 바쁘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맞다. 회사에 무슨 일이 있다고 했던 것 같네요.”
혹여나 내가 오해할까 봐 서둘러 맞장구쳐주는 김민지 대리였다.
“안녕하세요.”
예전 지각 사건 이후 한우주 주임은 나와 김민지 대리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제 회사에서 일찍 출근하는 맴버 중 한 명이 되어버렸다.
“연락은 잘하셨어요?”
어제 나름 어색한 사건이 있었지만, 평소와 같이 말을 거는 한우주 주임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네네.”
“어때요?”
“뭐 그냥….”
“흠…. 반응이 영….”
한우주 주임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김민지 대리를 바라보자, 김민지 대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생각보다 눈이 높으신 모양이에요.”
“아, 아닙니다, 그런 거.”
당황한 내가 허둥거리며 말하자, 김민지 대리도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눈이 낮아서 내 친구를 만난다는 건가요?”
어라? 저 양반이 이렇게 장난도 치는 사람이었나? 한우주 주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 보지 못했던 김민지 대리의 장난에 조금 놀랐다. 치맥이 이렇게까지 위대한 것일 줄이야….
“이제 다른 분들 오실 것 같으니 그만하시죠, 하하하….”
“아쉽네요.”
김민지 대리는 정말 아쉬운 듯했지만, 다른 회사 사람들에게 괜히 가십거리를 주기 싫은 듯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한우주 주임도 자리에 앉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은 듯 자리에 앉으며 속삭이며 말했다.
“연락은 계속하고 있는 거죠?”
“이제 연락하려고요.”
“얼른 하세요!”
“쉿, 과장님 오시네요.”
사실 연애를 오래 쉬어서 연애에 대한 세포가 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뭔가 멜랑꼴리한 이 기분이 반가웠다. 상대가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연애를 목적으로 소개를 받은 이성과의 대화가 죽었다고 생각한 연애 세포들이 다시 생기가 도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이 느껴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공통된 대화 주제가 없어서 말의 흐름이 자꾸 끊긴다는 점이었다. 내가 스킬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애초에 대화의 주제가 맞지 않으니 어떨 땐 억지로 궁금한 척, 공감 가는 척하며 간신히 대화 주제를 이어가야 했다. 해본 적도 없는 주식 이야기에 급하게 유튜브 요약본 동영상으로 공부를 했고, 내가 좋아하는 먹는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인 게 느껴졌고, 외모 또한 나쁘지 않았다.
- 박지훈: 그러면 주말에 시간 괜찮으시면 볼까요?
어느 정도 겉치레 대화가 끝날 무렵 묻는 나의 물음에 민서율씨의 답장은 잠시 오지 않았다.
- 민서율: 네, 좋아요.^^
민서율씨의 수락에 안도 대신 걱정이 먼저 들었다. 먹는데 취미가 없는 사람과 무엇을 해야 하지?
- 민서율: 저번에 말씀하신 맛집 데려가 주세요! 검색해 봤는데 분위기도 괜찮고 좋아 보이던데요?
연락을 주고받는 내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사실 민서율씨 또한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 잘 느껴졌었다. 센스 있게 장소 또한 먼저 정해주면서 상대방이 좋아하고 칭찬했던 주제를 먼저 언급해주었다. 이래서 자연스레 좋은 사람인 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 드디어 만나기로 하셨네요?”
퇴근길 버스 안에서 내 핸드폰을 훔쳐보던 한우주 주임은 ‘오~’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매너좀요.”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다시 고개를 들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한우주 주임이었다.
“어디서 만나요?”
“일식집이요.”
“음식 가리는 게 많다면서요?”
“그나마 초밥을 좋아한대요.”
“엊그제부터 공부하던 주식은 마스터 된 건가요?”
나 혼자 과몰입해서 한우주 주임을 밀어냈던 게 미안해, 요 며칠 동안 민서율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상담을 받았었다. 한우주 주임의 욕구충족이 대부분이긴 했으나, 나름 쓸만한 피드백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아뇨, 포기했어요.”
“앗….”
“역시나 전 그냥 적금이나 드는 거로 만족해야겠어요.”
“나중에 그분한테 가르쳐달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죠.”
“올….”
“편의점 좀 들렀다 갈게요.”
“도시락 사게요?”
“아뇨, 맥주 좀 사려고…. 하하….”
어색하게 웃는 한우주 주임의 얼굴은 그동안 알고 지냈던 모습과는 달랐다. 실수도 많이 하고 철없는 동생 같았지만, 언제나 자신감과 철면피를 가진 사람이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 갔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날 업무에 방해될 정도로 마시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렇게 만날 술이라니….
“남자친구와는 아직 그래요?”
포괄적이지만 함축적인 물음에 한우주 주임은 억지로 미소 지어주며 말했다.
“아뇨…. 더 악화됐습니다. 하하….”
“만나서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텐데….”
“그러게요. 그런데 서로 직장 때문에….”
20대였다면 핑계라고 말했겠지만, 사회에 찌들기 시작한 30대인 나는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었다. 당장 회사를 내팽개치고 연인에게 뛰어간다? 불확실한 연인과의 관계회복보다 확실한 고난의 직장생활이 더 피부로 느껴진다. 특히 오래된 연인일수록 그렇다.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란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을 것이다.
“제 연애상담보다 한우주 주임 연애상담이 더 시급한 것 같네요.”
집에 들어와 씻고 나와 밥 먹을 준비하며 민서율씨와의 만날 약속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진수성찬은 아니었으나, 어제 시켜 먹고 남은 찜닭에 햇반을 데워먹는 나름 호화스러운 밥상이었다.
“그럼 토요일 저녁 여섯 시 반쯤에….”
지잉-
문자를 쓰던 중 울리는 진동 소리에 순간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 정혜미: 오빠, 뭐해?
그 한마디에 즐거웠던 연애 세포도, 식욕에 돋던 입맛도 사라져버렸다. 나도 그녀와 무슨 생각, 무슨 감정으로 연락을 주고받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 확실한 건…. 민서율씨와 토요일에 만나려면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박지훈: 주말에 소개팅하러 나갈 준비 하고 있었어.
나의 문자를 바로 봤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의 답장은 한참이나 오지 않았다. 햇반과 찜닭이 식어갔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상황이 마무리되어야만 목구멍에 뭐라도 삼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정혜미: 소개팅 나가는구나….^^ 근데 혹시 괜찮으면 잠깐 볼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녀의 문자를 바로 확인했지만, 잠시 동안 답장을 쓰지 못했다.
- 박지훈: 아니. 안될 것 같아.
그녀에게 이런 단호한 대답을 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 정혜미: 그래, 알았어.^^ 소개팅 잘해, 떨지 말고!
그녀의 응원은 찜찜함만 남겼다. 이미 돌린 햇반은 봉지에 싸서 냉동실에 넣었고 찜닭은 다시 보관하기가 그래서 꾸역꾸역 몇 조각 입에 쑤셔 넣었다.
- 민서율: 그럼 저희 토요일에 여섯 시쯤 볼까요?
아차…. 또 그녀에게 휩쓸려 중요한 것을 놓칠 뻔했다.
- 박지훈: 네, 좋아요! 그때 봬요.
“하…. 나 뭐 하고 있냐….”
자조 섞인 한숨에 찜닭도 들어가지 않았다. 맥주로 대충 때워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었지만 늘 냉장고를 차지하던 터줏대감과 같던 맥주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되는 게 없네.”
편의점이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다시 나가기는 매우 귀찮았다. 순간 한우주 주임이 사 갔던 맥주가 떠오르긴 했지만, 맥주를 빌리려면 또 긴 연애상담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냥 단념했다.
“그냥 잠이나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