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치킨과 피자를 막타를 친 혁권은 음식을 먹는 내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흘낏거렸다. 귀찮아서 계속 모른척했지만, 혁권은 더는 참지 못했는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정혜미 다시 만난다 길래 정수리에 엘보 꼽으러 왔는데…. 이게 뭐람?”
“뭐가?”
“벌써 집에서 밥도 먹고 그런 사이야?”
“직장 후임이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수건도 들고 있던데?”
“그냥 보일러 고장 나서 온 김에 세수만 하고 갔어.”
“세수만?”
“손발도 씻었다는데 3분도 안 걸린 거로 봐선 세수만 한 거 같아.”
“뭐?”
“아무튼, 장난이나 농담할 대상이 아니니까 적당히 해.”
내가 받아주지 않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콜라를 들이켰다.
“쳇, 재미없는 녀석.”
“아, 피곤한데 왜 왔어.”
“난 안 피곤해서.”
“설득력 있긴 한데 진짜 피곤함.”
“혜미랑 계속 연락함?”
“주말에 보자 했는데 안 본다고 함.”
“리얼?”
“리얼.”
“뭐냐. 그래도 사람 됐네. 예전처럼 질질 끌려 다닐 줄 알았는데.”
“나도 나이가 서른이 넘었다.”
“그럼 연락 다시 끊을 거야?”
“글쎄. 억지로 끊는다기보다는 그냥 천천히 지켜보려고.”
“뭘 지켜봐? 다시 만날 생각이 있다는 거야?”
“모르겠어. 혜미도 어떤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야, 새벽에 보고 싶다고 연락 왔으면 백퍼지.”
“글쎄….”
“난 반대야. 성일이도 반대라고 했으니까, 2대1로 우리가 이겼어. 그러니까 만나면 안 돼.”
“무슨 개떡 같은 논리야?”
“다수결의 원칙임.”
“하…. 아직 몰라.”
“너 그때 혜미 때문에 힘들어서-”
“그만. 흑역사 꺼내면 나도 극딜 넣을 거임.”
“큼. 아무튼, 진짜 다시 만나면 넌 사람도 아니야.”
“알았다, 알았어.”
보통이라면 술이라도 한잔했겠지만 이미 배가 부른 상태여서인지 술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혁권이 술을 안 마셔준다고 삐친 상태에서 돌아갔지만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잘 시간은 아니었지만 불을 끄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대충 핸드폰을 만지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진짜 다시 만나면…. 사람도 아니긴 하지….”
쉬는 날이었지만, 어제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늦게까지 게임을 한 것도 아니어서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출근하는 평일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다는 것에 불쾌감이 느껴지고 왠지 모르게 손해 봤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조금이라도 보상을 받고 싶어서인지 눈만 말똥말똥하게 뜬 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핸드폰만 30분을 했다.
“하….”
아이디만 있는 SNS의 세계를 여행하던 중 해외여행 사진, 고급 와인을 마시고 있는 사진들만 줄줄이 나오자 갑자기 현타가 세게 와 핸드폰을 내팽개치고 침대에서 일어나버렸다. 그리고는 곧장 화장실로 가 불쾌한 기분을 씻겨줄 쾌변을 보고 샤워를 했다. 몇 가지 안 되는 루틴 중의 하나가 바로 일어나면 샤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나서야만 외출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와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즉 샤워가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샤워하고 나와 습관처럼 침대에 처박았던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 주임님, 일어나시면 연락 한 번만 주세요!
응? 이 여자가 아침부터 문자를…. 현재 시각 오전 10시였다. 쉬는 날에, 그것도 아침부터 직장 상사에게 연락이라니….
- 무슨 일이세요?
- 아, 일어나셨나요?
일어났으니, 문자를 했지….
- 네네.
- 죄송한데 주인님 집에서 샤워 좀 해도 될까요?
- 주인이 아니라 주임이요.
- 앗, 네. 주임님
샤워하고 가겠다는 태평한 말에 내가 촌스러운 사상을 가졌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 불편하시지 않으시겠어요? 차라리 목욕탕을 가시는 게….
- 근처에 목욕탕이 없더라고요ㅠ 샤워 최대한 빨리할게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 대신 점심 쏘겠습니다!
- 콜. 10분만 있다가 올라오세요.
어린 후배가 사준다는 점심을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나의 사상보다 나의 통장 사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방금 샤워를 끝냈기에 욕실에 낀 김 좀 빼고, 배수구의 털 정리도 끝낼 때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자 부스스한 상태로 알 없는 안경을 낀 한우주 주임이 뭉툭히 둘둘 싼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죄송해요. 아침에 샤워를 안 하면 너무 찝찝해서요.”
공감 가는 말에 경계심이 조금 풀려서인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근데 샤워 용품은….”
둘둘 싼 수건 안에 갈아입을 속옷 대신 샴푸나 수건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면 저렇게 정성스레 돌돌 싸매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 깜빡했네요. 주임님 것 좀 빌릴게요.”
이 여자, 참 대책 없네.
“아, 네. 그러세요. 한 시간 정도 나가 있을 테니까 편하게 샤워하세요.”
“네? 저 때문에 나가시는 거예요? 그냥 편하게 있으셔도 되는데….”
방음이 안 되는 원룸 안에서 직장 여후배의 샤워 소리를 듣는 것이 더 불편하다고 설명하려다가 참았다.
“그냥 산책 다녀오려고요.”
“저 샤워 금방 하니까, 멀리 가지 마세요.”“꼭 1시간 다 채우세요.”
“네?”
“아, 아닙니다. 그럼.”
날마다 산책이라도 다녀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진짜 산책을 나와보니 너무 이른 생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던 중 핸드폰이 울리자 움찔했다.
“아니, 샤워도 물만 묻히고 나오는 건가….”
- 오빠, 바빠요? 요즘 연락이 잘 안 되네ㅠ
바쁘기도 했고, 외면하기도 했던 혜미의 연락에 목적지가 없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어려운 수학 문제도 아니었고, 알지 못하는 외국어도 아니었다. 한글을 뗀 유치원생도 이해하는 아주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문자는 어떻게 답장을 해야 되는지 도통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다시 외면을 택한 나는 애써 목적지를 정한 뒤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나오며 금세 싱글벙글 미소가 지어졌다. 얼른 이 달콤한 액체를 쭉 들이켜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 찰 때쯤, 내가 외면했던 그녀가 나를 불렀다.
“아직도 바나나 우유 좋아하는구나?”
문자가 아니었기에,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못 들은 척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예전처럼 짧은 치마를 입은 그녀가 웃으며 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오빠 보러 왔지. 헤헤.”
추위에 코끝이 빨개진 그녀가 몸을 살짝 떨며 미소를 짓자, 나도 모르게 안아버릴 뻔했다. 다행히 손에 들고 있는 바나나 우유덕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저 간단한 문장에 나는 또다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그냥 바나나 우유나 마실 생각밖에 없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헤헤, 농담이야, 농담.”
방금과 다른 느낌의 웃음을 지었지만…. 그냥 모른척하기로 했다.
“아, 그래?”
“근처에 볼일 있다가…. 오빠가 이 동네에 산다는 건 듣긴 했는데 진짜 만날 줄은 몰랐네?”
“어떻게 알고…. 아!”
고혁권, 네 이놈….
“답장이 없기래 바쁜 줄 알았는데….”
대충 입을 트레이닝복에 바나나 우유를 들고 있는 나를 위아래로 스캔을 하고는 서운한 표정을 짓자, 애써 웃으며 변명거리를 필사적으로 찾아내려 했다.
“그게….”
“주인님?!”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한우주 주임을 보자, 나의 뇌는 더욱 패닉 상태가 되었다.
“주, 주인?”
“아니, 주인이 아니라 주임이야, 주임.”
순간 경멸의 눈초리가 되었던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쏟아내듯 말했다.
“여긴, 직장 후배 한우주 주임. 알고 보니까 우연히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더라고.”
굳이 같은 건물에 산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가 맞는 표현이었을까.
“아, 안녕하세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사성 좋게 한우주 주임이 그녀를 향해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녀가 인사를 받으면 대충 한우주 주임과 선약이 있었다고 말하며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한우주 주임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나한테는 안 좋은 추억을 안겨준 그녀였지만 이런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행동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한우주 주임을 바라보던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크기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같은 샴푸 냄새….”
“뭐?”
“아니야. 난 그만 갈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가 떠나가 버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한우주 주임이 나를 보며 말했다.
“뭐에요? 제가 뭐 잘했어요?”
“아뇨. 잘못은…. 내가 했죠.”
“주인님이요?”
“시작은 저쪽이 먼저 했지만…. 오늘은 제 잘못이 맞아요.”
“아….”
“그리고 주인이 아니라 주임입니다.”
“앗. 죄송합니다.”
“샤워 벌써 끝냈어요?”
“벌써라뇨?”
“아닙니다. 들어가시죠.”
“아, 점심 쏘기로 했잖아요.”
“그랬죠?”
“마침 잘됐네요. 들어와서 고르세요.”
“네?”
태연하게 편의점에 들어가려던 한우주 주임은 실망한 나를 보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제 피자랑 치킨 쐈잖아요. 월급쟁이 사정 뻔히 아시면서….”
“아차차. 그렇군요. 제가 눈이 높아졌네요. 들어가시죠.”
편의점은 참 좋은 시설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한식, 양식, 분식 등등 모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 작은 것을 골랐고 한우주 주임은 컵떡볶이와 소시지를 골랐다. 굳이 다시 집에 가서 먹기가 그랬는지 여기서 먹고 가자는 나의 제안에 한우주 주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까 누구예요?”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씹던 한우주 주임이 궁금함을 기어코 참아내지 못했는지, 내내 들썩거리던 입을 연 것이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냥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전 여친이요.”
사생활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질문할 것 같은 느낌이 느껴져서 그냥 심플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참 희한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아아,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오, 떡볶이 다 됐다.”
더 캐물을 줄 알았던 한우주 주임이 전자레인지 소리에 쿨하게 떠나버리자, 왠지 허탈감이 들어 헛웃음이 나버렸다. 떡볶이를 가져온 한우주 주임이 그런 나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왜요?”
“아니에요.”
“하나 드려요?”
“주라고 하면 줄 거예요?”
“예의 상한 말이었지만….”
“그럼 그냥 드세요. 잘 먹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