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버릇 같은 게 하나 있었다. 밖에서 술을 마셨을 때, 인사불성의 만취 상태가 아니라면 이렇게 걸으면서 술을 좀 깨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술 마셨을 때 특유의 센치한 감정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 같은 것이다. 혼자만의 생각의 정리하면서 밤공기를 마시는 기분은 참 좋기도 했다. 그런데….
“집 방향이 같네요, 하하핫.”
사거리를 지났음에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걷자,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게요.”
한우주 주임도 어색한 미소를 따라지었다. 어디 사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친하지도 않은 여성의 집을 묻는 것이 이상한 시대가 되었기에 여태껏 물어보지 않고 있었었다. 그러나 더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우주 주임은 어디 살아요?”
“아, 전 치평동에 살아요.”
“어? 나도 그 동네 사는데?”
“정말요?”
“네, 한마음 원룸이라고 거기 원룸 가에서 살고 있어요.”
“예? 저도 거기 사는데?”
멈칫. 둘 다 걸음을 멈추고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언제부터요?”
“얼마 전에 이사 왔어요.”
처음엔 연고주의 때 묻은 나였기의 동네 주민이라 반가웠지만, 곧바로 직장 동료와 같은 건물에 산다는 것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보는 사람이 내 사적인 모습까지 볼 수도 있다는 것이 좀 그랬기 때문이다.
“아…. 반갑네요.”
“정말 신기하네요.”
나와는 달리 마냥 신기하고 반가운 듯 한우주 주임의 얼굴은 여태껏 봤던 표정 중에 제일 밝은 모습이었다.
“하하하….”
“중국집 맛있는데 아세요? 이사하고 한번 시켜 먹었는데 너무 맛없더라고요.”
“어디서 시켜 드셨는데요?”
“평화반점이요.”
“아, 거기! 거기 진짜 별로예요. 평화반점보다 등소평이 훨씬 나아요.”
“진짜요? 주말에 한 번 시켜 먹어봐야겠네요.”
“밥은 배달 시켜 드세요?”
“아, 요리하기가 귀찮아서…. 헤헤….”
멋쩍은 듯했으나 혼자 사는 사람들에겐 충분히 공감 가는 내용이었다.
“일하고 와서 밥해 먹기가 귀찮긴 하죠. 저도 보통은 시켜 먹어요.”
“맞아요. 밥하기도 귀찮고 치우기는 더 귀찮아요.”
역시 대한민국 사람답게 먹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몇 층이에요?”
“전 4층이요.”
“전 5층.”
“아. 그럼 조심히 올라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한층 더 올라갈 뿐인데 조심히 올라가라며 꾸벅 인사를 하는 한우주 주임을 보며 웃음이 낫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내일 봬요.”
집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술기운이 갑자기 확 올라왔다. 억지로 몸을 이끌고 씻고 나오고는 드디어 나의 몸에게 휴식을 제공했다. 침대에 벌러덩 눕고는 자기 전의 필수 코스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 정혜미: 오빠 주말에 뭐해요?
문자를 보자마자 몸이 움찔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서 한 번씩 연락이 왔었지만 긴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주말에 보자는 그녀의 문자가 술기운 때문인지, 피곤해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 문자를 받았을 때처럼 설레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고 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답장하려다 포기하고는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았다.
“내일 연락하자….”
희한하게 금요일 아침은 다른 요일의 출근 날보다 몸 상태가 최상이었다. 눈도 제법 잘 떠지고 샤워를 하며 콧노래도 흥얼거려진다. 아침밥은 어릴 때부터 안 먹었었기에 느긋하게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핸드폰과 지갑만을 챙기고 현관문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다 4층을 지나자, 순간적으로 4층에 한우주 주임이 살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제처럼 지각할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오지랖인가 싶어 그냥 지나쳐 내려왔다. 생각해보니 며칠 동안 출근길에 안 겹쳤던 것을 보며 출근 준비를 딱 맞게 하는 스타일인가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30분은 덜 자더라도 여유 있는 출근길을 선호하였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저마다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 말이다.
“오히려 같이 출근하는 것보다 낫지.”
버스에 오르자 웬일인지 버스 안이 평소보다 한적했다. 오랜만에 빈자리가 보이자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재빨리 의자에 앉았다.
“어째 오늘 운수가 너무 좋은데? 이러다 김 첨지 꼴 나는 건 아니겠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출근 시간도 넉넉하게 남았다. 그러다가 어제 그녀한테 문자가 왔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재빨리 답장 버튼을 눌렀다.
주말에 뭐해?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취미는 컴퓨터 게임이 전부였고 그마저 저녁에 잠깐 하는 정도였다. 외부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사람들에 휘말려 동호회나 학원에 다니려 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시도에서 멈추었다. 이렇게 몸이 피곤한데 밖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할 뿐이었다. 집안에서도 충분히 즐기고 놀 것도 많은데 굳이 밖에까지 나가야 하나 싶기도 했다.
“아, 맞다. 답장.”
문자를 수십 번을 읽었지만, 이상하게 그 짧고 단순한 문장에 나는 뭐라 답변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냥 바쁘다고 할까…?”
아니,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지? 그냥 피곤하니 쉬고 싶다고 말하면 될 건데…. 그렇게 말하면 다시는 연락이 안 올까 봐 그런가? 그럼 보면 될 건데 또 그렇게는 귀찮고….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미친놈이었다.
“에잇, 몰라.”
- 박지훈: 글쎄…. 그냥 쉬려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자…. 인생 이것 말고도 복잡하다.”
“일찍 나오셨네요?”
사무실에 들어가자 텀블러에 담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 김민지 대리가 보였다. 항상 김민지 대리와 내가 번갈아 가며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 둘 다 일찍 출근해서 여유롭게 일과를 맞이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박 주임님 그거 알아요?”
“네?”
“오늘 금요일이에요! 하하하~”
이번 주에 출장도 나가고 워낙 바빴던 탓인지 김민지 대리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그거 아세요?”
“네?”
“3일 뒤면 또 출근이랍니다. 하하핫.”
“에잇, 뭐에요.”
김민지 대리가 투덜거리면 커피를 쭉 들이켰다.
“설마 이번 주도 출근하라고 하지는 않겠죠?”
“에이…. 설마요. 급한 건 다 끝났잖아요.”
“그렇죠?”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둘 다 속으로는 겁에 잔뜩 질렸다.
“진짜 평일에 야근하는 건 아무렇지 않은데 쉬는 날만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어요.”
“저도요”
“하…. 어? 한 주임님 오셨네요?”
김민지 대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턱짓을 하자, 피곤한 얼굴로 출근하는 한우주 주임이 보였다. 시간을 보니 아마도 내가 탔던 버스의 다음 배차 버스를 탄 듯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만은 밝게 인사를 하자, 우리도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 올 것 같은 첫 휴일이 곧 오네요. 하하하.”
한우주 주임이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김민지 대리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당분간은 주말에 출근할 수도 있단 말은 하지 말아야겠네요.”
“그거 말하면 바로 탈주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