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어~ 박 주임 수고했어!”
내 인사에 자리에서 웃으며 호응해주는 차명환 과장의 연기 실력은 대학 연극가에서 수십 년을 연기한 베테랑 배우 못지않았다. 회사에서 나온 뒤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서 기다리자, 차명환 과장이 주변을 살피며 조심히 등장했다.
“오셨습니까.”
인사를 하던 나는 차명환 과장 옆에 의외의 인물이 같이 나오자 조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한우주 주임님?”
주뼛 거리며 차명환 과장의 뒤를 따라오던 한우주 주임도 나를 보고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박지훈 주임님?”
“한우주 주임도 새로 왔는데 환영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도 신입을 안 챙기니까 나라도 챙기는 수밖에.”
나름 뿌듯해 하는 차명환 과장을 보고 나는 얼른 역시 과장님의 마음씨에 감탄했다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일단 차에 타. 내 차로 한 번에 가자고.”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먹자골목에 도착한 우리는 차명환 과장을 따라 실내 포차 가게로 들어갔다.
“사장님~ 꼼장어랑 닭똥집이랑 주십시오! 소주도 한 병 주시고요.”
차명환 과장이 익숙한 듯 주문을 하자, 나는 얼른 수저, 젓가락을 세팅하고 물 잔에 물을 따랐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차명환 자리가 자리를 비우자 한우주 주임과 나 사이에 적막이 흐르며 어색함이 풍겼다.
“한우주 주임이님이 이런 자리에 나오실 줄은 몰랐네요.”
선배답게 먼저 말을 건네자 한우주 주임도 어색한 공기에 반가웠는지 얼른 대답했다.
“아, 과장님이 환영식도 할 겸 오늘 혼난 거 위로해 주신다고 하셔서 거절하기가 좀 그래서요.”
“아….”
대충 심정이 이해가 갔다.
“박 주임님이 계실 줄 몰랐어요. 진짜 박 주임님이라도 계셔서 다행이에요.”
이제 이틀 본 직장 상사, 그것도 거의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나는 이성 상사와의 단둘만의 술자리라니…. 아찔하긴 했을 것이다. 그래도 거절하지 않고 상사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에 조금 달라 보이긴 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이런 자리를 그냥 칼같이 거절한다던데….
“전 가끔 과장님하고 술자리를 가지거든요. 아, 그런데 저희끼리 술 마셨다는 건 회사에 비밀이에요.”
“아, 네. 과장님한테 들었어요. 그런데 왜 비밀로 해야 해요?”
“직장이라는 게 겉으로는 일만 하는 곳 같겠지만 사회생활이거든요. 일부 사람들끼리 술자리를 가지면서 친목질을 하는 것을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파벌 만드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고요.”
“아….”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언제나 회사에선 입을 조심해야 해요. 일에 관한 거나 공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그냥 언제나 못 본 척 못 들은 척해야지-. 어이쿠. 꼰대 같았죠?”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 나름 그 사람을 위해 한다는 말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었다.
“아, 아니에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잘 알려주세요.”
올…. 사회생활 좀 할 줄 아네?
“어, 둘이 좀 친해졌어?”
과대망상 일 수 있겠으나, 긴장한 한우주 주임을 위해 자리를 일부로 피해줬던 것 같았다.
차명환 과장이 자리에 앉자, 때마침 안주와 술이 나왔다. 내가 얼른 술병을 들자, 차명환 과장은 다시 술병을 가져가며 나와 한우주 주임에게 술을 먼저 따라주었다.
“한 주임은 술 좀 마시나?”
본인의 잔에 술을 따르기 전에 얼른 다시 술병을 건네받고는 두 손으로 차명환 과장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잘은 못 마셔요. 맥주는 한 두 잔 정도 마시는데 소주는 반 병 정도?”
“아 그래? 그럼 먼저 말했어야지. 사장님 여기 맥주 한 병 주세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에이. 회사 아니고 술자리니까 편하게 해. 억지로 술 마실 필요도 없고 본인이 알아서 조절해서 마시고.”
저런 점은 좋았다. 신세대 상사 느낌이랄까? 처음 술자리에 술고래 같은 차명환 과장의 주량을 따라가다가 다음날 요단강에서 눈을 뜰 뻔했다. 차명환 과장은 근무에 절대 피해가 가면 안 된다면서 반농담식으로 혼을 내고는 본인의 속도에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뒤로는 술에 취할 것 같으면 나는 반 잔씩 꺾어 마셨고 차명환 과장은 별다른 지적 없이 서로의 주량대로 술자리를 가졌었다.
내가 맥주병을 받고 맥주병을 따자, 차명환 과장은 한우주 주임의 소주잔을 자신이 가져가고는 맥주병을 받아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자, 맛있게 먹자고. 부족하면 눈치 보지 말고 더 시키고.”
“넵.”
“넵, 감사합니다.”
닭발과 오돌뼈를 추가로 시킬 때쯤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차명환 과장은 한우주 주임이 여자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나와 처음 마셨을 때보다는 이것저것 캐묻지는 않았고, 회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거나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오히려 나와 대화를 더 많이 했다.
“사회생활이 처음이랬지?”
“아, 네.”
“사회생활은 라인이 중요해, 라인이. 우리 회사만 해도 보이지 않는 라인이 존재해.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항상 입을 조심하고 어중간하게 참견하지 말고. 알았지?”
“네.”
나에게도 첫 술자리 때 해주었던 조언을 해주는 차명환 과장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저 말이 이해가 안 갔으나 시간이 지났을수록 너무나 현실적이고 중요한 조언이라 느꼈다.
“그리고 특히 우리 회사는 여초 회사라 더욱 입조심 해야 해.”
성차별적 발언일 수도 있어 깜짝 놀라 슬쩍 한우주 주임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히 한우주 주임은 싫은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오늘은 그만 일어나지.”
저 술고래가 웬일이지? 자신이 취할 때까지는 끝까지 마시던 차명환 과장이 순순히 도비들에게 양말을 건네주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한우주 주임이 여자인 데다가 첫 술자리라 나름 조절을 하는 듯했다. 차명환 과장은 쿨하게 일시불로 계산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얼른 차명환 과장의 차를 운전할 대리기사 콜을 불렀다.
“다들 조심히 가고, 내일 봐.”
차명환 과장이 먼저 떠나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차명환 과장이 편하게 해주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일의 연장선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우주 주임 택시 잡아줄게요.”
“아뇨, 박 주임님 먼저 타세요.”
“에이, 먼저 가셔야지.”
“아뇨, 전 걸어가려고요.”
“응? 걸어가요? 집이 이 근처에요?”
“아뇨, 이 근처는 아닌데 술도 깰 겸 걸어가려고요. 걸을만한 거리거든요.”
“그래요?”
“박 주임님 택시 잡아드릴게요.”
여자 혼자, 그것도 날이 어둡고 술까지 마신 상태에서 혼자 보낸다는 것이 여간 찜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은 오버였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뇨, 저도 걸어가려고 했어요.”
“아….”
혹시 불편한 오해를 할까 봐 얼른 내가 다시 말했다.
“그럼, 내일 봬요.”
“아, 네. 근데 어느 쪽으로 가세요?”
“전 저기 사거리 쪽….”
“저도 그쪽인데 같이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