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임이 좀 늦네?”
커피 한잔을 들고 어슬렁거리던 차명환 과장이 내게 슬쩍 말하자 아찔했다. 옆자리 동료이기도 했고 내가 담당하는 부사수 같은 신입의 지각이란 곧 나의 책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대놓고 말하는 상관의 말에는 엄청나게 많은 의미를 담아두고 있었다.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전화해볼까요?”
“아니, 알아서 오겠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보고는 차명환 과장은 자리로 돌아갔다. 한우주 주임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얼마나 되는 사람인지 보려는 시험인 것이다.
“아직 한 주임 안 왔어요?”
센터장실에 들렀다가 오던 최선하 실장이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말하자, 등에 식은땀이 나는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아…. 그게….”
“어제 첫날 이라 좀 피곤했나 보네요.”
내가 혼날까 봐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웃으며 고선미 팀장이 말하자, 최선하 실장은 대답 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순간 군대에서 면회 온 엄마보다 더 반가운 얼굴이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더 빌어! 더! 더! 헐레벌떡 들어온 한우주 주임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했지만, 그 누구 하나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만 내밀며 차명환 과장이 한마디 할 뿐이었다.
“좀 늦었네?”
“죄송합니다!”
얼마나 뛰었는지 자리에 앉으면서도 숨을 가쁘게 쉬는 한우주 주임의 이마에는 땀까지 맺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지만, 기분이 언짢은 것이 사실이었다. 신입이, 그것도 이틀 만에 지각이라니…. 우리 때에는 생각지도 못할-
“한 주임님?”
낮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최선하 실장의 냉랭한 목소리에 내가 움찔하며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옆에 있던 김민지 대리도 놀라 사례가 걸린 듯 기침을 하며 얼른 텀블러에 담은 물을 마셨다.
“네, 네?!”
사자에게 물어뜯기기 전의 토끼처럼 자신도 느꼈는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우주 주임이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나는 재빨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가보세요!”
“아, 네.”
평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최선하 실장은 사람을 절대 귀찮게 하지 않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번 잘못을 한다면…. 저렇게 사람의 영혼이 빠져나갈 때까지 피 말려 죽이는 사람이었다. 욕을 하거나, 인신공격하거나, 폭력을 쓰지는 않는다. 말 하나하나가 모두 옳은 말이었고 빈틈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계속 듣고 있자면 나는 금붕어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있었고 손끝 발끝까지 남은 자존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우주 주임은 신입사원이 지켜야 할 자세, 직원으로서의 기본 에티켓, 지각의 합당한 이유, 규칙을 어겼을 때의 징계까지 30분 이상의 설교를 듣고는 역시나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전 신입 같은 경우는 최선하 실장님의 설교에 울면서 뛰쳐나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어느새 한우주 주임의 뒤로 온 차명환 과장이 최선하 실장이 들리지 않은 정도의 크기로 말하자, 한우주 주임이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고는 말했다.
“아, 아니에요. 갑자기 차가 막혀서…. 죄송합니다.”
“그래, 그래. 그럼 다행이고. 처음 회사에 출근할 때는 출근길 교통체증을 생각해서 넉넉히 일찍 나와야 해. 박 주임이 이런 건 좀 챙겨주지 그랬어?”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어린애야? 출근이 처음이지 등교는 해봤을 거 아니야? 울컥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대답했다. 순간 한우주 주임이 미안한 듯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빨리 눈짓으로 막았다. 괜히 어정쩡하게 선임 챙기려는 행동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각에 대한 사유서 제출하라고 하시니까 박 주임이 양식이랑 쓰는 법 알려 줘. 실장님도 참…. 그냥 처음인데 좀 넘어가시지….”
차명환 과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공유 폴더 서식을 곧바로 뒤적거렸다. 회사의 규칙대로 하는 것이었지만 차명환 과장과 같은 생각이었다. 신입인데 너무하네….
“죄송해요, 박 주임님.”
“아니에요. 양식 찾으면 보내드릴게요. 할 거 하고 있으세요.”
딱히 할 게 없을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괜히 불편했기에 이 일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근데 양식은 꼭 찾으려고 하면 안 보여….
- 김민지: 양식 이거 쓰시면 돼요.
내가 뒤적거리는 것을 보고는 김민지 대리가 메신저로 센스 있게 양식을 보내주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 박지훈: 앗, 감사합니다!
- 김민지: 늦은 건 신입인데 왜 박 주임님한테ㅠ
- 박지훈: 예전에 저 때문에 김민지 대리님도 혼나셨잖아요. 하핫.
- 김민지: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요. 출장 보고서만 쓰면 급한 건 다 끝나가요.
- 박지훈: 감사합니다.^^
오예~ 퇴근 1시간 전이다~라고 내적 신남을 자제하며 모니터에 집중했다. 사실 오늘 할 일은 다 끝났으나, 일 다 끝냈다는 티를 낸 순간 다른 일거리가 주어진다는 불변의 법칙을 알고 있었기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옆자리를 슬쩍 바라보자 아직 조각난 멘탈을 미처 다 수습하지 못했는지 초점 없는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한우주 주임이 보였다. 곧 퇴근이니 조금만 버티라는 말을 해주려다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 차명환: 박주임, 오늘 한잔 어때?
오우…. 쉣... 올 게 왔구나…. 차명환 과장은 대표님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남자이기도 했고 자신을 잘 따른다 생각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다른 직원들 몰래 둘이서만 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었다. 자신 딴에는 막내인 나의 고민도 들어주고 조언도 해주면서 회포를 풀어주려는 이유였겠지만 후임에게는 직장 상사와의 술자리는 언제나 피곤한 법이었다. 물론 엄청 친해서 진짜 친구 같은 사이의 관계 회식이겠지만 회사에서 그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 박지훈: 좋습니다! ^^
상관의, 그것도 같은 남자 선배의 술자리를 거절하는 것은 유교 사상과 선후배 문화, 군대 문화에 익숙한 대한민국 남자들에겐 무리였다. 너무나 기다렸다는 듯이 기뻐하면서 술자리 내내 존경의 눈빛과 즐겁다는 것을 어필해준다면 회사 생활이 편해졌기에 나쁘지 않은 등가교환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