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 주임, 신입 맡기로 했다며?”
우리 회사에서 가장 바쁘다고 생각하는 사람 1위인 고선미 팀장이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자, 애써 미소를 지어주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 어차피 내가 중요한 건 알려줄 거니까 그냥 회사 잘 적응하게만 도와줘.”
“팀장님도 바쁘실 텐데….”
진심이었다. 선임과 후임을 잇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도 각종 실무를 혼자 다 해내는 일당백 여전사에게 돌멩이 하나 더 얹는 것이 미안했다. 나 또한 아직도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기에 신입에 관해서는 조금이라도 손이 덜 가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근데 원래 이런 건 대리급이 해야 하는데….”
고선미 팀장이 화장실에 가 있는 김민지 대리의 빈자리를 흘낏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자, 얼른 분위기 수습하고자 말했다.
“원래 신입의 일은 신입이 잘 아니까 제가 더 낫죠, 뭐, 하하핫.”
“어휴…. 그래도 지훈 주임이 다른 사람들처럼 안 그만두고 잘 버텨줘서 고맙다 진짜. 다른 건 안 바라니까 신입도 오래 다닐 수 있게만 잘 도와줘.”
“넵.”
뭐, 당연한 거였지만 새로 신입사원을 뽑을 때 내가 나설 일이 없었기 때문에 눈앞의 사람은 처음 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어린 여자라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이로는 막내인 김민지 대리가 스물아홉 살이고 그 위인 내가 서른두 살이다. 그런데 신입은 스물다섯 살이라고 한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한 건가? 와…. 난 저 나이 때 군대 제대하고 복학해서 알코올 중독자처럼 술만 퍼마셨던 것 같은데….
“아,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오우…. 깡 좋네. 첫 사회생활일 것이다. 낯선 장소에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를 하는 동안 얼굴은 조금 붉게 달아올랐지만, 목소리만은 크고 씩씩했다. 다행히 폐급은 아니라는 것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우주 주임님은 저기 박지훈 주임 옆자리 쓰시면 돼요. 박지훈 주임님?”
최선하 실장님이 눈짓하자, 재빨리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넵. 이쪽으로 앉으시면 되고 컴퓨터는 비밀번호는 ‘82828282’예요.”
“네? 아, 넵.”
“제가 만든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시고.”
자리에 앉은 한우주 주임은 옆에 서서 말하는 내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폴더에 전임자가 했던 자료들 있으니까 한번 훑어보시면 돼요. 궁금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시고요.”
“넵, 감사합니다.”
대답 잘해서 좋네. 사실 신입일 때 궁금하게 있을 리 없다. 궁금한 것도 뭘 알아야 궁금할 텐데 아무것도 모른 상태이니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로다라는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도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발 벗고 나서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조급하게 알려주다 보면 신입 입장에서는 멘붕이 오기 때문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알려주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아, 그리고 메신저 로그인하시면 우리 회사 인사명록 보내드릴게요. 몇 분 안 되니까 곧바로 외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회사 생활에서 업무 실수는 한번 꾸중 듣고 끝나지만 이름과 직급을 잘못 부르는 실수를 했다가는 영원히 찍히는 법이었다.
“아, 넵. 선배님 연락처가….”
머뭇거리며 묻는 한우주 주임을 보니 왠지 예전의 내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선배님은 무슨…. 그냥 주임님이라 부르시면 돼요. 여긴 다 직급 뒤에 님자로 붙이고 존댓말이 원칙이에요.”
“넵,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니, 주인님 말고 주임….”
“아, 아, 넵. 주임님.”
“야~ 벌써 박 주임이랑 한 주임이랑 친해졌나 봐. 하하하.”
어느새 어슬렁거리며 뒤에 온 차명환 과장을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차명환 과장이 괜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여기 박 주임이 입사한 지는 얼마 안 됐어도 진짜 일 잘하는 친구야. 그러니까 착실하게 배워.”
“넵.”
나름 선배의 위신을 살려주려는 듯 차명환 과장은 나를 잔뜩 치켜세워주었다.
“그리고 지금 박 주임 옆에 빈자리는 김민지 대리인데 나이는 어려도 똑 부러지는 사람이야. 출장 나가서 아마 오늘은 보기 힘들 거고…. 저기 빈자리도 외근 나갔는데 고선미 팀장. 우리 회사 에이스야. 고 팀장 없으면 우리 회사가 안 돌아가. 그리고 저기 계신 분은 면접 때 봐서 알지? 최선하 실장님. 우리 회사 넘버 투.”
마지막 말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역시 면접 때 뵙지? 센터장님은 사무실이 따로 있어서 옆방에 계셔.”
“아, 넵.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잘해보자고.”
우리 회사의 유일한(?) 장점은 회식이 없다는 것이다. 회사 넘버 원, 넘버 투인 센터장님과 실장님 모두 술을 안 드셨기에 술 때문에 고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간혹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점심을 좋은 데서 함께 먹는 정도로만 했다. 술은커녕 저녁 회식도 없었던 것이다. 신입사원이 들어왔다고 회식을 할까 살짝 두려웠지만, ‘퇴근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잠깐 얼굴 비추고 깔끔하게 떠나는 센터장님을 보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차명환 과장은 술꾼이었기에 이런 회사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침보다 한층 핼쑥해진 한우주 주임이 불쌍하긴 했지만, 모두가 겪는 시행착오였기에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고생했어요. 내일 봐요, 한 주임님.”
“눈 깜빡하니까 또 출근이네요.”
김민지 대리가 피곤함에 가득 찬 눈으로 아침 인사를 하며 들어오자, 하품하던 나도 인사를 했다.
“내일 금요일이니까 조금만 참아 봐요.”
“근데 휴일은 더 빨리 지나가요.”
칭얼거리듯 말하면서 의자에 앉은 김민지 대리는 발을 더듬 거리며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신입 분은 어때요?”
“글쎄요. 저도 바빠서 제대로 말도 못 했어요. 천천히 봐봐야죠.”
“그래요?”
김민지 대리는 한우주 주임의 빈자리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다른 분들 오기 전에 출근해야 할 텐데….”
“안녕하세요~”
고선미 팀장이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들어오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어~. 박 주임. 그거 보고서 다 썼어?”
“아, 넵.”
“결재 맡기 전에 한 번 보여줘. 내가 봐줄게.”
“감사합니다!”
출근하자마자 업무 이야기였지만 내가 실수할까 봐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기에 고맙게만 느껴졌다.
“김민지 대리는 출장 보고서 작성하는 대로 결재 맡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