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주임님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최선하 실장이 주는 결재 서류를 받아들던 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휴일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업무에 지장 없게 하세요.”
업무에 지장 준 적도 없고 당신들이 휴일을 제대로 준 적도 없잖아!... 라고 말할 뻔….
“넵, 명심하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 앉자마자 컴퓨터의 메신저 프로그램에 알림이 떴다.
- 김민지: 오늘도 아침부터 까칠하시네요.
바로 옆자리에 앉은 김민지 대리였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용기가 없었기에 메신저를 대나무숲으로 삼아 항상 이렇게 비밀리에 채팅을 보냈다.
- 박지훈: 결재 맡으실 것 있으시면 있다가 맡으세요. 하하핫^^
경험상 대놓고 직장 동료를 뒷담화하는 것은 업보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기에 항상 선을 지키며 적당히 김민지 대리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김민지 대리도 나의 상사였기에 이 또한 일의 연장이라 생각해서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욕을 할 수도 없으니 항상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아, 박 주임!”
차명환 과장의 외침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넵.”
“그 신입사원 수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했으니까 박 주임이 맡아서 좀 가르쳐 놔.”
??? 회사 막내, 잡일꾼, 욕받이, 휴일 없는 휴일의 직장인, 과장님 밥셔틀 등등의 직책에 한 가지를 살포시 더 얹어주는 차명환 과장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최선을 다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입사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제가 가르칠 수 있을까요?”
보통 대리급이 하는 일이었기에 필사적으로 눈짓을 김민지 대리를 향해서 했지만 차명환 과장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그냥 회사 어떻게 돌아가는지와 문서작업 같은 가벼운 것만 가르쳐.”
“그럴 거면 김민지 대리가 낫지 않겠어요?”
오우, 나이스 최선하 실장님!
“김민지 대리요?”
“박 주임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본인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무시하는 거 맞는 것 같은데, 저렇게 대놓고 말한다고?
“김민지 대리는 바쁠 텐데요. 그치?”
불똥이 튄 김민지 대리는 계속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는지 서류에서 눈을 떼고는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재빨리 내가 미소를 지었지만, 자신에게 튄 불똥을 툭툭 털어내듯 말했다.
“저 이번 주에 교육 출장이 있어서….”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 박 주임이 신입 맡으세요. 어차피 자세한 건 과장님이나 팀장님이 가르쳐야 하니까 부담 갖지 말고요.”
“넵.”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자리에 앉는 나에게 나름 미안한 표정으로 김민지 대리가 말했다.
“미안해요. 한가해지면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잖아…. 당신과 나, 고선미 팀장까지 한가한 적이 있어야지….
“넵,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센터장님이랑 같이 외근 나가 있는 고선미 팀장이랑 따로 식사할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들었지, 박 주임?”
차명환 과장의 말에 나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당 예약할까요?”
“예약은 무슨 그냥 있다가 자리 있는 지나 물어봐봐.”
“넵.”
- 김민지: 또 청국장…. 토요일에도 드신 것 아니에요?
- 박지훈: 정답입니다. 하하핫^^
삑-
“만 오천 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녁밥으로 때울 편의점 도시락과 간단한 몇 가지만 샀을 뿐인데 만오천 원이 날아갔다. 날마다 점심값도 만원은 쓰고 있고, 거기에 카페까지 한번 갔다 오면 매일 3만 원 이상이 식비로 나가는 셈이다. 그게 한 달이면 90만 원…. 술자리를 갖게 되는 달이면 100만 원…. 정말 먹기 위해 살고 있다는 말이 확 와 닿는다. 혼자 살게 된 이후로는 조그마한 것 하나 살 때도 뭐가 더 싼지 비교하고, 너무 비싸다면 굳이 살 필요가 있나 다시 고민하다가 내려놓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고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부모님은 나에게 돈을 쓸 때 안 그러셨다는 걸 깨달았다. 본인들에게는 지금의 나보다 더 엄격하게 돈을 썼지만, 자식들에 관한 것은….
지이잉-
집에서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것을 보며 사색에 잠겼던 나는 핸드폰 문자를 확인했다.
- 고혁권: 님, 정혜미 다시 만남?
오우 쉣…. 이 새끼가 어떻게 알았지?
- 박지훈: 님, 우리 집에 CCTV 달아 놓음?
- 고혁권: 미친 집에까지 데려왔냐?
- 박지훈: ㄴㄴ 과대망상 ㄴㄴ
- 고혁권: 와 이 새끼 개구리 새끼임?
- 박지훈: ?
- 고혁권: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새끼가 여기 있었네.
- 박지훈: 근데 어떻게 암?
- 고혁권:….
- 박지훈: ??
- 고혁권: 지금 그게 중요함?
- 박지훈: 님 혹시 문경은이랑 연락함?
- 고혁권: 오해ㄴㄴ. 게네 집 인터넷 명의가 내 걸로 되어있어서 해지 때문에 연락한 거.
- 박지훈: 차단했다며
- 고혁권: 실수로 다른 사람 해놓았나 봄.^^;
- 박지훈: 돌돌은
- 고혁권: ?
- 박지훈: 돌고 돌아 문경은
- 고혁권: 그냥 그러고 끝임. 근데 ㅅㅂ 니 새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 박지훈: 나도 그냥 어쩌다 연락된 거?
- 고혁권: 술자리야 그렇다 치고 어쩌다 영화까지 봄?
- 박지훈: 꼭 보고 싶던 영화라….
- 고혁권: 어휴…. 님 사람 새끼임?
- 박지훈: 문자 할 수 있는 원숭이라 생각하셈.
- 고혁권: 적당히 하고 끝내라.
- 박지훈: ㅇㅋㅇㅋ
“하…. 지읍됐네.”
딱히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전 연인에 그렇다고 좋게 헤어진 사이도 아닌데 며칠 만에 바로 말할 줄이야…. 이제 혁권이가 알았으니….
지이잉
- 김성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이잉
- 신태균: 여기가 호구 맛집이라던데 사실인가요?
“하…. 당분간 핸드폰 꺼놔야겠다….”
사실 전 여자친구라는 사실 말고는 만나는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아, 그녀가 술김 했던 같이 있자는 말 말고는 말이다. 어제도 영화만 보고 바로 헤어졌다. 아니지 카페에 들리긴 했지만, 영화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로맨스와 에로틱한 분위기는 1도 없었다. 그래서 떳떳했지만 그래서 궁금했다. 그녀는 도대체 왜 나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뭘 원하냐고 물어보기는 싫었다. 그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해질 때까지 친구로만 지낼 생각이었다. 친구들이 날 비읍시읍이라고 말하겠지만…. 나에겐 그게 최대치의 정상인 코스프레였다.
“아…. 다 식었네.”
도시락을 다시 돌릴까 하다가 3분을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 그냥 먹기로 했다. 물론 밥 먹을 때 필수인 옛날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말이다. 이상하게 요즘 예능은 입맛에 안 맞았다. 웃기 위해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건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동떨어진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가 간혹 궁금해서 몇 번은 찾아보긴 하지만 그 뿐이었다. 이럴 거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다가 현실 부적응자 처럼 느껴져서 그냥 차라리 재미있게 보았던 예전 예능 프로그램을 다시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낄낄낄, 개웃기네. 끅끅끅.”
모지리처럼 웃다 보니 식사와 프로그램 한편을 다 보았다. 그러다 시간을 보니 9시였다. 이때부터 온갖 침울함이 몰려온다. 곧 잠을 자야 할 시간이고 잠자리에 들었다 깨면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최악은 오늘은 월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