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성제의 아킬레스건.
성제가 인상을 찡그리며 선의를 확 밀쳤다. 얼마나 크게 밀쳤으면 선의가 날아갔다. 그리고 성제의 입에서 악귀의 검은 연기가 살짝 비쳤다. 나는 그것을 보고 성제가 악귀가 든 술을 마셨다는 것을 완전 확신했다.
선의가 날아가 공중에서 곤두박질쳤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일이다 싶었다.
떨어지던 선의가 공중회전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백발마녀전 임청한지 매트릭스의 캐리 앤 모슨지 그랬다. 내 딸이라서 그런지 더 멋졌다.
성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선의가 성제 등짝의 급소에 치명적(致命的)인 약점을 남긴 것 같았다. 등짝의 날개뼈를 만지는 걸 보니 그 부근인 거 같았다.
성제를 비롯해 성제 일당이 우리 일행을 노려봤다. 내가 속으로 인간아, 하며 꺼지라고 손짓을 했다. 대접이 이게 뭐냐는 거겠지, 비록 사적이지만 정부나 당을 대표해서 왔는데 이건 푸대접이라는 항의의 노려봄이었다. 대통령이 세계적인 인물이나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거부(巨富)들이 조문을 가는데 대통령인 내가 가야 하는 게 도리인 거 같다며 국무위원들과 당의 최고위원들에게 읍소(泣訴)했건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냉대였다. 이빨 빠진 거 다 아는데 뒷방이나 지키라고 했다. 그래서 장제갈이 정부나 당차원에서 문상가는 명분이 없어 이웃사촌이라는 핑계로 패밀리를 끌고 왔던 거였다. 겉으로는 이웃사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우리나라 최고 실세의 조문이기에 국민들에게 나름 어필이 되었고 실속도 챙겼다. 여론이 호의적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E) 철썩!
성제 일당들이 나가는데 문 앞에서 옥신각신했다.
거머리의 조폭 선배가 거머리 뒤통수를 쳤던 거였다.
- 거머리, 니는 선배한테 인사도 안 하나?
- 씨발, 내가 오야붕인데 인사라니? 어디서 개족보를 들먹이냐?
- 이 새끼 안 되겠네, 니 쫌 맞자...
그때 성제가 갑자기 그 조폭의 손을 잡더니 꺾어버렸다.
화풀이를 거머리 조폭 선배에게 했다.
조폭 선배의 손목이 180도로 팔등에 붙었다.
- 으악!
꺾인 손이 부러져 덜렁거렸다. 다른 손이 성젱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자 그 손마저 꺾어버렸다. 조폭 선배가 비명을 질렀다. 두 손이 덜렁댔다. 씨니컬한 미소를 흘리며
돌려차기하자 조폭 선배는 10여 미터 날아가 떨어졌다. 쿨럭이며 피를 쏟았다.
성제가 냉소를 흘리며 돌아서서 우리를 노려봤다.
나는 몰래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 괜찮아?
- 용천이 있는데 뭐, 근데 썬디 힘이 장난이 아니야, 용천 가지곤 버거워,
찾아봐야겠어.
- 뭘?
- 용천 못지않은, 아니 뛰어넘는 비검(秘劍).
- 그래? 용천 없이도 넌 상대가 될 줄 알았는데 용천 있어도 버겁다니...
나와 선의의 은밀한 대화였다. 선의가 용천을 내 옆구리에 찬 직호문녹각제도장구에 꽂았다. 그리고 양복을 덮고는 내 가슴을 팡팡 쳤다. 반납했다는 뜻이었다.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성제가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 가족은 물론 전 세계 인류의 악몽이고 풀어야 할 당면 과제였다.
- 부녀간에 다정해서 좋다.
- 베아트리체 할머니 눈에 다정해 보여서 싫어요, 이 인간 별로 안 좋아해요.
베아트리체 엄마의 다정한 말에 선의가 찬물을 끼얹었다.
- 성제가 악귀가 든 술을 먹은 게 확실한 거 같아요.
- 우선 장례부터 무사히 치르고 논의를 하자... 저 악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신경 바짝 쓰고...
베아트리체 엄마도 사태의 심각성을 절실히 느끼는 거 같았다.
* * *
운구(運柩) 행렬은 근엄하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수많은 인파(人波)가 뒤를 따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려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 세기(世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에만 의의(意義)를 두는 사람들도 많았다. 장지는 부산 기장군 정관의 추모공원으로 결정했다. 엄마의 단호한 결정이었고 아들인 나도, 손녀인 선의도 원했던 장소였다. 평상시 소박하고 털털하게 사신 아버지 성격에도 맞았다. 아야코도 흔쾌히 따랐다. 불만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어머니였으니까,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 묻히는 건 수구지심(首丘之心)아닐까...
그런데 찝찝한 게 하나 있었다. 나와 엄마, 선의도 찝찝한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셋을 제외한 사람들 때문에 신경이 쓰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거침없는 선의도 조심했다. 민교... 서민교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남보다 먼저 나타나 우리 집 가족인 양 종횡무진 실력을 발휘했을 텐데 아버지가 영락공원 화장장에 들어가
한 줌의 흙이 되어도 도통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찝찝했다. 신상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거머리한테 물어볼까 싶었지만 혹 민교에게 해가 갈까 싶어 참았다. 만일 거머리가 기장 정관 추모공원에 오지 않을까 그러면 민교에 대해 알아봐야지 내심 기대했는데 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갈수록 깊어졌다. 무사해야 할 텐데...
어떻게 보면 정말 민교와의 화왕산의 정사는 욕정 그 자체로 순수했는데... 인간도 동물이라 동물성(動物性)만으로 혼신(渾身)의 정염을 불태웠기에 후회는 없었다.
혹 아야코가 이 문제로 화가 난 건 아닐까? 가만히 있어봐라, 그럼 나는 뭐라고 변명하지?... 민교를 위해서라도 당당하게 이야기할 거다. 9년 뒤에 아야코 니가 나타나서 나타난 걸 알았지, 난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 같은 놈한테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바라는 니가 착각한 거다. 물론 9년 뒤에 나타난다고 약속이라도 했으면 난 일편단심 너를 기다렸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잖아, 미안하다, 이렇게 변명이라도 해봐야지... 에라 모르겠다, 따귀라도 때리면 맞아야지, 그래도 민교는 보호해주고 싶다.
아버지를 사각 상자처럼 쌓아놓은 납골당(納骨堂)에 봉안하지 않고 땅에 화장한 유골을 묻었다. 자그마한 비석을 세우고 그 앞에 땅을 파고 뼛가루가 든 유골함을 묻고 평평하게 다졌다. 그리고 잔디를 깔았다. 그것으로 끝났다. 허무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모두 눈물을 훔쳤다. 얼음공주 뺨치는 아야코도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아야코는 오열하는 엄마를 안고 위무(慰撫)했다. 장례가 끝났다. 정관의 추모공원은 우리가 타고 온 차들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었다. 민폐가 심했다. 서둘러 타고 온 차를 타고 장지(葬地)를 벗어났다.
* * *
- 착함이 상처를 주대...
아야코가 뜬금없이 흘리듯이 말했다.
집이 바주카포로 박살이 났기에 거처를 베아트리체 창원 집으로 정했다.
워낙 대궐 집이라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 친지들, 친구 부모님들도 숙식(宿食)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다.
- 10년을 눈앞에 두고 있어...
내 말뜻은 9년을 훌쩍 넘어서 나타나고선 왜 원망이냐였다.
- 아버님이 날 부르신 거야...
나는 아야코가 왜 자꾸 삐딱 선을 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따지면 내가 더 할 말이 많아...
- 퍽도 할 말이 많겠다.
- 선의 때문에 그래? 나도 군에서 상병 휴가 나오고서 알았어...
- 불순해...
-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그래도 변명할 기회는 줘...
슬그머니 아야코 손을 잡았다.
아야코가 손을 탁, 쳐냈다.
-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해?
- 왜 이렇게 세속적이 됐어?
- 난 원래 세속적이었어...
- 뭔데? 뭐냐고? 아야코가 내게 9년 만에 나타나서 내게 보인 이 싸늘한 반응이?
- 몰라서 묻는 거야? 원래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거야?
- 몰라? 그 아무렇지 않은 게 뭐냐고? 대체...
창원 시내가 내다보이는 벤치에서 아야코와 대화였다.
- 방해한 건 아니지?
- 어, 누나...
- 작은엄마가 불러...
- 그래?
- 니 말고 아야코상...
누나가 일본말로 했다. 누나 손에 커피포트와 커피잔이 들려줘 있었다.
- 아, 네...
아야코가 상냥스럽게 대답하고 잰걸음으로 갔다.
- 커피 줘?
- 응...
누나가 커피잔을 내게 내밀고 커피를 따랐다.
- 소문으로만 들었던 스에마쓰 아야코를 내 두 눈으로 보다니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
- 누나 그러지 마, 호들갑으로 보여...
- 9년 만에 우리 눈앞에 나타났는데 호들갑이라고?
- 근데 화가 나 있어...
- 왜?
- 모르지, 시원하게 화난 이유를 말 안 해...
- 너 다른 여자가 있어? 너 결혼한 거 쌩깠잖아?
- 있지...
- 그래, 누군데?
- 누나...
- 칵, 커피포트로 머리통을 그냥... 밥 먹으러 와.
내 머리를 손으로 헝클리고 누나가 갔다.
혼자 있으니까 민교 생각이 났다. 걱정됐다. 가볼까... 집에 있으려나...
알아서 피해준 걸까? 그러면 얼마나 좋아, 안심이지... 거머리도 모르는 걸 저 남수단에 있는 아야코가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인내심을 발휘해 늑대를 동면에서 깨우지 말걸, 혈기(血氣) 그게 인력으로 되나, 한 참 피 끓는 청춘인데, 민교한테 언제 가보지, 밥 먹고?... 잠깐 학교에 뭘 두고 왔다고? 너무 뻔해, 삼빡한 뭔가 없을까? 아니면 모두 잘 때? 고양이처럼 발을 세워서 나가볼까? 차라리 모두 앞에서 민교의 존재를 이실직고하고 당당하게 나가서 잘 있는지 확인하고 처분을 바라면 어떨까? 아야코는 그렇다 치더라도 장인 장모가 계신데 이건 예의가 아니지...
이때까지 따 놓은 점수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될텐데...
나는 좋은 생각이 안 떠올라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 선의, 한이 아빠 식사하세요.
- 어, 어...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