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아야코와 조한 그리고 문상객.
부산 세븐스타 소속 조폭 하나가 담배를 피워 물고 우연히 하늘을 보다가 외친 소리였다.
남천 성당 마당은 이미 다 치워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사전에 계획이 되어 있었던 거였다. 스에마쓰 직원들이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낙하산은 두 개였다.
아야코와 아들 조한(曹韓)이 남천 성당 앞마당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야코야 여고 시절 파라슈트걸로 유명해서 충분하게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이제 고작 9살 난 조한이 엄마 못지않게 낙하산을 타고 가볍게 공중투하(空中投下)로 내려온다는 게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조한도 스에마쓰 아야코의 비범하고 특출함을 물려받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켜보던 스에마쓰 그룹 관계자들이 낙하산을 재빨리 회수했다. 준비한 임시 막사에서 아야코와 아들 조한은 검은 예복으로 갈아입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야코가 들어서자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 정적이 됐다. 아야코는 관을 잡고 잠시 묵상(默想)으로 애도를 표했다. 9살 난 조한은 아야코 뒤따라 관에 손만 대고 돌아섰다.
어린아이 임에도 긴장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태연했다. 어떻게 보면 좌중을 가소롭게 보는 듯했다. 겉모습만으로도 거의 100% 아야코를 쏙 빼닮았다.
- 아들이야.
내 주위 사람들은 놀랐다. 나도 처음엔 아주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금세 요시야 서점의 일이 떠올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처음이 아니라 하향과의 악몽과 같은 일로 선의가 탄생했기에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 인사해, 아빠야.
조한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당돌해 보였지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 안아드려.
조한은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달라도 조선의 못지않게 까칠했다.
- 어머니, 손잡니다.
- 으응, 그래... 내 손자, 어디 보자 엄마를 닮아서 귀티도 나고 정말 미남이구나, 니 아빠를 닮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엄마는 덥썩 조한을 안았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아버지 생각이 났던 거였다. 나는 의문의 1패를 했고, 조한은 무표정으로 엄마에게 안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엄마는 아야코가 왜 며느린지, 조한이 왜 손잔지? 따질 겨를도 없었고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따져 봐야 이 시점에 뭐하겠느냐였다. 죽은 아버지와 아야코가 며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이미 심정을 밝힌 적도 있었고, 그 심정을 이시하라 유우, 서민교, 심지어 수진 누나에게도 표명했지만, 아무튼 며느리가 있으면 손자나 손녀가 있는 게 자연의 섭리라 당연한 거고 손녀는 있으니 손자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하는 욕심에 응답하듯 떡하니 생겼으니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그래서 따질 필요가 없었다.
- 나 알겠어?
- 이 인간이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요?
- 이 인간은 조몽대를 말하니?
- 예...
내 딸 조선의와 아야코 간의 첫 대면이었다.
아 가시나 이왕이면 조몽대가 네 아빠냐? 그렇게 물으면 안 되냐? 말에 가시가 돋았다. 햇수로 9년 만에 만남인데 시비도 아니고... 뭔가 맺힌 게 있었다. 말을 해야 알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는 내 탓이냐? 난 뭐 할 말이 없는 줄 알아? 잠잠해지면 나도 따질 거다.
- 나 네 엄마야, 이 인간이라는 남자의 아내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조한은 니동생, 조한, 누나야 서로 인사
해.
아야코가 조한을 선의에게 소개했다.
- 난 네 누나 조선의야, 잘 지내자, 자리가 자리인 만큼 악수는 말자,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도 좋다, 대신
내 말 잘 들어야 해.
- 난 혼자가 좋아, 지금까지 몰라서 누구에게든 물어본 적이 없어, 더욱이 누난 필요 없고, 그래서 누나라고 안 할 거
야.
선의와 조한이가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아야코와 유우.
왜냐하면 둘이 주고받는 말이 고대 인도 아리안 말인 산스크리트어(Sanskrit)였기 때문이었다.
- 꼬마가 제법인데, 장례 끝나고 보자
- 꼬마라니, 내가 훨씬 키가 큰데, 왠 착각? 나중에 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서워.
선의와 조한의 말싸움을 알아들을 수 없어 우리는 눈만 멀뚱거렸다.
아야코와 유우는 무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두 사람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르는 줄 알았다.
- 선의야 니가 누나니까 참아.
- 아줌만 누구세요?
- 아줌마?
이시하라 유우가 산스크리트어로 선의를 달래자 조한이 기분이 상한 듯 물었다.
- 내 대모야.
- 엄마 친구고.
선의 말에 아야코가 나섰다.
- 맞네, 네 엄마 친구니까 아줌마...
유우의 자조적(自嘲的)인 인정이었다.
본당 입구에서 누가 들어왔다. 갑자기 정적이 감돌았다. 눈에 익은 분이었다.
스에마쓰 혼 (末松 本) 교수와 야마우치 미호(山内 美穗) 여사였다. 아야코와 나 사이를 인정한다면 나의 장인과 장모였다.
- 오셨습니까?
스에마쓰 혼 교수는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관을 잡고 묵념을 했다.
- 혼내도 할 말 없지?
- 네, 면목없습니다...
미호 장모가 내게 눈을 흘기더니 나를 안았다. 내 등을 쓰다듬었다. 울먹였다.
- 가슴 아플 거야, 몽을 보면 좋은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 같아...
미호 장모도 관 앞에서 두 손 모아 짧은 기도를 했다.
- 어머니, 저희 아버지 스에마쓰 혼이시고 어머니 야마우치 미호이십니다.
- 아, 그래?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돈 내외분을 뵈니 송구스럽습
니다.
아야코의 소개로 아야코의 부모님과 엄마가 상견례를 했다.
- 아닙니다, 사돈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미호 장모가 엄마 두 손을 잡고 정중히 위로했다.
그때,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필히 그럴 거라는 내 예상이 그대로 적중이 되었다. 아버지 관이 없어졌다.
호텔의 방 번호가 바뀌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자기 방인 줄 알고 남의 방에 들어가다가 민망한 장면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올 것이 왔구나, 빨리 끝내고 싶었다.
쥰페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문상을 왔다. 쥰페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엄마와 베아트리체, 수진 누나가 얼굴이 하얘져 아버지 관을 찾는다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다.
- 엄마, 아무것도 아니야, 쥰페이 할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 그러면, 접때 그 기이한 이야기의 주인공?
- 네, 별거 아니에요, 눈 속이는 마술이니까...
내 말에 그제야 주위 사람들이 안심했다.
쥰페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관이 있던 자리에서 손을 내밀어 애도를 표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 관이 시공간을 넘어오듯 순식간에 나타났다.
문상객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웅성거렸다.
쥰페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엄마와 마주 보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쟈크 데스, 쟈크 데스...
엄마가 쥰페이 할아버지 바지 지퍼가 열렸다고 했다.
쥰페이 할아버지가 놀라 바지를 내려봤다.
전혀 이상이 없었다.
엄마의 귀여운 복수였다.
할아버지가 크게 웃지는 못하고 미소와 엄지를 펴며 이찌방이라고 했다.
- 아빠, 용천...
- 왜?
- 줘...
- 안 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선의가 옆구리에 찬 용천을 달라고 했다. 나는 안된다고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 빨리 줘, 쓸데가 있다고...
- 넌, 아직 어려...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위험해...
- 아빠, 저기...
둘이서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성제와 장제갈, 성제 엄마, 거머리 일당들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내가 노려봤다. 내가 속으로 뭔 저런 뻔뻔스러운 작자들이 다 있을까 하는데...
선의가 재빨리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용천을 잡았다 내 양복 안에서 직호문녹각제도장구에서 용천을 눈 깜빡할 사이 뺐다. 선의 손에 용천이 감겼다. 선의의 손에 감긴 용천은 주인을 찾은 듯 전혀 이상 현상을 보이지 않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 그냥 뒀다.
성제를 보자 저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면상을 들이미나 싶었다.
정부는 조금 전에 바주카포 용의자가 감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덧붙여 자살인지 타살인지 수사당국에서 좀 더 수사해 봐야 바주카포 용의자의 죽음에 대해 전모를 밝힐 수 있다고 했다. 힘 있는 자의 전형적인 사건 덮기였다.
엄마 말대로 넌 우릴 잘 못 건드렸어...
선의가 문상하고 돌아서는 성제에게 다가갔다.
- 썬디...
- 오, 그래 선의?
선의가 와락 성제를 안았다.
성제도 얼떨결에 선의를 안았다.
선의가 재빠르게 손으로 성제의 어깻죽지 쪽을 살폈다.
- 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