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아버지의 죽음.
그 술병에 든 악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잰지 아무도 모른다. 베아트리체 몸에서 자랐기에 그 정도였지 만일 성제 같은 악마 몸에 들어가면 그 악귀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지구상에서는 상대할 대상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화근(禍根)이다. 천년 묵은 잉어 용천도 버거울지도 모른다. 악귀와 상대할 초자연적인 슈퍼파워를 찾아야 한다. 성제가 만일 그 술을 마시고 패악(悖惡)을 지기고 횡포를 부리면 전 인류적인 재앙이 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 게으른 자에게 그런 막중한 일을 맡기시나...
대충 살고 싶은데... 갑자기 아야코가 떠올랐다. 그녀 정도면 충분히 상대가 될 텐데... 물론 혼자는 아니고 미녀 삼총사와 이시하라 유우, 장수진 누나, 내 딸 조선의, 베아트리체 엄마, 어벤져스처럼 힘을 합치면 붙어볼 만한데, 무엇보다도 악귀가 든 그 술병을 찾아야 한다. 성제가 마시기 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법이 없을까? 절실했다, 아야코가... 아야코가 있었으면 나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알아서 하라고 맡기면 깔끔하게 해결될텐데... 어디 있냐? 근데 스에마쓰 아야코 넌 천지개벽(天地開闢)을 해도 나랑 헤어지지 않을 거라 맹서(盟誓)를 해놓고 단칼에 나를 버리고 사라졌냐? 아니 나를 버리고 사라진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없어져버렸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뚜렷한 이유는 내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이유고 스에마쓰 아야코가 맹세를 저버리고 사라질 만큼 경천동지할 이유가 있는는 건 아닐까?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 10년이다, 다시 만나면 어제 만난 것처럼 될까? 아니면 어색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바작만 찰까?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가 성제 생각하니까 불같이 분노가 치밀었다.
어제 성제 새끼가 꺼지라고 할 때 싸워서 피를 철철 흘려도 절대 못 간다고 과감하게 거부했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걸... 순전히 내 잘못이다. 어휴 벽창호 나는 내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수진 누나와 이시하라 유우가 미어캣 모드를 하고 쳐다봤다.
- 아냐, 아냐... 그런 게 있어... 알려고 하지 마, 알면 웃어, 킥...
* * *
- 들어가...
내 말에 누나가 망설였다. 성제 일당이 머문다는 호텔 로비까지 와서 수진 누나가 망설였다. 악귀가 든 술을 성제가 먹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왔지만 수진 누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였다. 결연한 의지는 보였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일까? 밝히지 못하는 뭔가를 수진 누나는 숨기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다. 이건 누나한테 못 할 짓이다. 나는 누나 손을 잡고 다시 호텔 문밖을 나섰다. 이런 상황이 구차해 보였다. 유우도 잘했다며 내 어깨를 툭 쳤다.
* * *
- 어떤 일이든 아니 어떤 일이 벌어지든 우리가 해결하면 되잖아?
- 그래서 나온 거야.
내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유우가 말했고 내가 대답했다.
내 옆에는 당연히 수진 누나가 앉았고 뒷자리에 유우가 앉았다.
- 미안해... 도저히 그 인간 앞에 못 가겠어...
- 어허이, 누나도... 내가 미안하지, 누나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내 고집만 피웠으니, 어떻게 되든 유우 말대로 우리가 해결해, 알았지 누나?
내 말에 누나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 시계가 오전 7시를 가리켰다.
- 예, 엄마...
- 성님하고 같이 있다...
- 선의는?
- 아버지보고 잘 지켜보라고 했다.
- 예, 우리도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 나중에 뵐게요...
내가 전화를 끊자 수진 누나가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 대학 2학년 때 성제가 한국에서 코카인을 흡입하고 정신을 잃은 상태로 운전하다가 사람을 치어 죽이고...
- 음주가 아니고 코카인이었어요?
- 응, 음주로 언론과 검경과 짜 맞춘 거지, 국내 여론이 들끓자 내가 있는 미국으로 왔어...
이야기는 자초지종 이랬다. 미국에 와서도 성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수진 누나는 동생이라 따끔하게 훈계도 했지만, 성제는 콧방귀만 껴서 한집에 살아도 남처럼 지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성제가 생수병에 수면제를 몰래 탄 물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깨보니 성제가 벌거벗은 채로 자기 몸을 더듬고 있어서 비명을 지르고 뛰어나와 기숙사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 뒤로 성제는 민암재단의 돈으로 집을 구해 나갔고 수진 누나는 그 집을 팔고 생모가 마련한 집에 들어가 살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했다.
- 근데 유우, 나한테는 누나가 과민반응을 안 보여, 맞지, 누나?
- 응, 신기하게도 몽대와 신체 접촉을 해도 소름이 끼치지 않았어...
- 나의 순수함 때문에 그래, 헤... 암, 나는 착한 놈이야, 하하...
나는 어깨에 힘을 주며 차가운 수진 누나 손을 잡고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다.
- 봐, 유우... 누나가 아무렇지 않잖아, 하하~
- 그럼, 고분에서...
유우가 또 고분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꺼낼 모양새였다.
나는 얼른 끼어들었다.
- 그 누구도 발굴 못 하는 것을 내가 직호문녹각제도장구를 발굴한 건 내가 그만큼 순수한 사람이라는 걸 조상이 증
명해 준 거지...
- 발굴이 아니라 발견이라는 게 맞지 않을까?...
- 그래도 상관없고...
유우가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아서 안심이었다. 발굴이든 발견이든 별 관심도 없다 아무렴 어떠랴, 파렴치한만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비하해도 좋다.
그때였다. 청천벽력 이상의 일이 벌어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건 오히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거였다.
(E) 딩딩딩딩~ 딩딩딩딩딩!~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다.
엄마에게 또 전화가 왔다.
- 어, 엄마...
- 빨리 와 집으로!!
- 왜요, 왜? 엄마, 왜요?!
- 집이 포탄에 날아갔어! 바주카포에 날아갔어!! 으아~ 아아~
- 아버지는, 선의는?!
엄마는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고 결국 숨이 넘어가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차를 급하게 유턴을 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마침 도로에 차가 그렇게 많지 않
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유턴하는 바람에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빵빵댔다.
- 왜, 왜? 집에 뭔 일 있어?
수진 누나가 놀라 물었다.
유우는 위험한 일이 벌어진 걸 직감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우리 집이 바주카포에 날아갔어...
-뭐?!
수진 누나와 유우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성제의 짓이란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분명 악귀가 든 술을 마셨다는 증거다. 누나도 유우도 그렇게 생각했다. 옆에 앉은 수진 누나의 굳어진 표정에서, 백미러에 보인 유우의 상기된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수진 누나는 죄책감에 흐느껴 울었다. 뒷자리에 앉은 유우가 누나 어깨를 매만지며 위로했다.
* * *
현장에 도착하니 집은 박살이 나서 온데간데없었다. 매캐한 먼지 냄새에 섞인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엄마도 아버지도 조선의도 보이지 않았다.
구경하는 동네 사람들과 주위를 정리하는 경찰과 형사들이 왔다 갔다 했다.
아무 경찰이나 잡고 물었다.
- 여기 사람은요?!
- 병원 가보세요, 아마 죽었을걸요?
- 네?! 어느 병원요?!
- 나도 몰라요, 방금 갔으니까, 아마도 여기서 제일 가까운 병원 갔겠죠?
돌아서는데 베아트리체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 몽대야... 여기 삼선 병원이야, 빨리 와...
부산 주례 삼선 병원 도착하니 베아트리체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몽대야 어떡하니, 이 일을 어떡하니...
- 아버지는요, 엄마는요, 선의는요?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엄마는 충격을 받아 혼절해 병실에 누워있고 그 옆에서 선의가 지킨다고 했다.
정신이 아득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안으로 삼켰다.
아버지는 마약에 찌든 자가 쏜 바주카포에 집이 무너지면서 담에 깔려 절명하셨다고 했다. 선의를 살리고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했다. 마약에 찌들게 한 뒤 바주카포로 우리집을 날리게 한 건 안 봐도 누구의 짓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 그것도 특정 부대에서 쓰는 바주카포를 조폭 쫄따구가 밀매로 구입했다는 것이 가당찮은 말인가, 정부의 발표나 언론이 그렇게 몰아갔다. 감천항에서 러시아 상선을 통해 들어온 거라 했다. 바주카포는 러시아제였다. 잘 짜진 각본대로 움직인 거 같았다. 그들이 부른 쾌재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들이 알기까지는 얼마 오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