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악귀가 든 술병 악마 성제가 가져 갔다.
- 에라이, 인간아, 가서 손이나 씻어, 발가락 새를 닦은 손으로 어딜 만진다 말이 야?!
- 아니... 달래주려고...
엄마가 유우를 안고 무슨 병균을 피하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왜 내 순수한 마음을 몰라주나, 이건 포옹이 아니라 프리 허그(free hug) 차원인데...
유우는 일부러 냄새난다고 코를 잡았다.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빨리 가 손이니 씻어, 분위기 다 깨고 지랄이야...
- 그 손으로 끓인 라면 먹으라 하진 않겠지...
엄마가 빽 소리를 질렀고 유우가 표독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장난끼가 섞인 거지만...
뻘쭘했다. 전혀 의도는 아니었어도 이상하게 전혀 불순한 의도가 되어버렸다.
- 손 씻을 거야, 아니 샤워할 거야, 그리고 라면 끓여도 나 혼자 먹을 거야.
- 배 속에 거지가 들었나, 그 맛있는 걸 먹고도 또 라면 타령이냐?
유우는 저런 남자 마음 두지 마, 평생 고생이야, 남자는 나처럼 몽대 아빠 같은
듬직한 남자를 구해야 해, 알겠지?
- 예...
유우 귓불이 발갛게 물이 올랐다. 안 들키려면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 저는 선의하고 잘까요?
- 아니, 몽대하고...
- 네에~!!
- 왜, 놀래? 둘이 사귀는 거 아냐? 신방 차려줄까 했는데...
- 엄마?!, 유우 진짠 줄 알아요?!
- 진짜로 그랬는데...
엄마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엄마의 농담이지만, 엄마는 가끔 이런 식의
농담을 진짜처럼 했다. 나는 부지기수로 당했다. 몽대야, 왜요? 엄마 옷 다 벗었다,
그래서? 밖에 못 나가니까, 니가 불 다 꺼라, 거실하고... 싫으면 내가 나가서 끄고, 아뇨, 내가 끌게... 나중에 알고 보니 나가기 귀찮아서 그랬다고 했다.
참 재밌는 엄마였다.
유우는 화들짝 놀라 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버지도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 아버지는 뭐가 좋아서 웃어요?
내가 아버지에게 불퉁한 표정으로 짜증 아닌 짜증을 냈다.
- 곽세린 여사, 아들 하나는 잘 낳았어...
- 당신이 만들어야 낳지? 큭...
엄마나 아버지 나이엔 흔하게 주고받는 말이라도 연령대를 확대하면 분명
수위가 높은 말이었다.
- 엄마 쫌, 일본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듣는 성향이 강해요... 엄마 말이
진담인 줄 알고 고민, 고민하다가 결심하면 그대로 목숨 걸고 밀고 나가요,
아니다면 안심인데 그 반대면 여기 눌러앉을 줄 몰라요, 그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요?
수시로, 시도 때도 없이, 느닷없이 집에 들락거리는 민교를 다분히 의식한 내 말이었다.
- 쌍수 들어 환영이지, 당신도 그렇죠?
- 나도 쌍수 들어... 두 발도 들고, 허...
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대책 없는 양반들, 우리 부모.
어떻게 보는 처녀들마다 다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다.
무슨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도 아니고, 아니면 내가 의자왕이라도 되냐?
오늘만 대충 사는, 띨띨하기 짝이 없는, 하찮은 내가 이 무슨 호사냐?
이 시대가 조선 시대만 되었더라도 한 번 야무지게 꾸어 볼 욕심이건만
몽대야 헛물켜지 말자, 내 분수를 알자, 내가 나를 모르면 누가 아랴...
이것도 복인가 쓴웃음이 나왔다.
* * *
- 으악?!
나는 자다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가위에 눌린 거 같았다. 어제 본 성제 때문이었다. 베아트리체 엄마와 수진 누나는 괜찮을까?... 주위를 둘러봤다. 깜깜했다. 창밖엔 달빛만 어스름했다. 사방은 찌러 찌러대는 풀벌레 소리만 들릴 뿐 고즈넉했다. 핸드폰 시계를 봤다. 새벽 3시 반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 마셨다. 차가움이 오장육부를 찌르르 대며 타고 내려갔다. 다시 내 방에 들어가 불을 켰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이불 위에 다리를 쭉 폈다. 성제가 자꾸 걸렸다.
그때였다.
- 딩딩딩~ 딩딩딩딩~ 딩딩딩~
핸드폰 벨이 울렸다. 수진 누나였다. 나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 어, 누나...
- 올래?
- 당장 갈게... 별일 없지?
- 와 봐...
- 바로 갈게...
수진 누나의 기운 빠진 목소리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심상치 않아서 용천을 꺼내서 손에 감았다. 천년 먹은 잉어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 왼손에 녹아 들어갔다. 간이 방방해졌다. 겁날 게 없었다. 성제 너 새끼 꼭 거기에 있어라, 내가 요절을 내줄 테니...
이시하라 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우가 얼른 받았다.
- 유우, 갈래?
- 당근...
유우가 뛰어나왔다.
엄마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 성제 일당들이 갔대?
- 그런가 봐요, 우리가 가서 상황 보고 전화할게요, 그때 보고 오든가 하세요.
- 그렇지, 그게 낫겠지, 성제 일당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니, 성님하고 수진이 하고 위로 잘해주고...
- 예, 나중에 전화할게요...
* * *
나와 유우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둥근 달과 초롱초롱한 별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QM5에 시동을 걸었다.
- 성제는 쉬운 상대는 아닐 거야, 그 일족들까지...
- 그런 거 같아, 흥미진진한데...
내 말에 동조하는 유우 얼굴이 홍조를 띠었다. 찬 공기 탓인지 아니면 성제 일족들과의 일전(一戰)을 앞둔 흥분 탓인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머리에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제발 그것만은, 이라고 몇 번이고 기도했다. 제발 그 일만은 벌어지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제발, 제발... 핸들을 놓자 차가 한쪽으로 쏠렸다. 얼른 핸들을 잡았다. 유우가 자는가 싶어 내 눈을 쳐다봤다.
* * *
- 왔어...
벨을 누르자 수진 누나가 문을 열어줬다.
수진 누나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와 이시하라 유우는 잰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눈부신 미모는 그대로인데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수진 누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다짜고짜 와락 안겼다. 이시하라 유우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울었다. 안으로 삼키는 오열을 했다. 나는 누나의 머리와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속으로 성제에 대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치밀었다. 한편으론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너와 나는 불구대천지(不俱戴天之) 원수다. 일말의 관용도 없다, 타협도 없다. 절대로... 네가 죽든 내가 죽든 결판이 나야 할 것이다. 아니 이건 너와 나 개인의 구원(舊怨)이 아니라 인류의 장래가 걸린 문제이기에 목숨을 건 대결은 불가피하다.
- 어머니는?
- 넋이 나가 앉아 계셔...
수진 누나가 그때서야 감정을 추슬렀다.
거실로 들어가자 베아트리체 엄마가 한달음으로 달려와 안겼다.
- 몽, 내 새끼, 잘 왔다...
- 괜찮아요, 어머니?
- 나는 괜찮다, 잠깐 놀랬을 뿐...
- 성제가 온 이유가 있을 텐데...
- 부산 재단이 있는 산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 관한 문서를 가져갔어...
내 물음에 누나가 답했다. 뭔가 있다. 장제갈이가 올해 대통령 선거에 나오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닐까? 떼놓은 당상이라는 대통령이 그 살인 사건 때문에 치명타를 준다? 그 서류가 아킬레스건이다. 의문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 그 문서 내용이 뭔데요?
- 너도 알아야 되겠지...
베아트리체 엄마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 우리 집안의 추악한 치부(恥部)지... 아버지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어,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가 주역이야... 조연은 작은아버지 장제갈이고... 성제가 그 내막을 알자 천방지축(天方地軸) 자기 멋대로 횡포를 부린 거고...
- 집안 어른 약점을 잡았기에, 성제가 악랄하게 이용한 거고, 비열한 놈...
유우가 듣다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 한 건?
- 여러 건...
- 뭐?!
나는 놀랐다. 유우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그만큼 추악해요?
- 엄마의 천석고황의 원인이지...
나는 베아트리체 엄마가 측은해서 다시 꼭 안았다.
베아트리체 엄마가 흐윽~ 소리가 날 정도로 터질 듯이 안았다.
- 설마 악귀가 든 술병은 건드린 거 아니겠지?
- 가져갔어, 선물이라며...
내가 베아트리체 엄마를 놓아주며 묻자 수진 누나가 울 듯이 말했다.
- 뭐?...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망연자실했다.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렇게 기도를 했건만, 기도는 공염불이 되었다. 이건 큰 사건 중에 큰 사건이었다. 이걸 어떻게 감당하지, 눈앞이 깜깜했다.
매사 장난끼로 일관하던 나도 바짝 텐션에 입이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