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그녀가 자꾸 걸리는 건...
- 공주께서는 몰라도 될 거 같은데요, 시간 많이 됐다, 몽대야 데려다 줘라...
- 니 차 갖고 왔을 거 아냐?
- 버스 타고 왔어요.
- 에라이, 썩을 놈... 당신이 데려다주세요.
나는 속으로 민교가 왜 차를 두고 왔지, 궁금해하며 머리를 갸우뚱했다.
- 가자, 그럼, 데려다 줄게...
- 내 아들 이거 왜 이러냐, 이렇게 센스 없는 놈인 줄 몰랐네... 아직 밥 다 안 먹었어, 어떻게 이런 애가 연애를 하냐, 구시대 유물만 발굴하더니 구시대 유물이 됐네.
내 아들이, 허 참...
아버지는 조선의의 호기심을 딴 데로 돌리려고 어머니가 한 말을 빨리 캐치를 못 한다며 나를 벽창호로 몰았다. 하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늘 나는 한발씩 느렸다.
민교는 해 질 무렵까지 집에 있었다. 여자 셋은 장소를 옮겨가며 수다를 떨었다. 아예 민교는 엄마가 내준 헐렁한 몸빼 바지로 갈아입었다. 옆구리로 간질며 깔깔대기도 했다.
내 딸 선의는 그 큰 눈을 반짝이며 턱받침으로 주로 듣는 쪽이었고 가끔 궁금한 게 나오면 물었다. 무궁무진한 어른들의 세계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날씨까지 도와주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수다 떨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부추부침개까지 부쳐 먹었다. 엄마가 주전이고 민교가 보조였는데 손발이 착착 맞았다. 가끔씩 호흡이 잘맞으면 손바닥까지 쳤다. 내 딸 선의도 어설프지만, 옆에서 일익을 했다.
아버지와 나는 마늘을 까고 부추 껍질을 벗기고 콩나물을 다듬었다. 하나씩 끝날 때마다 엄마가 하나씩 일거리를 가져다주었다. 아버지는 부추부침개를 얻어먹은 뒤 정당(政黨)에 일이 있다며 도망가듯 가버렸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던 민교가 드디어 집에 가야겠다며 일어났다.
엄마가 부추부침개 몇 개를 비닐에 싸서 롯데백화점 종이봉투에 담아서 민교에게 건넸다.
- 잘 먹을게요, 어머니.
- 자주 와, 우리 이빨 좀 까자, 입이 근질거려 죽겠어.
- 네, 어머니.
민교가 말끝마다 어머니였다. 다소 의도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아, 내 정신 봐, 밤 담아 온 바케츠 가져가야지.
- 아, 아뇨, 제가 그걸 가져가면 여기 올 핑계가 줄어들잖아요, 어머니.
- 그래, 그래, 맞다, 다음에 오면 거기에다 내가 김치를 담아주마.
- 고맙습니다, 어머니.
- 빨리 가자, 말이 많냐.
민교가 하는 게 가식적이고 노골적인 거 같아서 짜증이 나 채근을 했다. 그러나 엄마
는 그러는 민교의 아양이 좋은 것 같았다.
- 선의야, 조선의 국모가 될 조선의, 만나서 반가웠고 정말 즐거웠다.
- 응, 나도, 고모...
민교가 조선의를 와락 안았다. 선의도 받아줬다. 민교 눈에 눈물이 돌았다.
얘가 왜 이래? 지 딸인 것처럼, 속으로 같잖았다.
- 너도 바로 갈 거지?
- 야.
- 고모 집에 가는 건 아니고?
딸이 민교에게 고모라고 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나와 민교를 남매로 만든 그 이유
를... 선의의 발상이 앙증맞았다.
-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 거야.
- 아들, 자주 와라 좀...
- 무 썰게요?
- 밴댕이...
딸이 말했다.
- 뽀뽀 안 해줄 거야?
- 죽을래?
- 딸이 뽀뽀도 안 해주는데 여길 내가 왜 와?
- 그래, 그럼 내가 해줘?
- 엄마는 아버지가 있잖아요?
- 니도 민교가 있잖아, 둘이 잘 어울린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갑니다...
나는 서둘러 대문을 열고 나왔다.
* * *
밖은 어느새 비가 개어 있었다. 공기가 맑았다. 민교가 따라 나와 내 팔을 꼈다. 틀림없이 엄마는 대문 앞에 나와서 보고 있을 것이다. 딸은 나오지 않을 것이고...
팔을 빼려고 하자 민교가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야, 왜 이래? 좀 심하다.
- 팔짱 좀 낀다고 다 사귀는 건가? 안 쪽팔리려고 그러는 거지...
그래, 내 팔에 황금 두른 것도 아니고, 민교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렇다고 딱히 싫은
거도 아니잖아, 라는 생각에 그냥 뒀다.
- 애들 왔죠?
- 애들 어떤 애들...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 그럼, 그 새끼들 니가 보냈어?
팔을 빼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 거머리가 나왔어요, 4년이나 남았는데...
- 거머리?
- 성제 꼬봉 있잖아요, 성제 재크나이프 숨기려다 선배한테 얻어 차인 놈...
- 그 거머리? 니 애인?
- 애인 아냐, 아 진짜 너무하네, 선배...
- 애인 맞잖아?
- 어울려 다녔지, 남친 정도...
- 엄마 말은 다르던데, 니 그 새끼 좋아한다며?
- 한 때, 잠깐... 이젠 꼴도 보기 싫어요.
민교의 말에 단호함이 묻어 있었고 칼이 숨겨져 있었다. 그 칼이 누굴 향한 칼이지...
하다가 갑자기 망치로 누가 뒤통수를 친 것처럼 뭔가 뇌리를 스쳤다. 갑자기 민교가
측은해 보였다. 안아주고 싶었지만, 남들 눈이 많아 등만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한
행동에 민교는 울컥했다.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선배 이제 알았어? 하는 것 같았
다.
- 나 진짜 뒷북치지?
- 아니, 디비쫀다, 큭...
- 미안...
눈물이 가득한 눈을 들키지 않으려고 민교가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 술이 떡이 돼서 말했어요, 내가 성제한테 당하는 거 그때 알고 있었다고...
- 근데 왜 가만히 있었대?
- 내 말이, 앞에 놓인 소주병을 그 새끼 대가리에 내리치고 나와버렸지요. 그리고 그 새끼랑 소식을 끊었고...
- 거머리가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닐 텐데.
- 나 찾으려고 혈안이 됐지요, 나는 전포동 동태파 보스가 하는 술집에 나갔고요, 그 보스가 나를 보호해 줬어요, 거
머리는 기회를 엿보다가 조폭 간의 전쟁 핑계로 보스를 칼로 담그고 징역 10년 받았고, 모범수로 가석방됐대요.
- 근데 왜 나냐?
- 나 때문이겠죠, 내 앞에 나타나 꿇어앉아 울고불고 빌고 했지만 내가 단칼에 거절
했거든요, 침까지 뱉으며... 내가 의외로 세게 나오는 이유가 선배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안 그래도 그때 선배한테 발로 차인 게 개쪽 팔았다고 이빨을 갈았는데...
- 너, 나하고 사귄다고 했어?
- 아뇨, 미행했겠죠, 화왕산...
- 미행이 너냐, 나냐?
- 선배가 몰랐으면 선밴데, 선배랑 부닥친 거 보니 내 뒤를 밟았겠죠.
- 다 본 거 아냐?
- 그 넓은 산을 뒤져 찾았다고요?
- 하긴 가까이 붙었으면 니가 눈치챘을 테니까...
갑자기 민교의 쌍심지가 켜진다.
- 그리고 보면 어때, 쪽팔려요?
- 아니, 사람인데 멧돼지로 오인할까 봐...
- 아이 선배 진짜, 선의 말대로 죽을래?
민교가 내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 선배?...
- 응...
- 선배 나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내가 선배 좋아하면 안 돼요?
아 당황스럽네, 스에마쓰 아야코가 눈에 밟혔다.
니가 싫은 건 아니야, 그냥 그럴 수 없어...
겉으로 말은 못 하고 속으로 말했다.
미안해, 참아야 하는데, 그러면 홀가분할 텐데... 나쁜 놈 책임지지 못 할 일을...
나는 속으로 자책했다. 내 머리를 콩콩 쥐어박자 민교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무안해서 버지기처럼 헤, 하고 웃었다.
그때 갑자기 누가 뒤에서 나타나 민교를 안아 들었다.
민교가 소리치며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깍두기처럼 보이는 험상궂고 건장한 남자들이 나를 둘러쌌다.
얼핏 김해 공항에서 부닥쳤던 건달도 보였다.
- 이거 놔, 개새끼야?! 선배, 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세요...
- 오랜만이다, 좃몽둥이...
단박에 알아차렸다. 거머리였다. 깡마른 체구 그대로였다.
다른 건 눈 옆에 긴 칼자국이 있었고 어깨가 벌어졌고 더 새까매졌다는 거였다.
근데 까랑까랑한 경망스런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 오랜만이라며? 이건 아니지, 놔줘.
- 까고 있네, 대가리 수그리고 조용히 가라, 그럼 봐줄게.
- 내가 할 소릴 니가 하냐?
- 선배 가세요, 그냥, 제발...
깍두기 하나가 벤츠 문을 열었다. 거머리가 민교를 강제로 실으려고 했다.
차 문을 잡고 민교가 발버둥 쳤다. 그러다가 순간 얌전해졌다.
- 알았어, 갈게, 선배 놔줘, 그럼 순순히 따라갈게.
- 좋아, 타...
민교가 잠깐 방심할 때 거머리가 민교를 눈 깜짝할 사이 벤츠 안에 밀어 넣고 잽싸게 올라탔다. 그 사이 깍두기들이 내가 못 가게 내 앞을 막아섰다. 순식간에 벤츠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깍두기들이 덤볐다. 두세 명까진 감당이 됐지만 떼거리로 덤비는 데는 힘들었다. 이리차이고 저리 차이며 견디는데 깍두기 서넛이 쇠 파이프를 들고 나를 후려쳤다. 나는 용케 피했다. 그러다가 등짝을 한 대 맞았다. 등뼈가 내려앉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아팠다.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가 죽겠다 싶었다. 손을 옆구리에 넣었다. 용천이 손에 쥐어졌다. 용천을 빼자 용천은 잉어로 살아나 내 왼손에 감겼다. 왼손에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