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악마의 출현.
들으면 소름 끼치는 소릴 누가 했다.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내 몸이 기억해
소름을 돋게 했다.
일순 좌중 분위기가 얼음이 되었다. 그자를 아는 사람 모두 몸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E) 짝, 짝, 짝~
꼴에 손뼉까지 치고 들어왔다. 앞장서서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던 비서의 얼굴이
새파랗게 사색이 돼 질렸다.
일동 놀랬다.
그럼 그렇지 온갖 악행의 대명사 성제였다.
나에게 증오와 분노가 뭔지를 일깨워 준 자... 장성제...
악마의 대마왕... 저 악마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 나게 한 자.
개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면상을 들이미냐...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조온마난색기(趙溫馬亂色期)...
프레디 머큐리처럼 비단옷을 입었는지 화려하면서 번쩍거렸다.
꼴에 자기가 무슨 래퍼라고 목엔 황금빛 쇠사슬 목걸이를 찼다.
왜, 크라운 왕관도 쓰지, 보석이 박힌 지팡이는 어디 갔어?
성제 아버지 장제갈, 성제 엄마, 성제 큰아버지 장제우, 나중에 알았지만,
선의 외할아버지 그리고 거머리와 쫄다구 둘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 잘 계셨어요, 큰어머니... 수진 누나, 오랜만이다. 어, 몽대 잘 있었어?
베아트리체 엄마 얼굴이 굳어졌고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뭔가 치미는 것을 참는 것
같았다. 분노인지 증오인지는 주먹을 꽉 쥔 것을 보면 가늠할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애틋함이나 반가움은 추호도 아니었다.
수진 누나가 성제를 보자 마주치면 안 되는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화장실로 뛰어갔다.
- 니 눈엔 내가 잘 있은 거 같냐?
- 왜 그래, 임마?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 그럼 뭐냐?
- 내 덕으로 일본 유학도 갔잖아, 키득 키득.
- 말이라도 못하면 농아학교라도 보내지...
젓가락으로 눈까리를 찔러서 맹아학교도 동시에 보낼까, 큭...
내가 계속 삐딱선을 타며 성제 약을 올리며 비꼬았다. 이젠 내가 니 눈에
학폭이나 당하는 그런 어리바리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보란 듯이 의도적으로 세게 나갔다. 그러나 악마 성제는 그 정도로
흔들릴 놈이 아니었다. 유들유들 조소끼가 낀 썩은 미소만 날렸다.
- 형, 오랜만이네, 이젠 형하고 싸울 일도 없을 것 같다...
- 얼마나 천만다행이야, 앞 뒷집 살면서 등지고 말이야, 몽대 엄마 잘 있었어?
- 너무 행복하게 잘 있어, 보기 싫은 인간을 안 봐서... 이번엔 10억짜리 만찬을 만들어 줘?
- 몽대 엄마 그땐 너무했다... 잘 먹긴 했지만, 호호호...
장제갈이 아버지를 보자 친한 척했고 엄마는 성제 엄마에게 나보다 한술 더 떠
대놓고 적의(敵意)를 나타냈다. 성제 엄마도 만만찮아 심사를 긁으며 넘어갔다.
- 얼굴에 돈 좀 줬네, 돈 더 들게 해줘?
- 그러지 마, 잘 지내자, 이제 성제 아빠, 내나라 한국당 대통령 후보가 돼,
우리끼리 하는 소린데 내정되어 있어, 경선은 컨벤션효과(Convention Effect)를
노린 거구... 이젠 대통령이 될 텐데 좋든 싫든 내 나라 내 백성인데 싸울 필요가
뭐 있어, 안 그래, 몽대 엄마?
성제 엄마의 말은 화해가 아니라 사는 계층이 달라지니까 상대가 안 된다는 뜻으로
낭창낭창 그 이유를 뻐기며 설명했다.
그런데 예상 밖에서 예기치 못하는 일이 터졌다.
- 할머니, 썬디야, 썬디... 어떻게 썬디를 여기서 보다니, 아싸, 너무, 너무 좋아.
선의가 엄마 등 뒤에 숨어 거의 숨넘어가며 좋아했다.
얼굴을 뺐다 넣었다 하며 좋아서 폴짝폴짝 뛰었다.
여자라고 부끄러워 얼굴까지 불그레 졌다.
선의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본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건 돌발변수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악재(惡材)였다. 너무 당황해 당장 대책이 서지 않았다.
머리가 하얘졌다. 엄마도 아버지도 그런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냥 멍하게 서 있었다.
- 니 이름이 뭐니?
- 몰라도 돼, 알아서 뭐 할래!
- 왜 과민반응이야?
눈치 빠른 성제가 조선의의 과도한 반응을 보고 선의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듯이 비식이 웃으며 물었다.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성제가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전광석화였다. 주위 사람들은 뭐지? 할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나는 가볍게 피하고 뒤돌아 차면서 오른쪽 발을 성제 얼굴 10센티 앞에서 멈췄다.
내가 누구냐, 무예(武藝)의 신(神) 숙모의 지도하에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조몽대 아니냐, 쉽게 당할 내가 아니지...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랬다. 베아트리체 엄마 얼굴에 슬쩍 미소가 지나갔다.
거머리 일당들이 움직이려고 움찔했다. 성제가 손을 들어 거머리 일당들을 막았다. 그래도 장성제 아닌가, 눈앞에 발이 왔는데도 눈도 깜짝 안 했다. 아마 10센티 안으로 들어갔으면 피했을 것이다. 10센티가 마지노선이었다.
짜식 아직 살아있네... 나는 속으로 한마디 던졌다.
- 약물에 찌들었다더니, 정말인가 봐? 이 정도를 피하지 못하다니, 얼굴로 먹고
사니 이 형님이 봐준다.
오른쪽 발을 내리면서 내가 성제 약을 바짝 올렸다.
- 넌, 이젠 한 주먹도 안 돼, 자슥아...
성제는 분함에 못 이겨 붉으락푸르락하며 악마의 얼굴이 되다가 갑자기 온순한 양으로 변했다. 정식 싸움이었다면 내 발목은 부러졌을 것이다, 왜? 멈췄기 때문에...
잔인한 성제도 그 생각을 실행하지 못했기에 더 약이 오른 거였을 것이다.
- 복수의 칼을 갈았네, 자슥, 유치하게 장난을 목숨 걸고 하네, 박장로, 손녀
안 보고 싶었어요? 얘 니 외할아버지야, 인사해, 그래야 착한 아이지...
- 썬디는 착한 아이였어요?
성제가 선의의 당돌한 질문에 살짝 당황했다.
- 내가 어땠을까? 맞춰봐?
- 사인해 줄 수 있어요?
- 어, 그래.
선의가 성제의 상투적인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딴소리를 했다.
성제는 의외로 선의가 호감을 보이자 예상치 못한 거라 오히려 당혹스러워했다.
- 너, 나 아니?
- 그럼요, 썬디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마존 원주민도 썬디라면 뻑 가는데.
- 그래, 내가 그 정도야?
- 의외로 겸손하다...
성제는 선의의 거침 없는 말에 당황하다가 기분이 좋아졌다. 스스로 대견해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이런 인물이야 하듯 주위를 둘러봤다.
성제 엄마와 아버지는 흐뭇하게 지켜봤고, 따라온 SD 직원은 소리 안 나는
손뼉을 쳤다.
- 딸 본 좀 받아라, 넌 날 원수 취급하지만, 딸은 날 신처럼 받들잖아.
- 신은 아니고 노랠 좋아해요, 인간성은 알 수가 없고, CD도 샀어요.
가사가 좀 유치하지만, 아저씨 나이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어요.
성제는 선의의 거침없는 말투에 놀랐다. 10살짜리 애가 아니라고 느꼈다.
쨔샤, 내 딸이 이 정도다, 넌 잽이 안 돼, 경상도 말로, 알로 기라, 짜샤, 그러고
싶었다.
나는 성제 일행들을 둘러보며 어깨에 힘을 넣었다.
- 집에 몇 집까지 있어?
- 다 있어요, 10집까지.
- 가지고 온 CD 있어?
- 아저씨 오는 줄 몰랐는데 어떻게 가지고 와요?
나는 성제의 순한 양의 얼굴을 한 모습에 속이 언짢았고 부글거렸지만,
성제와 선의의 대화를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도 아버지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선의에게 예기치 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렇다고 썬디라는 인간은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인간이다. 너를 끔찍한 악몽 속에
서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다, 천벌을 받아야 할 마땅한 인간이다. 절대로 상종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거 자체도 선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느
꼈다. 진퇴양난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심정이라 착잡했지만, 창졸간에 어떤 변수로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워 만반의 준비를 했다.
성제가 같이 온 일행에게 손짓했다.
수행 비서로 보이는 사내가 CD를 가지고 왔다.
- 자, 이번에 나올 아직 발표 안 한 11집 CD다, 이리와 싸인해 줄게...
- 네에~ 정말요, 두말할 건 아니죠? 감사합니다. 썬디~
선의는 아무런 경계 없이 좋아하며 성제에게 다가갔다. 말릴 틈도 없었다.
성제가 싸인한 CD를 선의에게 건넸다.
- 와, 감사합니다, 우리 반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아저씨 짱!
그때 갑자기 성제가 선의를 안았다.
- 아저씨 왜 이래요? 성추행이다!
- 뭐, 우하하하 귀엽네, 너 외할아버지한테 안겨 봐, 박장로 외손녀 안아보세요?
- 할아버진 이 세상 단 한 사람뿐이에요, 저기 있네요, 이거 놔요, 물기 전에?!
선의가 싫다며 발버둥 쳤다. 박장로라 하는 선의의 외할아버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망설였다.
그때였다.
(E) 챙그랑!!
우리는 깜짝 놀랐다.
이건 분명 술병 깨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두꺼운 술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