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폭풍전야는 늘 그랬다.
- 솔직히 말해 여기 있는 여자, 나 빼놓고 다들 대단하지만, 그 애한텐 조금... 아 무튼 그래...
- 뻥이야, 다 뻥~
- 뭐가, 뻥이야, 진짜로 그래... 수진이 너랑 비교해도 어금버금할걸, 물론 버금이지만...
- 네, 제가 그 정도예요?
- 그럼, 넌 세계 최고잖아, 특히 그거는, 큭
- 감사합니다, 작은어머니...
- 그래서 내가 뻥이라고 하는 거야, 누나가 어디 볼 게 있어, 엉덩이 말고는...
- 그렇지?...
누나가 실망했다.
- 이게 진짜 등짝을 한 대 더 맞고 싶나? 이해해라, 수진아, 니가 좋아서 그러는 거
다. 남자라는 종내기들은 다 그래, 사실 유우도 엄청 이쁘긴 이뻐? 너랑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미모야?...
- 맞아요, 일본에서 엄마 세대의 3대 미녀는 이시하라 유우 엄마, 스에마쓰 아야코
엄마, 노무라 쥰페이 엄마고 우리 세대는 스에마쓰 아야코, 이시하라 유우를 최고
의 미녀로 꼽지요.
일본에 살지도 않았는데 수진 누나는 훤히 꿰고 있었다. 인터넷에도 유투브에도 나오
지 않던데 수진 누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수집하는 루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앱이 있나? 가입비가 비싼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 지성과 미모를 갖춘 전설적인 두 천재, 쌍벽을 이룬다는 두 걸물이 스에마쓰 아야코랑 이시하라 유우란 말이지? 방금 화장실로 간 유우가 그 유우라 말이지?
- 응, 일본 역사 이래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고 정평이 나 있어, 그런데 황송하게도
거기에다 나를 끼워 넣다니 정말 감사하지.
스에마쓰 아야코는 나랑 사귀었을 뿐이라 그녀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면 누가 그걸
믿으라고 할지 몰라도 이시하라 유우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얼핏 이름 정도는 알
았지 그 이시하라 유우가 이 이시하라 유운지 내가 알 바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당시에는 놀기 바쁜데 이름만 잠깐 이야기 중에 떠오르는 여자에 대해 깊숙이 물어
보는 것도 이상했다.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 다른 재미난 화제(話題)나 신나는 일들
이 많은데 공중에 떠다니는 홀씨 같은 이름에 내가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지금 와서야 고분 발굴도 같이하고 범상치 않은 미모라 회가 동하기도 하고 해서 관
심을 가졌고, 조달호 교수가 이시하라 유우에 대해 알려줘서 대단한 집안의 딸이구나
정도였다.
- 누나는 아니야.
- 그래? 그럼, 그렇지...
내가 놀리는 줄 모르고 누나는 순진하게 내 말에 또 실망했다.
- 사실... 내 이말 안 하려고 했는데 누난, 인구가 많아서 많기도 하겠지만 그 미인
많다는 중국에서 최고로 이뻐, 내가 인정할게, 엄지척이야.
- 정말? 놀리는 거 아니지?
무슨 이유로 자지러지게 기뻐하는지 모르겠는데 수진 누나는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이시하라 유우가 없으니까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해줘서 그런가? 큭, 만구 내 생각이고...
이쁘다고 하는데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겠냐 다들 그러지만 수진 누난, 앞에서도
기술(旣述)했듯이 지상의 미모가 아니었다. 처음엔 베아트리체의 딸이니까 그렇다 생
각했는데 친모가 엄청난 미인인 게 확실한 것 같았다. 수진 누나 아버지, 성제 큰아
버지도 형제지만 성제 아버지와 기품에서 차이가 났다. 성제 아버지는 된장 섞인 마초 냄새가 났다면 수진 누나 아버지는 귀공자 같았다. 그러나 외모는 아버지 쪽이 아니라 친모 쪽인 것 같았다. 수진 누나 아버지와 세워놓고 봤을 때 빼다 박았다 소리는 안 들을 것 같았다. 수진 누난 아버지에게는 없는 자체 발광 아우라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누가 봐도 베아트리체 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 그럼, 내 눈이 정확해, 넌 정말 미인이야. 나라 몇 개를 절딴 낼... 여자인 내가 봐도 부럽고 질투 날 정도로... 상상 속에서 그려도 이렇게는 못 그릴걸.
엄마까지 수진 누나 미모 칭찬에 열을 내고 침을 튀겨가며 거들었다.
아들인 나를 출세시키기 위한 엄마로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엄마는 태생적으로 손
비비고 그런 것을 못 했다. 수진 누나에 대한 느낌은 엄마가 가졌던 감정 그대로라고
봐야 했다.
- 나도 인정, 엄마가 딸 자랑한다고 할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 이젠 그런 거 다 부질
없더라, 내 딸 내가 자랑 안 하면 누가 하냐, 넌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미
인이야.
- 그럼요, 성님...
엄마 말에 베아트리체 엄마가 방점을 찍자 잇달아 엄마는 못을 박았다.
누나는 좋아서 눈물을 글썽였다. 진짜 누나는 자신을 과소평가했나, 아니면 자신을 몰랐나, 그런 척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공부하고 사업하고... 이런 일에 매진해서 신경도 안 썼나?
- 누나, 이럴 땐 자뻑 해야 자연스러워, 아닌데, 몰랐단 줄로 있다가, 그랬어?
정말이야? 이런 과도한 반응은 좀 역겨워, 킥...
- 상관없어, 아야코나 유우와 같은 레벨로 올려주는데 이 정도의 표시는 과도한
것도 아니야, 비꼬아도 좋아, 난... 이게 자연스러운 거야, 큭...
누난, 진심인 것 같았다. 하긴 공부에다 일에다 묻혀 살다 보면 자신의 모습을
하얗게 잊을 때도 있을 것이다. 입은 모습이, 원칸 원판이 뛰어나서 세련되고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이지, 실은 옷을 알고 세련되게 입은 게 아니라 아무렇게
입었는데 우리가 몰랐을 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누나는 어떻게
옷을 입든 다 잘 어울리니까, 아니면 타고난 감각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옷장에 있는 옷이 비싸니까 세련된 명품일 거라는 선입견으로 불 수도 있고,
암튼 누나나 그들 부류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과 옷 입는 것도 달랐다.
한편으론 저렇게 유지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애잔함도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옷도 몇 번 갈아입고 거울도 몇 번 보고 했는지 제법 세련돼 보였다. 약간
화장빨이 강한 거 보면...
- 몽대야, 아야코라는 그 여학생 집에서 우리 못 산다고 결혼 안 된대?
이 무슨 홍두깨지? 가만히 있다가 아버지가 술을 빌어 불쑥 한마디 날렸다.
황당했다.
- 아버지, 그건 좀 호들갑이다... 사귀면 다 결혼해? 아버진 한 번씩 엉뚱하더라.
- 응, 그래서 난 니 아버지랑 결혼했잖아... 정말 이뻤는데, 아쉽다. 우리 수진이나, 유우도 보기 드문 미녀지만 몽대 애인도 나라 하나는 거뜬하게 무너뜨릴 미인이었는데, 미인 며느리 둔다고 네 아버지 얼마나 좋아했는데, 이놈아, 좀 잘하지, 지 손에 쥔 사과나 간수 잘할 생각 안 하고, 또 남의 사과가 맛있나 하고 기웃거렸지...
- 아 좀, 아니라니까, 내가 바람둥이야?
- 응, 넌 그럴 거야, 니 이버지 빼고 니네집 전통이고 내림이잖아...
- 정말요?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몽대가 바람기가 있구나...
수진 누나가 페이스를 찾은 거 보니 충격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 뻥이야, 믿지 마, 누나, 아무튼 노무라 쥰페이는 내가 한 번 만나볼게,
보지 않은 지는 오래됐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안 만난 거라, 만나면 어제 만난
것처럼 날 살갑게 대할 거야.
- 쥰페이라면, 너한테 목숨 건다고 한 일본 친구잖아? 나도 너에게 그 친구를 위해
목숨 걸으라 했고.
- 맞아요, 엄마가 아들로 생각할 정도지, 나하고 쥰페이 하고 둘 중 누굴 아들로
하고 싶냐고 했을 때 엄마가 1도 망설이지 않고 쥰페이라고 했잖아.
- 그럼, 당연하지, 상아를 빚은 듯이 잘생기고 키도 모델 이상으로 늘씬했는데 내가 미쳤나 널 택하게.
- 하여튼 저럴 땐 칼 같다니까, 쥰페이가 엄마 젖 만진다고 하면 덜렁 그래라, 할걸?
- 아냐, 그건 아무리 그래도...
엄마가 뜬금없는 엉뚱한 내 말에 질겁하고 몸을 사렸다.
- 그럼 불공평하잖아요, 쥰페이 엄마는 내가 대뜸 어머니 젖 만져도 되나요? 그러니까 동공이 좀 흔들렸지만 그래 만져라고 했어, 쥰페이는 자궁으로 낳은 아들이고 나는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했어, 엄마는 어쩔 건데?
- 그랬어? 하긴 나도 쥰페이 엄마처럼 그런 비슷한 말 하긴 했어...
한 번 생각해 볼게...
- 뭘 생각해, 그러면 쥰페이나 쥰페이 엄마가 기분 나쁘지, 엄마 때문에 쥰페이
엄마 젖 못 만지겠네, 엄마도 빠른 시일내에 결단을 내리세요, 아버지 의견 묻지
말고, 아버지도 쥰페이를 아들로 생각하니까 엄마 젖 만져도 되지요?
아버지는 미소를, 베아트리체와 수진 누나는 푸하하! 웃었다.
포커페이스 선의가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나를 잡아먹을 듯이 흘겨봤다. 나는 바로 외면하고 쟁반에 든 오렌지
조각을 포커로 찍어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입 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키득 웃었다.
- 너, 이놈, 날 놀리는 거지, 어이그 인간아, 언제 철들래?
-윽~
엄마는 그제야 내 농담에 넘어간 줄 알아차렸다.
이번엔 선의가 방석으로 내 얼굴을 강타했다. 그리고 씩씩댔다. 금방 울 거 같았다.
안 되는데 저 큰 눈에 눈물 맺히면...
- 큰엄마한테 물어봐, 젖 만져도 되냐고...
- 아, 싫어 싫어, 묻지 마, 나 그래라 마라 못해. 고등학생 때면 몰라도...
엄마의 짓궂은 장난에 베아트리체 엄마가 얼굴이 발개지며 기겁을 했다.
근데 내가 물어보면 마지 못해서일지라도 그래라, 하실 걸, 큭...
- 분위기 좋고 화기애애하고, 꽃이 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