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148화)
세속이라서 좋다.
엄마가 수진이 누나가 의기소침할까 봐 부러움을 표하자 베아트리체는
엄마보고 기죽지 말라며 일어나 엉덩이를 내보이다가 아버지가 베아트리체
엉덩이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무심결에 흘겨봤다. 아버지가 볼 거라 알면서도
베아트리체는 과도하게 놀라 풀썩 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엉큼하다며 아버지 옆구리를 찔렀다.
우린 한바탕 웃었다. 스스럼없었다. 다 내려놓았다. 세속적이라고 해도 좋다.
겉치레는 싫다. 껍데기를 벗어야 인간이 보인다, 껍데기는 가라, 그거였다.
그걸 베아트리체가 솔선했다.
내가 알던 베아트리체가 아니었다. 완전히 환골탈태했다. 언제나 뒤에서 지켜보며
감정을 극도로 자제했었는데, 말뿐만 아니라 지금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자리를
희화화(戲畫化) 시켜버리지 않는가,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베아트리체여...
- 우리처럼 이렇게 가볍게 웃고 넘어가면 얼마나 좋아, 사람 사는 게 이런 건데
말이야... 근데 이런 큰 프로젝트 앞두고 수진의 베이징 대학 엉덩이 해프닝이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 괜한 기우이기도 하지만...
- 세인들에게 빠른 각인은 여론을 움직일 수도 있잖습니까?
베아트리체의 일말의 걱정에 나는 기우(杞憂)가 아니라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 솔직히 어머니가 걱정하듯 내가 벌인 객기가 고민이 되긴 해...
- 행동의 제약을 받을 수 있겠군요?
수진 누나의 우려에 이시하라 유우가 자기 느낌을 말했다.
- 수진이는 이 프로젝트의 중추적인 인물에 경영자의 한사람이야, 좋게 부각(浮刻)
되면 그 해프닝이 이미지 개선에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나 온갖 중상모략(中傷謀
略)과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는 사업이 될 텐데 언론 매체가 순진하게 가만두려나,
특히 유투브가, 구설수와 가짜 뉴스는 끊임없이 양산될 거고, 그 해프닝은
양념처럼 뿌려져 주객이 전도될까 살짝 걱정되긴 해, 그렇다고 언론을 움직일 수 없어,
이런 일은 특히 그렇지, 오히려 역효과가 클 거야, 긁어서 부스럼 만드는 거지.
- 노이즈 마케팅도 있는데, 그리고 누나가 선한 이미지잖아요? 저 큰 눈 보면 여론의
향방도 제 갈 길을 잃고 누나를 동정하는 쪽으로 흐를 겁니다, 한 마디로 본질과
다른 이미지로 세탁되는 거죠, 뭐.
똑똑한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베아트리체의 심각함에
농담을 덧칠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진 누나가 나를 흘겨봤다.
나는 외면하며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했다.
수진 누나가 방석을 움켜잡았다.
겹눈으로 봤다. 언제든지 피할 만반의 준비는 돼 있었다.
그런데...
(E) 퍽!~
- 윽~
엄마가 먼저 방석으로 내 얼굴을 후려쳤다.
-나이스 샷, 감사합니다, 작은엄마, 메롱.
- 아들, 넌 어째 일평생 진지함이란 없냐?
무방비 상태에서 난데없이 엄마의 한방이 날아왔다.
수진 누나는 고소하다고 격하게 손뼉을 쳤다.
베아트리체 엄마는 재밌다고 까르르 웃고
이시하라 유우는 아주 짧은 순간 놀라다가 다시 포커 페이스로 돌아갔다.
- 여론은 새털과 같은데...
진지한 표정을 한 내 딸 조선의가 의외로 한 마디 툭 던졌다.
- 조작(造作)은 문제가 되지만 새털을 날리는 바람이 중요하다...
- 유투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카톡 등 SNS 세상이니까...
수진 누나가 조선의 말에 일리가 있는지 귀가 번쩍 띄어 즉각 반응했다.
선의가 구체적으로 바람을 일으킬 SNS 종류를 열거했다.
아, 그 말이었구나, 나는 그때야 선의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10살 된 어린 선의를, 흔히들 나이로 말하면 어른들
세계에 끼어들게 했다는 것이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이 큰 프로젝트에 옵서버(observer)가 아니라 중심 멤버로 말이다. 나중엔 상상을 초월하는
1,000조(兆)나 되는 엄청난 사업 규모인데 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로 보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었다.
선의의 영특함과 능력은 이미 검증되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파격에다 획기적인 대사건이었다.
선의 입장에선 뭘 그런 걸 가지고 하겠지만, 아빠 입장에선 드러내놓고
미소는 보이지 않아도 흐뭇한 일이었다. 이젠 숨어서가 아니라 드러내놓고 선의의 의
견과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거도 같았다. 우리 프로젝트 최연소 경제 고문? 큭...
아버지는 선의가 대견한지 말없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선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는 선의가 자랑스러워 뺨에 뽀뽀를 쪽 했다.
베아트리체가 그 모습을 부러워했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은 내가 뺨을 내밀었다.
가까이 있었으면 정말 뽀뽀했을지도 모르지만, 베아트리체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찍어 나에게 보냈다.
난 갑자기 울컥했다. 두엄바가지 같은 인간이 뭐가 좋다고, 아들이 살아 있으면
저렇게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목숨 같은 아들이 피워보기도 전에 어린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하직했으니, 증오와 원망으로 자라난 악귀가 된 암을 온몸에 안고 살아 온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사랑해요, 베아트리체 엄마...
손가락으로 살그머니 하트 표시를 했다. 당연히 은은한 미소와 함께 베아트리체도 하트를 보냈다.
남이 봤으면 이 둘 사이 뭐지? 의심할 만했다.
아니나 다를까 모친 곽세린 여사가 눈이 똥그래져 베아트리체를 보고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나? 그런 눈치였다.
나는 모른 척했다. 큭큭, 엄마도 사랑해요... 엄마, 쪽~ 샘내지 마요...
- 하버드대 설립자 동상에 오줌 누는 짤 많이 나돌아, 모자이크 처리해서...
고모는?
- 난 없어, 진짜야. 졸업 못 할까 봐 안달이 난 애들이 하는 짓이야, 그런데 내가 왜? 수석을 뺏긴 적도 없었고, 난 조
기 졸업했어... 결코, 네버.
선의의 송곳 질문에 누나는 단호했다. 그 단호함이 당황처럼 비쳤다.
극구 부인하는 걸 보니 살짝 의심이 들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했나... 헤,
가자미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나를 발견하고는 누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 눈깔아! 씨...
나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 꼭 졸업 때문에 그러는가? 노출증 뭐 이런 거... 찾아봐야겠다, 그 짤...
놀부 심보의 내 말에 누나가 목이 타는지 입에 댄 술잔을 던지려고 했다.
엄마! 하며 베아트리체에게 도움을 받으려다가 선의가 인간아, 하듯 나를 째려봐서
입속에 우물거리고 말았다.
- 그러니까, 앞으로 벗은 장면 찍은 것도 아닌데, 서양은 엉덩이 까고
흔드는 거 많이 해, 대륙횡단 열차만 지나가도 남녀 없이 엉덩이 까고
흔들잖아. 살이 튼 엉덩이를 말이야.
나는 나를 표독스럽게 쳐다보는 누나에게 어깨를 올리고 두 손으로 내가 왜? 했고
선의는 무미건조하게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 꼭 찾아봐야지, 헤
- 자꾸 하면 추해진다.
- 미안...
누나가 쌍심지를 켰다. 말에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이럴 땐 무조건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나는 불쌍한 눈을 하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순진한 여자들은 이쯤에서 져 줘야 바로 측은지심 모드로 돌아가니까,
누나 바보, 킥...
- 자금 조달은 속전속결로 가죠.
이시하라 유우의 질투의 방식은 차가운 진지함이었다.
이 화제에 같이 끼어드는 건 수진 누나에게 지는 것이다, 라고 유우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화제의 방향을 바꿨다. 왠, 시시껄렁한 소리냐였다.
그러나 여기서 심한 무관심은 강한 애정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유우는 정말 모를까? 아니면 이런 식의 관심 표명으로
견제하는 것일까? 악수(惡手)일까? 고도의 전략일까? 벽창호인 나는 유우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 시간을 끌면 끌수록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비용이 발생한다, 그럴 수 있지...
이시하라 유우의 제안에 베아트리체가 진지 모드로 바꿔 동의했지만 진중한 표정도 풀지 않았다.
- 어차피 구해야 할 자금도 만만찮을 테니까요.
유우가 구체적인 이유를 대었지만 반면에 방금까지 여느 여염집 아가씨에서 심각해진 대기업 경영자 자세로 바뀐 수진 누나는 끝까지 신중한 모드를 풀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일괄(一括)로 가느냐? 시작하고 단계적으로 차차 조달하느냐? 고민이 되네...
나도 한 마디 던져야 할 때인 것 같아서 내뱉었지만, 찬찬히 내 말을 뜯어보면
내가 생각해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우, 베아트리체, 수진 누나는 반응 없는 무표정이었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선의만 나에게 그런 뜻의 눈을 흘겼다.
- 어떻게 시작하든 이 프로젝트 신용 평가서가 우선 급선문데, 문제는 어떻게
탑 시크릿을 유지하며 가느냐지...
- 스탠다드 푸어스(S&P), 무디스(Mood’s), 피치(Fitch)에 하버드 대학 동기들이
있으니까 우선 간을 볼게요.
삽 들고 땅 파면 사업 시작하는 거지, 왜 베아트리체가 말한 신용 평가서가 우선 필
요한 것인지 모르겠고, 거기에 동조해 누나는 삼척동자도 아는 세계 3대 신용기관은
왜 들먹이는지, 집 지을 설계 도면이 우선 필요한 거 아냐? 도통 내 지적 능력으론
알 수가 없었다.
- 노무라 쪽은 제가 알아볼게요...
- 노무라라면 노무라 증권?
- 응...
유우의 말에 머리에 뭔가 획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어서 내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