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무령공주가 등장하다.
- 여기 있었네, 왜 말을 안 해?
- 아, 그렇게 됐어...
- 말 울음소리가 들리던데요?
모진과 마노가 궁금해했다.
- 아는 사람이에요?
- 응?... 어, 공주야.
- 공주라고요? 이곳에서 만난 사람이...
마노가 이상해서 물었다.
- 무령공주래, 자기가...
- 뭐, 무령공주?...
말로의 대답에 모진은 온몸에 전율이 오고 소름이 끼쳤다.
들었던 이름 같았다. 귀에 익지 않고 선명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아는 이름 같았다.
- 흉노족이네요?...
- 응, 그럴 거야, 우리하고 모양새가 달랐어...
마노의 말에 말로가 확신을 심어줬다.
- 가자, 해 떨어진다... 앞으로 가도 혼자 가지 마, 여긴 아직 위험한 곳이야.
- 응, 누나. 근데, 누나... 아냐...
- 할 말 있어? 해.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고 모진이가 물었다.
- 아냐, 하지 마,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물은 말을 거둔 모진, 말을 타고 먼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발개진 얼굴은 숨길 수가 없었다.
말로도 누나, 같이 가! 하고 말에 올라 뒤따라 달려갔다.
마노는 영문을 몰라, 하며 말을 타고 뒤따랐다.
* * *
말로, 모진, 마노가 진영으로 돌아왔다.
- 앞으로 내 눈 밖으로 벗어나지 마, 다들 걱정했잖아.
- 나 보다도 형이 더 걱정스러워.
벽로가 제법 위엄있게 말로를 꾸짖자 말로가 또박또박 말대꾸했다.
둘을 쳐다보는 형들이 우습다고 미소를 짓는다.
- 맞는다.
-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해, 그럼 받아주지.
- 좋다, 수로형 뭐로 할까? 목검? 아니야, 격투로 하는 게 좋겠어.
- 싫어, 목검으로 해.
- 수로 형이 격투로 하라고 고개를 끄덕였어.
- 정말이야, 수로형?
말로가 돌아보며 수로의 의사를 물었다.
그때 동시에 벽로가 칼집 손잡이로 말로 턱을 치켜올렸다.
- 넌, 졌어, 이렇게 빈틈이 많아서야... 너가 적군이었다면 네 목은 날아갔어,
졌지? 인정해.
- 싫어, 말하고 있는데, 이런 게 어디 있어? 반칙이야.
- 전쟁에 반칙이 어디 있어, 이기는 게 규칙이지.
- 벽로 말이 맞다.
대로가 나서서 벽로 손을 들어줬다.
- 대로 형은 벽로형 편만 들어주면서... 아, 수로형 아까 누굴 만났어...
- 그래?
- 형 이름을 묻던데, 무령공주라고... 얍!
말로가 모두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갑자기 대로에게 발길질을 하고
칼이 든 칼집을 대로 정수리를 향해 내려쳤다.
그러나 대로가 가볍게 발은 발로 칼은 칼로 막았다.
모두 웃었다.
졸지에 바보가 된 듯한 말로가 창피해서 붉으락푸르락 반쯤 울음 상태다.
- 우리 집 막내는 대장부가 아니고 울보래요, 울보 말로, 킥킥
벽로가 놀리다가 말로가 분기탱천(憤氣撑天)하는 것을 보고 냅다 달아났다.
- 거기서, 형, 가만 안 둘 거야!!
말로가 벽로를 뒤쫓아가자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 아, 아...
등창이 성이 올라 아로가 엄청 고통스러워 괴로워했다.
- 사고팔고(四苦八苦) 온갖 고통이 몰려오면 곧 시원해질 겁니다, 하라어의 좋은
기운이 토루(土螻)의 나쁜 독과 싸우는 중입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아로님...
마노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차분하게 설명하고 아로에게 위무(慰撫)했다.
그리고 송골송골 맺은 땀을 고운 천으로 닦아줬다.
- 바람이 차다, 막사로 들어가거라.
- 그래, 그게 좋겠다. 들어가자...
수로의 걱정스러운 말에 상념에 잠겨 있던 모진이가 정신을 차리고 수로 말을 거들며 서둘러 아로를 챙겼다.
병사 넷이 모진이의 손짓으로 부리나케 와서 아로를 수레로 만든 가마에 실어
막사로 들어갔다.
모진이와 마노가 뒤따랐다.
- 난 주변을 둘러볼 테니, 넌 동생들과 함께 부하들과 어울리거라. 우리 중에 아무도 없으면 부하들이 섭섭해한다. 아로가 어울릴 수도 없고...
- 나보다 부하들이 형을 찾을 걸, 내가 돌아보고 올 테니, 형이 먼저 시동을 걸어,
내가 마시기 시작하면 진중(陣中)에 있는 술로는 턱도 없어, 내가 술 더 가지고
오라 주사(酒邪) 부리면 골치 아파, 으하하하!
- 그나마 주당(酒黨)이 낫잖아, 난 주신(酒神)이잖아, 으하하하!
수로는 대로를 위했고 대로는 수로를 위했다.
수로는 그러는 꿍꿍이속이 있었다.
* * *
수로는 의문의 여인이 문득 떠올랐다. 그 여인의 이름이 무령공주라?...
호기심이 발동했다. 무딘 대로가 수로의 마음을 읽을 수나 있나...
수로는 냉큼 애마 오려마에 올라타고 달려 나갔다.
수로의 친위대 현갑 기마대 100여 명이 동시에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말을 탔다.
수로가 말 위에 탄 채로 달리며 수신호로 따라오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친위대가 대로를 쳐다봤다. 대로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위대 모두 말에서 내렸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술판을 벌였다.
그들은 일촉즉발(一觸卽發)이 몸에 뱄다. 여차(如此)하면 그들은 이미 말 위에 타고 있었다.
김궤의 부대 1,500여 명의 군사가 벌이는 잔치가 실로 장관이었다. 수십 개의 막사를 치고 막사 앞 공터엔 불을 피우고 인어공주 도영이 선물한 생선과 도살(屠殺)한 가축의 육류(肉類)를 지지고 볶고 삶고 굽고 국 끓이고 고슬고슬한 밥을 퍼서 돌리고 소주, 말거리, 고량주, 청주 등 술을 권커니 잣거니 하며 취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인생사 그 무엇이냐
하늘은 가까운데
술잔 가득 허무를 담네
즐겁고 흥겨운 축제였다. 신나고 가슴 벅찬 소풍이었다.
목검으로 실력을 겨누고 소부대끼리 씨름을 하고 내로라하는 자들끼리 격투를 하고
우 몰려다니며 격구(擊毬)를 하는 혈기방장(血氣方壯) 젊은이들이 청춘을 불태웠다.
점입가경(漸入佳境)에 금상첨화(錦上添花)로 기암괴석을 병풍처럼 삥 둘러친 호수는
강을 품었다. 풍광명미(風光明媚)의 천자만홍(千紫萬紅)이 펼치는 산천경개(山川景槪)
는 절경(絶景)이라 신선들이 산다고 한들 어느 누가 믿지 않으리... 그럼, 저들은 옥황
상제의 군사들인가? 그렇게 보였다.
산꼭대기에서 보거나 아름드리 천년송 나무 위에서 보거나 누가 봐도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이 착각할 정도로 한 폭의 신선화(神仙畵)처럼 보였다.
맥의 눈에도 그렇게 비췄다.
가물에 콩 나듯 벌어지는 사기진작 겸 위로 잔치에 회포(懷抱)는 허심탄회(虛心坦懷)
해야 했다. 가슴 한구석에 남겨두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 같아 병사들은 악을 쓰고 땡
깡을 부리고 광란의 질주를 하고 일탈을 즐겼다. 마음 맞는 남녀 병사들은 나무 뒤나
숲속이나 바위 뒤나 빈 막사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의 살을 태웠다. 1세기가 시작하
는 초(初)에는 다들 그랬다. 흠이 아니었고 남이 부러워는 해도 남부끄러울 게 없었
다. 멋모르고 지나가다가 성애(性愛)의 장면을 본들 지나가는 사람이 비켜 가면 그만
이었다. 주변 사람을 생각해서 몸을 숨기는 정도의 약간의 예의만 갖추면 되었다. 추
문(醜聞)이나 손가락질을 받을 몹쓸 짓도 아니었고 더욱이 그걸 가지고 시비 걸 이유
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랬다. 일종의 풍속이었다. 삼각관계가 아니고서야 칼부림이
있을 수가 없었다. 수로의 병사들은 그런 것에는 단호하고 냉철하게 판단했다. 그런
일로 대사(大事)를 그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한쪽이 깨끗하게 포기했다. 대신에 독
한 술에 빠졌다. 익사(溺死)할 만큼 들이키고 상처를 달랬다. 그러면 끝이었다.
비워라, 비워야 채운다, 남을 상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수로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수로는 부하들에게 넓은 아량과 관대에 한없었고 부하들
에 대한 배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배포가 컸다. 수로는 부하들이 자기 신체의 일
부라고 생각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았으니 훼손 없이 잘 지켜야 하듯이 부하도
그렇게 지켜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부하에 대한 사랑은 단꿈에 젖은 신혼부부 이
상이었다. 전쟁은 살생(殺生)이 불가피한데 그렇게 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 부
하가 죽거나 다치거나 하면 그렇게 괴로워할 수가 없었다. 사나이, 남들 보는 앞에서
폭풍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막사에 혼자 있거나 아니면 숲속 아름드리나무에 기대어
오열했다. 부하들은 알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것을 눈치챘다.
그 어깨 들썩임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큼 땅이 울려서 알았다. 부하를 잃은
원통하고 분함이라는 것을 부하들이 알았기에 부하들은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수로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이 수로의 다섯 형제와
다른 점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형제들이 냉정하지는 않았지만, 전쟁 상황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땐 그랬다. 생사(生死)는 운명이라고 믿었다. 1세기 초엔 그랬다.
경극 배우가 되고 싶은 장수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쟁반에 진주를 가득 담아 왔다.
분명히 칭찬받을 짓이라 확신했다. 경극 배우가 되고 싶은 장수는 두둑한 상까지
주리라 김칫국물을 마셨다.
- 장군, 진주알이 영롱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