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무령공주를 만난 말로.
그러나 도영은 가볍게 피했다.
대로가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지만, 인어공주 도영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대로가 씩씩대며 칼을 빼 들려는 순간, 인어공주가 다시 날아가 해마 위에 앉는다.
- 날 기억해, 난 도영(濤英)이다. 대로야 알겠니? 도영이... 이 공주의 함자(銜字)이니라, 오호호호~
가볍게 해마의 등줄기를 두드리자 해마가 눈 깜짝할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이 손을 들어 잘 가라고 환송할 틈도 없을 만큼 찰나였다.
호위무사 범고래도 거대한 몸을 틀어 강 속으로 사라졌다.
거대한 물보라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물세례를 받아 흠뻑 젖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어공주가 사라진, 강을 낀 호수를 넋이 나간 상태로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이 기상천외한 광경이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할 뿐이었다.
- 진짜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군...
- 어, 내 정신 봐, 말로는? 어디 갔지?...
넋이 나간 벽로가 혼자서 뇌까렸다.
벽로의 중얼거림에 벽로를 바라보던 모진, 그제야 말로가 생각났다.
- 자기 눈엔 모든 게 신기하게 보일 거야, 멀리 가지 않았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 그렇겠지? 웬칸 호기심이 많은 도령이라... 내가 찾아볼게.
수로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모진이가 말로를 찾아 나섰다.
마노는 그러는 사이 어느새 예리한 칼로 하라어 닮은 괴어 몸통 한 부분을
정교하게 포를 떴다.
그리고 아로에게 다가갔다.
- 아로님, 이게 하라어 변종이랍니다, 하라어는 알다시피 종기에 좋답니다,
돌아 누워보세요...
- 맞아, 돌아눕거라.
아로가 망설이다가 수로 말에 할 수 없어 돌아누웠다.
웃옷을 위로 걷고 고약을 바른 삼베를 걷어내자 고름 가득한 손바닥만 한 종기가
드러났다.
피부는 상아를 빚은 듯 은은하게 상아색을 띠었다. 이렇게 고울 수가?
주저하면 혹 흑심(黑心)이라도 생길까, 마노가 망설이지 않고 상처 깊숙이 심이 박힌
고름을 빨았다.
- 뭐 하는 짓이냐?
- 가만히 있거라, 치료를 하지 않느냐...
아로가 마노의 뜬금없는 짓에 불편해하자 수로가 마노를 편들었다.
마노가 누른 고름을 입으로 빼내고 손바닥만 한 하라어 변종 살점을 종기 위에 덮고
부드럽게 붕대를 감았다.
어느새, 대로와 고로도 와서 근심 가득 쳐다봤다.
- 처음엔 독을 빼내느라 한기(寒氣)가 들다가 심히 아프면서 열이 날 겁니다.
- 그러고 나면 상처 부위가 간지러울 거야, 낫는다는 증거이니라.
- 형, 정인이 있다니, 무슨 말이야?
- 거짓말한 거야, 안 그러면 인어공주가 눌러앉을 판인데, 살다보면
때론 하얀 거짓말도 필요할 때가 있느니라, 으하하하!
아로의 물음에 수로가 거짓말이었다고 해명하자 괜히 마노가 안도가 되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 대로가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하잖아.
- 형도 그렇게 보였어? 나도 대로형이 너무 과도하게 부정하니까 이상하더라, 킥...
아로와 고로까지 나서서 대로를 인어공주랑 엮어주려고 하자 대로가 발끈했다.
- 아로 형, 형까지 왜 그래, 정말... 고로 니가 그 인어한테 눈 돌아가더만, 잘해봐,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대
업을 완수하기 전까진 여자를 멀리할 거야.
- 그게, 인력으로 되면 뭔 걱정을 하겠느냐.
대로가 싫다며 강한 도리질했고, 수로가 남녀 문제는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하자 또 괜히 마노가 얼굴이 붉어졌다.
이번엔 귀까지 발갛다.
- 모진이 누나가 안 오는 것을 보니 말로를 아직 못 찾은 거 같네...
- 내가 가볼게.
- 아닙니다, 소저가 가보겠습니다.
분위기를 이상하게 몰아가는 것 같아 대로가 빨리 벗어나고 싶어 나서려 하자 마노가 선뜻 나섰다. 홍조 띤 얼굴이 들킬까 봐서다. 가라 마라 말 떨어지기 전에 마노가 말을 타고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 * *
울창한 숲속, 아름드리 홍송(紅松)이 군락을 이뤘다. 하늘로 향해 곧게 뻗은 홍송의 길이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라 몇백 년은 족히 된 것 같았다.
말에서 내린 말로가 하늘을 쳐다봤다. 대낮을 잠식한 뒤라 어스름했다.
바람이 살랑 불었다. 눈을 감고 코를 스치는 향기를 만끽했다. 향나무다. 홍송 사이사이 짙은 음영(陰影)의 자태를 드러내는 향나무가 몸을 꼬며 깊은 초록의 향을 발산했다.
- 넌 이름이 뭐냐?
바람처럼 나타난 무령공주가 말을 툭 던졌다.
말로가 눈을 떴다. 놀랄 만도 한데 끄떡없다.
이 집에 6형제들은 대체 겁이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 무엄하다, 건방지게 계집이 대장부 이름을 함부로 묻다니.
무령공주 물음에 말로가 대뜸 큰소리쳤다.
무령공주 입가에 웃음이 퍼졌다.
- 너 참 귀엽다.
말로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무령공주 아래위를 훑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말로는 이렇게 생겨도 보통 미인이 아니구나를 새삼 깨달았다. 모진 누나, 마노 누나, 엄마 외는 더 이상 미인은 없는 줄 알았는데...
세상엔 다양하고 독특한 매력을 가진 미인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 넌 아래위도 없느냐?
- 미안해서 어쩌지, 나도 우리나라에서는 공준데... 니가 나한테 존대해야
하지 않니? 공주마마 해봐, 맛있는 곶감 줄게...
무령공주는 말로를 보자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아니 친해지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해 친해져야 할 거 같았다.
- 오랑캐한테 내가 왜?
- 아주 오래전부터 너희 나라 왕이 우리 할아버지께 조공을 바쳤거든, 그럼 누가
상전(上典)이야?
-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계집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정도로 나는
멍청하진 않아.
- 아, 그러세요, 그럼 도령께서는 여기 혼자 나들이하셨나요?
- 아니, 형님들하고 소풍 왔어. 우린 6형제야, 도탄에 빠진 세상을 우리 6형제가
구할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하늘의 뜻이야.
- 오, 대단한 배짱이구나, 나도 그렇게 되기를 응원할게.
- 응원 필요 없어, 그렇게 될 거니까.
- 호랑이를 그리다 보면 고양이라도 그릴 거니까...
- 낭자는 우리 6형제를 우습게 보지 마시오?!
- 미안, 미안... 내가 도령의 6형제를 너무 과소평가한 거 같소, 용서하시오... 제일 큰 형님의 존함이?...
- 김수로 장군이야. 우리 형 잘생기고 힘도 장사고 무예도 뛰어나고 너가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넌 상대도 안 돼.
- 부끄럽지만, 나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을 듣는데, 그래도 상대가 안 돼?
- 이쁘긴 하네, 함부로 누구한테 이쁘단 소리 안 하는데, 이뻐, 정말이야... 그래도 안 돼.
- 니 형이 날 좋다고 하면?
- 그럼, 나도 반대할 이유가 없지, 누나 진짜 이쁘다, 특히 눈이 모진이 누나 보다
크고 이쁘다.
- 누나? 고마워 누나까지 지위를 올려 주다니... 누나도 있어?
- 아니, 누나 같은 누나...
- 나같은 누나?
- 응, 친누나 아니고... 근데 친누나 이상이야, 우릴 업고 키웠어...
- 그래? 엄마가 없어?
- 무슨 소릴 해 누나, 당연히 있지, 얼마나 이쁘다고, 이 세상에서 아니, 저 하늘, 저 땅속 끝, 통틀어서 제일 이뻐, 내가 그런 게 아니고 사람들이 그랬어...
- 나보다도?...
- 응... 미안해 누나... 그냥 받아들여...
말로가 덩치가 크지만, 탱화 속의 환한 동자승 같아 무령공주 눈엔 말로가 한없이 귀여웠다. 이런 동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사심(私心)이 불쑥 들었다. 거기에다 자기를 이쁘다고까지 하니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 말로야!
- 말로 도련님!
모진과 마노가 숲을 헤치며 말로를 찾았다.
무령 공주 눈에 멀리서 언뜻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 만나면 시끄러워지겠다, 난 무령공주(鍪岭公主)야,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겠지,
잘가, 귀여운 도련님...
- 만나서 잠시나마 즐거웠소, 공주...
- 깔깔깔, 이제야 공주로 인정해주나요? 안녕, 또 만나자.
- 잘가시오, 공주, 다음에 만나면 귀엽다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시오, 나도 대장부요...
- 호호호, 그러세요? 다음엔 꼭 대장부라고 부르겠소, 아니면 장군은 어떻소?
- 그것도 괜찮네, 그땐 장군이 되어 있을 테니.
- 이별의 포옹은 안 되나요?
- 안되오, 진도가 너무 빠르오, 다음에...
깔깔깔 웃으며 무령공주가 옆에 세워놓은 애마 도도를 훌쩍 올라탔다.
말로를 찾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 말로야?!
- 말로 도련님?!
(E) 이휘이잉!~
도도가 크게 울었다. 그러고는 무령공주를 태우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모진과 마노가 말 울음소리를 듣고 경계를 했다. 자연 칼에 손이 갔다.
한달음에 말 울음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말로가 넋이 나간 채 무령공주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