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인어공주 도영
대로 손에는 먹물에 젖은 저고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아마 빼내려고 당기다 보니 옷이 벗겨진 것 같았다.
- 물!
대로가 우렁차게 외쳤다.
병사 하나가 밥을 짓기 위해 떠다 놓은 물항아리를 재빨리 가져다 건넸다.
물항아리를 대로가 들어 온몸이 시커멓게 묻은 미확인 물체에 쏟아부었다.
미확인 물체의 정체가 드러났다. 늘씬한 인어였다. 풍만한 수밀도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요염한 인어였다.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눈부신 광채를 내뿜는
아름다운 인어였다.
대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손가락으로 가슴께
쇄골(鎖骨)을 찌르며 말했다.
- 어이, 이봐, 살았냐?
인어가 눈을 번쩍 떠드니 캑캑거리며 입에 든 먹물을 쏟아냈다.
- 으아아!
(E) 철썩!
대로와 눈이 마주치자 비명을 지르며 숙여서 쳐다보고 있는 대로 뺨을 때렸다.
그리고 자기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대로도 어쩔 수 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항아리를 손에 든 대로가 붉으락푸르락하며 물항아리를 내동댕이쳤다.
물항아리가 박살 났다.
(E) 챙그랑!~
- 옷!
마노가 바닥에 있던 검게 물들인 저고리를 잽싸게 던져주었다.
- 뭘 봐, 저리가 인간들아!
인어가 옷으로 가슴을 가리고 소리쳤다.
수로는 얼굴을 돌리고 마른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뺨을 맞았다는 수치심에 대로가 그 큰 발로 인어를 밟을 것
같아 수로가 다정하게 슬쩍 대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어디서 왔나요?
모진이가 차분한 어투로 물었다.
- 어디서 오긴, 용궁에서 왔지.
- 어디?
- 양자강.
- 거기도 사람이 살아요?
마노가 이번엔 물었다.
- 인간들이, 지들만 잘난 줄 알아, 지상에만 사람이 살고 물밑에는 사람이
안 산다는 그런 편협한 생각 어디서 나온 지론(至論)이야?
얘, 너 그 옷 좀 벗어.
마노에게 인어가 명령조로 말했다.
잠깐 홀린 듯 마노는 두말하지 않고 겉옷을 벗어줬다.
- 이 새끼야? 아이 징그러워, 이런 놈이 다 있어... 못 보던 놈인데...
인어공주가 괴어 앞으로 성큼 걸어가더니 괴어 아가리를 냅다 차고서 머리를
갸우뚱하며 괴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 누가 날 구했어?
수로와 대로가 서로 마주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누구야?
- 두 사람 다인 것 같은데요?
마노가 선뜻 말했다.
- 같은데요는 뭐야? 얘야 쟤야?
- 근데 당신은 왜 우리보고 말 놓나요?
모진이가 못마땅했는지 딴지를 걸었다.
- 공주니까, 니들은 그러면 너희들 공주에게, 왜 말 까느냐고 대더냐?
건방지게, 그 못마땅한 표정들은 뭐니? 너 잘생긴 놈, 말해 봐?
대로를 가리키며 인어공주가 말했다.
- 아니, 이게, 누구 보고...
- 너 참 겁대가리 없구나, 날 구해줬다 하니 무례함을 용서하마.
대로가 때리지는 못하고 주먹을 들고 부르르 떨자 수로가 제지하니
주먹을 거뒀다. 그런데 인어공주가 겁도 없이 주먹으로 왕(王)자가
선명하게 박힌 대로의 배를 툭 쳤다.
-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아직 어리둥절합니다, 그래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 좋아, 그럴 수도 있지, 너희들의 상상력은 그만큼 빈약하다는 거야,
니들 탓하기도 그렇고... 지상에 사람이 사는 나라가 있다면 지하에도 사람이
사는 나라가 있고 하늘에도 사람이 사는 나라가 있어, 세상은 오묘하고
불가사의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가득하지...
수로가 예의를 다해 용서를 구했다. 인어공주는 수로 말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이상한 말을 뇌까리고는 갑자기 땅바닥에 털썩 앉았다. 모두 서로 쳐다보며
공주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머리를 갸우뚱했다.
다리를 비늘 지느러미가 서서히 감쌌다. 그 현상 또한 이상해서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누가 물 좀 떠다가 내 몸에 부어다오, 나는 인어니까 몸에 물이 마르면
힘들어져...
- 물의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 물속의 생물들은 공주님을 아실 텐데,
왜, 저 괴어(怪魚) 아가리에 들어갔나요?
모진이가 공손히 물었지만 의심스러웠다.
- 그러게 말이야, 저 괴어는 내 명령에 따르는 하라어가 아니야, 어디서
굴러들어온 변종 같아,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삼켜버렸어,
아마 색목인(色目人)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거 같아, 아이 차가워, 누구야?!
대로가 병사에게 물이 든 항아리를 받아 인어를 향해 화풀이하듯 냅다
그리고 세게 부었다.
- 물속에 사는 인어가 왜 차갑지?
- 초겨울이잖아, 거기도 계절이 있어, 여기만 있는 게 아니고, 씨...
근데 감정이 실렸다, 내가 널 지목할 수도 있어.
- 뭔 헛소리야?
금방 터질 듯한 부은 얼굴로 대로가 툭 쏘았다.
대로는 인어공주의 무르녹는 몸매가 싫었다. 아니 거슬렸다.
이렇게 드러내놓은 여체(女體)의 굴곡진 몸매와 각선미(脚線美)를 본 적이
없기에 신경 쓰였다. 여자를 돌같이 본다는 확고한 결심에 금이 갈까 두려웠다.
그래서 괜한 투정을 부리는 거였다.
- 너랑 얘랑 둘이 날 구했다며? 그럼, 둘 중 하나를 택해야 되잖아? 고민되네...
- 무슨 말입니까? 공주님...
마노가 궁금했다.
- 내 배우자, 내 남편, 결혼해야 돼, 내 목숨을 구했으니 내가 책임져야지.
그게 사람의 도리지, 일국의 공주라면 더욱 그래야 백성들이 본받을 거잖아.
니들 둘이 가위 바위 보해도 받아주지, 아니면 마음이 있는 자가 나를 택하든가?
- 뭐라구?!
모두 놀랐다. 특히 대로가 경악했다. 그런데 수로는 미소를 지었다.
- 이 봐, 자네 이름이 뭐지?
- 수롭니다, 김수로...
인어공주가 수로를 찬찬히 살려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물었다.
- 마음에 드는데, 어쩔래? 절차 밟으라 할까?
- 아, 아닙니다, 공주마마 저는 아닙니다, 저는 공주마마를 구하는데 살짝 도와줬을
뿐입니다, 제 동생 대로가 전적으로 공주마마를 구했습니다. 거의 목숨을 걸고 마마를 구했잖습니다.
- 넌 수로? 넌 대로구나?
인어공주가 수로와 대로를 번갈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름을 물었다.
수로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로가 시치미 떼자 저돌적인 대로가 질색(窒塞)했다.
- 형, 무슨 소리야?! 난 당신을 구하지 않았소! 난 무례하게 당신 옷을 벗겼소, 자격이 안 되오, 자격 미달이요.
대로가 수로의 짓궂은 장난을 눈치를 못 채고 노골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인어공주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 여기 모두 내 벗은 가슴을 봤잖아, 따지면 그게 더 큰 죄야, 잡혀가서
주리를 틀어도 할 말이 없어, 그러니까 자격 미달은 없어, 내가 간택하면
끝나는 거야.
- 공주마마, 저는 공주마마의 목숨을 살린 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사료됩니다.
사람이 있어야 결혼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 동생 대로가 짝으로 적격이라 생각합니다.
- 형, 진짜 왜 그래, 난 아직 결혼 적령기가 안 되었잖아? 아, 우리 아로형 어때요?
이렇게 잘생긴 남잔 처음 봐, 어때요? 잘생겼죠?
아로는 말 대신 싫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 얘들 왜 이래, 진짜 자존심 상하네, 공주 남편이 되는 거야, 부마...
용궁에서 최고 실권자가 되는 거야, 우리나라에서는 서로 하려고 난리가 나는데... 나를 못 믿나...
인어공주가 갑자기 눈을 감고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주문을 외웠다.
- 휘리리리리 어으이 휘리리~ 부르스 나다 브리 바스라 브리따 비깔라 쓰리 브리따 바스라 브리따~
그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이적(異蹟)이라 해야 하나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굉장한 현상이 벌어졌다.
각양(各樣) 각종(各種)의 엄청난 고기들이 수로의 일행이 있는 벌판에 날아올라
떨어져 퍼드득거렸다. 고기 비가 쏟아졌다. 요리조리 피한 사람들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머리와 얼굴에 된서리를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고기가 벌판 가득했다.
- 배고프지? 잡아서 실컷 먹어, 찌지고 볶고 굽고 삶고, 남으면 돌려보내고...
모두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 쟤가 맛있어, 주별어(珠蟞魚)라 하는데 생긴 건 더럽게 생겨도 먹으면 맛도 좋지만 심한 병이나 전염병이 걸리지 않고 무엇보다도 몸속에 진주를 품고 있어.
말 떨어지자 무섭게 병사들이 앞다투어 서로 가져가려고 법석을 떨었다.
- 인간은 간사한지라 보지 않고는 믿지를 않는가 봅니다, 공주마마 저희의
경솔함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 신경 안 써, 원래 인간이란 게 속이 좁잖아, 그래서 서로 못 잡아먹어 전쟁을
일으키잖아, 그러나 걱정하지 마, 안 잡아먹을 테니...
모진이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인어공주가 대수롭지 않은 걸로 그러냐며
훈계했다.
- 안 가셔도 되겠습니까? 용궁에서 많이 찾으실 텐데...
- 어쩐지 가라는 소리인 거 같다.
마노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 인어공주의 일침에 마노가 당황했다.
- 아, 아닙니다, 괜찮으시다면 계셔도 됩니다.
- 그래? 그럼 놀자, 내가 한 곡 뽑아?
모두, 좋다고 손뼉을 치고 어떤 병사들은 휘파람을 휙휙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