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괴어를 때려잡다.
모진은 더 이상 고집을 피워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깨끗하게 물러났다.
어렸을 때였다. 아버지가 전쟁 중에 죽고 흉노족인 어머니가 향수(鄕愁)에 못 이겨 같이 돌아가자고 할 때 싫다며 같이 여기 살자고 매달려 봤지만, 결국 흉노국으로 돌아갈 때 따라가지 않고 남은 이유가 김궤였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김궤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낙빈이 나타나 일찌감치 짝사랑을 접었지만, 그 아스라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두 사람의 사랑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움의 또 다른 표현은 김궤가 술 추렴할 때 술 시중든 거였다.
낙빈이 술안주를 만들어 줄 때 옆에서 도와주거나 아니면 흉노식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 내놓으면 김궤가 맛있게 먹는 거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낙빈이 그랬다.
- 다른 건 다 이겨도 네 요리 솜씨는 못 이기겠구나, 호호...
-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낙빈 마마 발치라도 따라가면 그보다 더 큰 영광 없을 것이옵니다.
- 우리 모진이가 제법 사회생활을 할 줄 안다, 호호호...
낙빈이 팔을 벌려 진심으로 모진이를 안았다. 모진이도 낙빈에게 안기며 혹 가졌던 질투와 시기심도 날려버렸다. 충심으로 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키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날 늦은 밤 침실에 들었을 때 모진의 가슴은 쿵쾅쿵쾅 디딜방아 찧듯이 찧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만든 요리를 먹는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즐거움 아닌가... 그러면서 그 두 사람의 사랑이 잘 되기를 진정으로 축원했다.
마노 또한 그랬다. 처음엔 자기가 남아 술 시중을 들겠다, 마음을 먹었지만 남는 게
부자연스러웠다. 남아서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하면 누가 액면 그대로 받아줄까, 모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특히 모진 언니는 고단수임에 틀림없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수로를 따라나서는 것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읽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사람의 인력(人力)으로 되면 얼마나 좋으려만...
잔류 병력과 극소수의 경계병을 제외한 병력이 족히 1,500여 명은 되었다. 대군(大軍)
을 호수를 품은 강가에 풀어놓으니 그 광경 자체가 장관이었다.
군복을 입으면 나이를 잊는다는 말이 있다. 나이와 계급을 떠나 사내들은 군복과 무기를 내던지고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대로 또한 그랬다.
남성의 상징, 사내의 대명사 대로가 그 성질대로 갑옷을 벗어 던지고 상체를 들어낸
채 반라(半裸) 차림으로 성큼성큼 차가운 물 속으로 들어갔다. 온갖 전투에 만들어진
다부진 몸매가 가히 역대급이었다. 경탄스러워 남녀 따지지 않고 짧은 신음소리가 절
로 났다. 물속에 먼저 들어간 군졸들이 대로의 우람한 몸매를 보고 감탄사를 자기도 모르게 연발했다. 대로가 민망한지 넋을 놓고 보고 있는 병사에게 물을 뿌렸다. 그렇게 시작하여 대로와 병사들이 물싸움했다. 뒤따라 고로와 벽로와 말로도 물속에 뛰어들어 대로와 한편이 되어 군졸들과 물싸움했다.
6형제 중 수로의 외모가 그 중간이었고 기준이었고 중심이었다. 대로 다음
으로 벽로의 외모가 우락부락 선 굵은 남성이라면 고로 다음으로 아로의 외모가 선
옅은 여성형이었다. 아로는 아예 미모에 숨이 막히는 미소년이었다. 남자가 봐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 번은 김궤 부대가 포위되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졌
는데 아로가 여장(女裝)으로 변장해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고 부대를 구한
적도 있었다. 아로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한 것이라 그날 펑펑 울었다. 수로 말을
잘 들었는데도 수로가 달래도 울었다. 엄마를 안고 울었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
어도 절대로 여장은 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울음을 그쳤다고 했다. 아
로는 엄마인 정견모주 낙빈을 잘 따랐다. 낙빈도 아로를 딸처럼 아꼈고 사사로웠다.
아로의 얼굴이 낙빈을 빼다 박았다고 다들 그랬다. 말로가 갓난애 때 아로가 낙빈인
양 말로를 안고 키웠을 정도였다. 아로는 여성스러워 강단이 없다는 말을 들을까 마
음에는 없지만, 포로로 잡아 둬도 될 마적의 수괴(首魁) 목을 알아서 친 적도 있었다.
말로는 아직 어려 탱화(幁畵)에 나오는 동자승 같았다. 그러나 말로는 동자라는 말을
싫어했다. 대장부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앞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게 자기 꿈이라고 했
다. 거대한 포부는 대로를 닮았다. 그래서 대로가 하는 것을 따라했다. 그게 귀여워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겼다.
수로의 외모가 오묘한 그 중간이었다. 9척 장신이지만 얼굴은 작았다.
상체는 짧고 하체는 성큼 길었다. 외모가 보는 각도에 따라 강인한 남성과 부드러운 여성성이 혼재했다. 하늘에 뜬 해와 밤에 뜬 달의 빛이 그렇게 보이게 해 낮에 볼 때는 남성적인 강건한 모습이, 밤에 볼 때는 은은한 여성적인 모습을 띠어 신비로웠다.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건 그 큰 덩치가 모성애(母性愛)를 불러일으킨다는 거였다. 모성 본능을 부르는 매력은 6형제 중 수로만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물속에 들어간 대로가 자맥질했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나오지 않자 모두 걱정했다. 그래서 웅성거리기까지 했다. 수로와 형제들은 전혀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거기에 답이라도 하듯 대로가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제야 병사들이 안심이 돼 손뼉을 쳤다. 근데 대로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괴어(怪魚)를 안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괴어는 흉측스러웠고 징그러웠으며 이빨은 칼을 심어놓은 것처럼 날카로웠다. 대로가 힘겨워할 정도로 힘도 엄청났다. 그러나 대로가 누구냐,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였다.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아니면 돌연변인지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괴어였다. 하라어(何羅漁) 변종인 스큐레가 아닌가 싶었다. 하라어는 대가리는 하난데 몸이 열 개고, 스큐레도 대가리가 하난데 사나운 뱀 여섯 마리에다 다리가 열두 개가 달렸다. 하라어는 개소리를 냈고 스큐레도 개소리 비숫한 끄르르 끄르르 소리를 냈다. 대로가 힘겨워하자 수로가 바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괴어에 달린 여섯 마리 뱀이 수로와 대로를 휘감았다. 완력으로 몸을 감은 뱀을 뜯어내자 이번에는 오징어 다리 열두 개가 휘감았다. 수로는 다리를 뜯어내며 다리를 힘껏 잡아당겨 힘줄을 끊었다.
수로와 대로가 힘을 합쳐 지치지 않고 덤비자 갈수록 괴어가 지쳐 못 견디어 했다.
뒤에는 괴어가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도망갈 궁리만 했다.
수로가 이때다 싶어 도망가는 괴어의 뱀 대가리를 모두 꺾은 뒤 여섯 마리를 두 마리씩 묶고, 몸을 감는 거대한 오징어 다리 12개를 3개씩 묶었다. 길이가 60척(尺)은 무난해 보이는 괴어가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사생결단으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10여 회 반복하다가 괴어가 끝내는 무기력해져 흐느적거렸다. 눈이 게슴츠레 반쯤 감겼다. 자포자기였다. 처분에 맡기겠다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수로가 두 손으로 괴어 아가리를 힘껏 벌림과 동시에 두 발로 쿵쿵 아가리를 찢었다. 동시에 대로는 괴어의 눈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눈동자가 깨져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정수리도 발로 내려쳤다.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뼈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괴어가 즉사(卽死)했다. 빨리 죽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대로는 무지막지했다. 아가리에서 붉은 피 대신 검은 먹물을 쏟아냈다. 수로와 대로가 괴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모진과 마노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진과 마노는 빼든 칼이 들려 있었다. 여차하면 물속에 뛰어들 작정이었다.
아로, 고로, 벽로, 말로를 비롯해 수많은 병사가 괴어 주위로 모여들어 둘러쌌다.
병사들이 칼을 빼 들어 해부할 작정으로 덤벼들 태세를 취하자 수로가 손을 들어
막았다. 모두 수로가 왜 그러는지 의아해했다. 수로 눈에 뭔가 보였던 거였다.
수로가 괴어 아가리 안을 살폈다. 시커먼 물체를 발견했다. 수로가 발과 손으로 찢어진 괴어 아가리를 더 찢었다. 괴어 아가리가 너덜너덜 그렸다. 성질 급한 대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손수 괴어의 입속에 들어가 먹물에 시커멓게 범벅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지독한 악취에 대로가 한 손으로 코를 막았다. 괴어의 침이 검은 물체를 막처럼 감쌌다. 풀밭에 눕혔다. 대로가 손에 묻은 찐득한 침을 짜증을 내며 털어냈다. 사람인 거 같았다. 모양새가 여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