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적장을 쓰러뜨리다.
김궤나 수로는 마노가 이길 거라고 자신하고 확신했다.
이미 무예 실력은 증명해 보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보면 하마터면 큰 인명 피해를 볼 상황이었는데 마노 덕으로 역전의
상태까지 오지 않았는가. 언제나 방심(放心)은 금물이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된
계기였다. 부탁을 들어주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분명 자세히 말은 하지 않아도 가슴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는 거 같았다, 이번 일로 치유라도 됐으면 했다. 수로는 가슴이 아팠다. 한참 청춘을 발산할 나이에, 한참
사랑할 나이에, 여자라는 이유로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상처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 살풀이리고 생각하라...
마노가 칼을 빼 들고 한발 나섰다.
- 잠깐...
수로가 손을 들어 걸어가는 마노를 막았다.
불안감이 엄습해 소름이 돋았다. 나를 못 믿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마노가 의아해서 수로를 쳐다봤다.
수로가 차고 있던 월나라의 명검 보광지검(步光之劍)을 마노에게 던졌다.
마노는 칼을 받았다. 황송했다. 눈물이 났다. 고맙다는 큰절을 올렸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나섰다.
- 사람 무시하냐?! 그렇게 사람이 없냐?! 여자가 웬 말이냐?! 이건 이겨도 찝찝한 거
다!!
- 어쨌든 이기면 될 거 아니냐, 네가 이기면 약속대로 무조건 항복하겠다!
김궤가 일갈했다.
웅성대던 장내가 일시에 정적 속에 빠졌다.
- 남아일언지참금(男兒一言持參金)이다! 분명히 말하는데 두말하기 없기다!
- 야이, 무식한 놈아, 문자를 쓰려면 제대로 써라,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다!
- 나도 안다, 이년아! 분위가 딱딱해서 웃기려고 해 봤다!
진짜 장내에 웃음보가 터졌다.
적군의 무리 속엔 이때다 싶어 무서움을 덜어보려고 억지로 크게 웃는 자들도 있었다.
극을 든 적장이 말에서 가볍게 훌쩍 내렸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휘날렸다.
멋있다고 적의 무리 속에서 손뼉을 치는 자도 있었다. 주로 보급부대의 여자들이었다.
적장(賊將)이 긴 극을 들고 보무도 당당히 중앙으로 나갔다.
마노도 동시에 보광지검을 들고 중앙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적장이 갑자기 극을 마노를 향해 쑤셨다.
여러 번 쑤셨다.
마노가 많이 움직이지 않고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다.
사람 두 배 크기의 극(戟)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적장의 무예 솜씨도 무시할 게 못 됐다.
찌르고 피하고만 할 뿐 서로에게 치명타는 날리지 못했다.
적장이 조갑증이 났다. 작전을 바꿨다.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적장이 마노를 향해 쑤시는 것을 멈추고 마노의 몸을 두 동강 내려고
마노의 배를 겨냥해 극을 우(右)에서 좌(左)로 휘둘렀다.
이때다 싶어 마노는 몸을 선 채 배보다 더 낮은 자세로 몸을 숙여
극을 피하고 극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성큼 다가가 칼을 적장의 가슴을
향해 휘두르자 동시에 적장은 오른손으로 극을 잡고 왼손으로 마노의 칼을 쥔 오른손을 잡았다. 적장은 두 손을 다 썼다. 그러나 마노는 왼손이 남았다.
적장은 아차 싶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마노의 왼손에 빼 들은 단검이
적장의 목젖 밑 움푹 패인 급소에 꽂혔다.
- 흐윽...
적장이 짧게 신음소리를 내고 손에 쥔 극을 떨어뜨렸다.
급소에 찔린 단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마노는 힘을 써 더 깊숙이 단검을 밀어 넣었다. 적장은 대가리가 날아간 닭처럼 급소에 꽂힌 칼을 쥐고 피를 흩뿌리며 몇 발자국 걷다가 생을 마감했다.
김궤 부대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적장의 진영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내 비통함으로 바뀌었다.
- 또 없느냐, 나서라?!
마노가 적장의 목에 꽂힌 단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적장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잔당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나올 리가 없었다.
보아하니 우리 부대 싸움 일등이 저쪽 부대 싸움 꼴등과 싸워서 박살이 났는데
누가 나서겠냐, 한마디로 상대가 없다는 거다. 잔당들은 연약한 여자의 실력이
저 정돈데 언감생심... 잠자코 있는 게 상수다 객기는 죽음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으론 우리 대장이 고마웠다. 일 대 일이 아니고
부대끼리 붙었으면 과연 우리 목숨은 부지됐겠냐는 것이다. 애도를 표한다.
한때 부하였기에...
- 무기를 버리고 꿇어앉아라!
밤하늘을 쩡쩡 울리는 마노의 외침이 적병들의 폐부(肺腑)를 꿰뚫었다.
적병들은 일사불란하게 무기를 버리고 꿇어앉아 바싹 엎드렸다.
김궤의 부대 병사들이 잔당들이 버린 무기를 신속하면서도 철저하게 회수했다.
간사한 게 인간이라고 했나, 연잠과 진풍의 잔당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하니 신상에 별 해로울 게 없을 것 같았다. 김궤 부대가 포로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준다는 소문도 있으니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면 특히 우리 같은 졸개들은 배곯지는 않을 것 같았다. 원래 책임은 명령내리는 놈들이 지는 거니까...
며칠 전에 마을에서 찬탈한 군량미도 넉넉하고 소, 돼지, 양, 닭, 등등
심지어 말린 생선도 가득하니 포로로 잡혀 있으면
설마 굶기겠냐, 우리 졸개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련다는 심정으로
서로 작은 소리로 마노의 미모가 보통이 아니다, 백년 먹은 여우가 아니냐, 실없는 농담을 두런두런 나누며 드리워진 불안감을 걷어냈다.
어떤 자는, 꼭 어디 가면 이런 자가 있는데 바지 끝에 숨겨둔 담배까지 꺼내 피웠다.
사방을 둘러보며 눈치를 보던 포로들이 한 모금씩 하자며 채근을 했다.
담배 주인이 연달아 몇 모금 빨고 담배를 돌렸다.
담배를 돌려 빠는데 그들 앞에 현갑 기마대 병사가 나타나 떡 버텨 섰다.
그들은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 대마초야?
- 아닙니다, 그냥 담뱁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 왜 그래? 담배 피우는데 웬 죽을죄?
현갑 기마대 병사가 벌벌 떠는 포로들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기마대 병사는 아예 자기 허리춤에 찬 담배 주머니를 꺼내 담뱃가루를
궐련지(紙)에 말아서 나눠 피웠다. 당연히 포로와 기마대 병사는 고향이 어디냐,
몇 살이냐, 사회 있을 때 뭐 했냐, 결혼했냐, 애들은 있냐? 등등 물으며 친화력(親和力)을 보였다. 김궤 부대원들의 인간적인 면모는 중원에 퍼져 있어 다들 잘 알았다.
기마대 병사와 포로들은 금세 친해져서 통성명하고 형님, 동생 하자며 결의(結義)를 다졌다.
어떤 포로는 너무 나가 고량주를 꺼내다가 압수당하기도 했다. 당연히 술은 금물이었다. 포로에게 술을 먹였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니까...
객기(客氣)가 만용(蠻勇)으로 변하는 건 눈 깜빡할 사이잖는가...
- 주목! 주목! 주군께서 한마디 하신다! 두 번 말씀하지 않는다! 질문 없다!
경극 배우가 되고 싶은 장수가 외쳤다.
일순(一瞬), 진영에 정적이 돌았다. 모두의 시선이 말 위에 탄 김궤를 향했다.
풀벌레 소리와 부엉이 소리, 멀리서 알 수 없는 야생 동물 울음소리만 들렸다.
밤하늘엔 사금파리처럼 별들이 박혀 빛을 발했다.
- 세상이 하 수상하니 이런 비극적인 상황까지 벌어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우리 모두 그러려니 하자...
현명한 자는 대세를 따른다.
이런 말이 있다. 양이 이끄는 사자 부대는 사자가 이끄는 양의 부대를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부대는 사자가 이끄는 사자 부대다.
김궤 부대원들이 목청껏 ‘김궤 장군!’을 연호하며 소리쳤다.
- 우리 부대 병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별 하자 없으면 모두 받아주겠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처다!
- 와!!
포로로 잡힌 적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마음속에 김궤 부대의 병사가 되고 싶었던 적병들은
고맙다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그럴 것이다, 남자라면 자고로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부대의 일원이 되고 싶은
야망(野望) 하나쯤은 있을 거니까...
초승달과 흐드러진 별을 배경으로 선 김궤의 모습은 신비 그 자체였다.
그래서 감히 올려보는 것도 경외(敬畏) 그 자체였다.
-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자도 지금 즉시 식량과 소정의 노잣돈을 지급하고
돌려보내겠다. 여기서 살겠다면 여기서 살게 허락하겠다. 지금부터는 이곳은
대한(大漢)의 땅이다. 이 모든 것은 철저한 심사를 거친다. 경미한 죄를 지은
자는 죄를 면해 줄 것이오, 중죄인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말이
있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 왕자이민인위천, 이민인이식위천),
날씨가 차다, 나의 병사들은 우선, 물과 밥과 간단한 술을 저들에게 제공하도록
하라!
- 예,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