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적을 베다.
- 나야...
달콤함이 짙은 낮은 목소리가 귀속에 맴돌았다. 뜨거운 숨이 귀밑을 달궜다.
갈증이 더 심해졌다. 말초가 신경을 곧추세웠다.
마노가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로가 옆으로 누우며 마노 입을 막은 손을 살며시 풀었다.
마노는 숨이 가빴다. 신음(呻吟)이 나올 거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결국 딸꾹질을 했다.
숨 가쁜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코뿔소 발소리보다 더 큰 쿵쾅쿵쾅
가슴 뛰는 소리를 어떡하지 하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수로도 느꼈는지 살며시 마노를 당겨 안았다. 마노는 이때다 싶어 품속에 깊이 들어
갔다. 드디어 마노의 혼백이 달아났다 벗으라 하면 벗을 것요, 입을 찾으면 기꺼이 내 줄 것이다. 이 상황에 이기적이라 비난해도 감수할 것이다. 너 주제에 하며 만천하에 나를 세워놓고 마녀사냥 하듯 돌을 던져도 웃으며 맞으리라...
수로가 혼미해져 게슴츠레 젖어있는 마노의 이마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마노가 번쩍 정신이 들어 끈적한 큰 눈으로 수로를 쳐다봤다.
이왕 터질 봇물이라면 극초(極秒)도 길다.
수로가 손짓으로 적병이 여덟인데 여섯은 내가 해치울 테니 너가 둘을
해치우라고 했다. 마노는 알겠다고 그 큰 눈을 잠시라도 수로에게서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두 사람 동시에 지나가는 적의 선발대를 쳤다.
수로가 표창 4개를 빼 양손에 2개씩 잡아 던지고 칼로 적병 둘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마노도 나무를 차고 뛰어올라 내려오면서 한칼에 적병 둘의 목을 벴다.
거의 같은 시간에 여덟 명의 적병이 쓰러졌다.
적병들은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그래서 억울한 것도 없었다.
미소를 지은 채로 죽은 적병도 있었다.
- 장군...
경극 배우가 되겠다던 장수가 안개처럼 스며왔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장군을 불렀을 때는 소리만 들렸는데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 몇 명이야?
- 해치운 자가 삼십 명은 족히 될 것 같습니다.
- 본대의 움직임은?
- 무기를 챙기고 방금 자리를 떴습니다.
또 다른 장수가 보고를 했다.
- 역 매복은 차질 없지?
- 네, 적재적소에 배치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일거(一擧)에
움직일 겁니다.
- 시신을 수습하고 빨리 내려가자.
- 알겠습니다.
수로가 휘잇!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수로의 애마(愛馬) 검은 오려마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마노를 덜렁 들더니 오려마에 태운 수로가 달려갔다.
뒤따라 현갑 기마대 부하들도 수로 뒤를 따라 달려갔다.
* * *
김궤 부대가 차지한 적막한 공터는 불을 밝힌 모닥불로 주위가 밝았다.
모닥불 속 장작 타는 소리만 정적을 깼다. 너무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했다.
너무 조용해서 불안했다.
보초를 선 병사들은 피곤한지 창을 든 채로 고개 숙여 잤다.
이따금 장교로 보이는 군관이 공터를 가로질러 가다가 쥐고 가던
표주박 술병을 들어 마시고는 커어 좋다! 하고 비틀대며 막사(幕舍)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이다. 맥(貊)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연잠과 진풍의 잔당들 본대가 김궤 부대를 포위한 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가, 암암리에 염탐한 염탐(廉探)꾼이 이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내일 김궤 부대의 공습(攻襲)으로 부대가 전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산 중턱에 자리한 부대가 김궤 부대의 포위로 인해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부대원들이 굶어 죽어 부대 전체를 잃었을 것이다. 적장(敵將)은 미리 기습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 대견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적의 장수가 내린 섣부른 수신호 명령에 적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김궤 부대를 쳤다. 무질서했다.
명령에 따르라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괴성을 지르며 봇물 터지듯 밀고 내려갔다.
천막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속았다.
보초들은 김수로 부대가 해치운 병사들로 위장한 거였다. 그들이 칼로 내리친 건
그들의 전우였다. 그 전우들은 동료들에 의해 두 번 죽는 꼴이 되었다.
당황했다.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적의 실체가 보이지 않자 더 겁이 났고 무서웠고 공포가 엄습했다.
최고조의 공포가 기분 나쁜 싸늘함을 가져올 때 드디어 조금씩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김궤의 부대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던 거였다.
전설적인 군대, 신화적인 부대, 후한의 최고 정예군 김궤 부대가 사방을 포위하며
전모(全貌)를 드러냈다. 특히 검은 말을 탄 현갑 기마대를 보자 적병들은 오금이 저려 왔다. 연잠과 진풍의 잔당들은 김궤 부대의 위용에 기가 질려 그 자리서 돌이 됐다.
어떤 자는 오줌을 지렸다. 이젠 죽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잔당들은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포위만 하지 않았다면 칼을 던지고 벌써 삼십육계 줄행랑을 놨을 텐데... 처분에 맡길 수밖에, 패배감이 팽배했다.
그때였다. 적장이 홀연히 나섰다. 한때를 풍미한 백전노장(百戰老將)의 풍모로 백마를 타고 뚜벅뚜벅 진영의 무리에서 벗어나 밤바람까지 불어 희끗희끗한 장발(長髮)이 날렸다. 사람 두 배 크기의 창인 극(戟)을 오른손에 들었다. 왼팔은 투구를 옆구리에 꼈다. 금테가 두른 손잡이는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했다.
틀림없이 극(戟)의 고수였다. 금테 중간중간엔 손가락만 한 값비싼 사파이어도 박혀 있었다. 내리치는 칼을 막아낸 사파이어였다. 그래서 한없이 애착이 가는 극이었다.
적장은 극(戟)으로 싸워 누구한테도 져본 적이 없다는 자부심이 상당했다. 한때는 극으로 천하를 통일할 생각까지 했었다.
극 앞쪽 끝엔 칼의 장인이 빈철(鑌鐵)로 제작한 예리한 칼을, 뒤쪽 끝엔 날카로운 창을 달았다.
비적(匪賊) 떼 두목으로, 공손술의 장수로, 전쟁터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노장의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고 싶었다. 극(戟)을 땅에 세우고 대갈일성(大喝一聲)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사발(沙鉢) 깨지는 소리처럼 경망스러웠다. 대갈일성할 때까지는 적장의 부하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가 멋있어 보였다. 바람에 날리는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칼과 구레나룻을 보면 전쟁터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노련한 장수의 면모(面貌)를 보는 것 같아 자랑스러웠다. 사발 깨지는 목소리에 환상이 깨지기 전에는...
-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는 애도 울음을 딱 그친다는 표천대호군(彪天大虎軍)의 차 포(車包)장군이다! 내 유명세는 익히 들어서 알 것이니 내 전력을 장황하게 설명하 지 않겠다! 적장은 비겁하게 어둠 속에 숨지 말고 나와라! 나와 일 대 일 대결해서 내가 이기면 너희들이 항복하고, 만일 그런 일이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가 지면 깨 끗하게 항복하겠다!
김궤 부대 진영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잔당들 속에서도 어이가 없고 황당무계한지 실소를 자아냈다. 몰살의 위기에 처한 주제에, 90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려달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란 판에 이 무슨 과대망상(誇大妄想)에다 야랑자대(夜郞自大)냐... 적병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적장이 실성한 줄 알았다.
- 알겠다, 그 제의 받아주겠다!
김궤가 순순히 적장의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지막 발악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모진 누나가 선뜻 나섰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갑옷을 입은 모습이
여느 장수들 못지 않게 당당했다.
- 모진님, 저런 인간 말종의 피로 칼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주군, 제게 처단할 기회를 주십시오.
마노가 김궤 앞에 나가 꿇어앉아 절박한 듯 말했다.
김궤가 수로를 쳐다봤다.
인간 말종이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원한인가?
- 절, 나락에 빠트린 자입니다.
수로가 물었고 마노가 대답했다.
수로는 만감이 교차했다. 장군의 딸인 마노가 왜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나름대로 짐작이 되었다.
안타까웠고 가슴이 짠했다.
- 사사로운 감정은 대의를 거슬릴 수 있어.
- 사감(私感)이 아닙니다, 보답입니다.
- 보답?
수로가 아버지 김궤를 쳐다봤다. 마노는 기구한 인생 역정이지만 수로를
만난 게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수로에게 목이 날아간 적장이
수로를 만나게 한 천운을 가져다준 건 사실이니까...
- 해보게...
- 반드시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겠습니다.
마노의 말에 결의(決意)가 서려 있었다.
분노가 하늘을 찔렀지만, 수로를 만난 천운(天運)의
확인이라고 마노는 생각했다.
천운이 한갓 물거품에 끝나지 않으려면 저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