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장군의 딸 마노(瑪瑙).
천지를 진동하듯 내딛는 말발굽 소리가 물항아리 여인의 귀청을 때리며 점점 커지자 여인의 발걸음은 급해졌고 물항아리의 물은 금해진 마음만큼 출렁이며 흘러내렸다. 물은 여인의 몸을 적셨다.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흠뻑 적셨다.
물항아리를 머리에 인 여인이 마을에서 제일 큰 저택 안으로 아슬아슬하게 들어갔고 동시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온 수로의 말이 네 발에 힘을 가했다.
공중에 떴다.
수로가 탄 말이 항아리 여인이 몸을 숨긴 저택의 토담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물항아리 여인은 착각했던 거였다. 사람 키 두 배가 넘는 담을 말이 뛰어넘을 수 없을 거라 판단했던 게 잘못이었다.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제대로 쉬기 전에 경악하고 졸도할 충격적인 장면을 지척의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동시에 적진에서 달려 온 누런 몸통에 검은 주둥이를 한 공고라(qongqor) 말도 토담을 넘었다. 사람 키 두 배가 넘는 담을 말로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면 적장(敵將)의 무예도 상당 수준에 도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치명타(致命打)였다.
적의 장수가 극(戟, 과의 자루 끝에 창을 붙이고 사람 두 배 크기로 만든 무기)을 수로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수로가 가볍게 피하며 동시에 적의 어깨를 도연(刀鋋)으로 내리찍었다.
이 모든 동작은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제아무리 뛰어난 무예의 소유자라도 말을 타고 허공에서 극(戟)을 휘두른다는 것이 쉽지 않아 자세가 흐트러지기 마련, 한 수 위 무예의 고수 수로가 그것을 놓칠 일이 없었다.
두 마리의 말이 동시에 넓은 마당에 떨어졌다.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몸을 숨겨 인기척도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여인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물항아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은 채 서 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9척(2미터 10센티 이상) 장신의 수로가 산처럼 버티고
서서 여인을 내려 보자 여인은 선 채로 잠시 혼절해 비틀거렸다. 물이 출렁이며 떨어져 옷을 적셨다. 삼베로 만든 옷이 물에 젖어 여인의 탐스러운 몸에 굴곡진 선을 그리며 달라붙었다.
이게 바로 계욕(禊浴)인가? 너에게 재앙이 될지 복이 될지는 나 하기에 달렸나, 너 하기에 달렸나? 수로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적의 장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인과 수로를 번갈아 보다가 몸을 두 동강 내며 말에서 떨어져 절명했다. 사방에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쏟아냈다.
뒤따라온 기마대의 장수 셋은 수로처럼 토담을 넘었고 나머지 졸개들은 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흩어져 집을 빠르게 수색했다. 몸이 두 동강 난 적장과 적장의 말 공고라를 재빨리 치웠다.
장수 셋이 수로를 중앙에 두고 경계를 섰다.
수로가 여자를 찬찬히 살폈다.
농염한 여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정의 탓도 있지만 보지도 못한 딴 세상 사람의 모습을 한 여자가 신기해서 수로가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본 것이었다.
우뚝 솟은 콧날은 하늘을 찌르고 짙은 눈썹과 깊은 쌍꺼풀에 왕방울만 한 눈은 얼굴
반을 차지했고 옅게 거슬린 듯한 가무잡잡한 윤기 나는 피부의 이국적인 (異國的)인
모습은, 견고한 심지를 가졌다는 젊은 청춘을 흔들리게 할 만큼 뇌쇄적(惱殺的)이었
다.
- 항아리를 내리거라.
수로가 매혹적인 저음으로 던졌다.
그때서야 물항아리를 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여인은 얼른 물항아리를 내렸다.
눈치 빠른 수로의 부하 장수 둘이 물에 젖은 여자의 상의를 거칠게 찢어발기고 꿇어 앉혔다. 가무잡잡한 여자의 탄력적이고 풍부한 수밀도(水蜜桃) 젖가슴이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색목인(色目人)이라? 수로가 속으로 생각했다.
- 침실로 데려갈까요?
- 왜 마음에 들어?
- 아닙니다.
- 그럼, 그냥, 둬...
- 그냥 두기엔 아깝습니다, 헤...
- 노획물(鹵獲物)에 욕심을 부리지 마라, 필요한 만큼, 군량미도 필요한 만큼, 아녀자들에게 몹쓸 짓은 절대 하지 마
라, 명령이다. 그리고 적장은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라.
수로의 장수 하나가 수로를 위해 여자를 침실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수로는 머리를 가로젓고는 부하들에게 일갈했다.
말고삐를 돌리려는데 항아리 여인이 나섰다.
- 저도 데려가십시오, 장군...
- 너는 이 집 사람이잖는가?
- 이제는 아닙니다, 제가 모시는 주인은 보시다시피 장군님에 의해 죽었습니다.
- 하년가?
- 아닙니다, 비첩(婢妾)입니다.
수로는 아름다운 여인의 현실은 참 비참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실컷 일하고 밤에는 주인이라는 남자에게 실컷 시달리는 여인의 기구한 인생을 생각하니 측은지심이 들었다.
- 싫은데.
수로는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었다.
- 전리품인데, 전리품을 사용해보지도 않고 내팽개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여인이 당돌하게 대꾸했다. 죽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 전리품이라? 넌 인간이지 전리품이 아니다. 그러니 너 갈 길을 가거라.
- 싫습니다, 소저는 전리품입니다, 장군이 그렇게 생각하든 안 하든, 제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나라가 전쟁에 졌으니
여자는 전리품으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비첩이 된 운명도 전쟁에 패해서이니 전리품인 이상 제 소임을 다하겠
습니다. 부디 폐기(廢棄) 처분(處分)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 이 년이 죽으려고 용을 쓰느냐?!
장수 하나가 우렁차게 고함을 치더니 갑자기 칼을 꺼내 들고
항아리 여인의 목을 겨눴다.
벌벌 떨 줄 알았던 항아리 여인이 이미 죽음에 초연(超然)하다는 듯이
의외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장수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칼을 내리치려고 높이 들었다.
모두 숨을 죽였다.
장수 둘은 미소를 지었다.
- 야, 그만해, 웃기려고 하는 작위적인 행동이 너무 표시나.
- 재미있지 않았습니까?
- 전혀, 속이 다 들켰는데 재미가 나겠어?
- 저는 역시 경극 배우가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꿈을 접어야겠습니다.
장수가 계면쩍어 칼을 거두며 심드렁했다.
주위 장수와 병사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 그게 그렇게 안 되나?
- 넌 군인이 체질이야, 말뚝 박아.
장수 둘이 한마디씩 했다.
- 어디서 왔는가?
수로는 피부 색깔이나 얼굴 모양이 달라서 호기심이 일었다.
- 신독국 아유타라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 그 나라에서는 비첩이 아니었겠지?
- 네, 장군의 딸이었습니다.
- 일족이 있느냐?
- 험한 준령 넘어 일족들이 모여 삽니다.
- 음... 이름이 뭔가?
- 마노(瑪瑙)입니다.
- 음, 마노라... 어울리네, 자네가 이 여인을 취하겠는가?
- 함부로 그런 소리 마십시오, 마누라 둘, 잔소리에다 바가지 박박 긁어대지, 머리가 딱 아픈데, 또, 아이구야, 몸서
리쳐집니다, 저 눈 보세요, 저 눈이 보통 눈입니까? 사람 하나 딱 잡아먹게 생겼잖습니까?
경극 배우가 되겠다던 장수가 기겁을 하며 거절을 했다. 파란만장에다 산전수전까지 같이 겪었는데 수로의 마음을 못 읽으면 충복(忠僕)이 아니지... 마노는 부러웠다.
나도 저런 멋있는 주인을 모시는 충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로가 나머지 장수 둘에게 눈길을 주자 장수 둘도 경극 배우가 되겠다는 장수와 똑같은 마음으로 먼 산을 보며 딴짓을 했다.
- 일어나거라.
마노가 수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일어났다.
수로는 그 눈이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신경이 쓰인 정도로 마음을 곧추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지 다른 사내 같으면 허물어졌다. 그만큼 마노의 큰 눈은 치명적이었고
몸서리쳐졌다.
- 장군께서 절 택하지 않으시겠다면 자진(自盡)하겠습니다.
항아리 여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수로는 처음부터 이 여인을 보는 순간 함께하고 싶었다. 등창에 고생하는
아로를 돌봐야 하는 누나 혼자서 천둥벌거숭이 벽로와 말로가
생사가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데
다잡기엔 힘에 부쳤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 아니더라도 맏이인 자기가 책임지고 할 일이었다.
수로는 몸을 아래로 숙여 한 손으로 항아리 여인을 냅다 안아 말에 태웠다.
장수 셋과 병사들이 눈길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건 경외(敬畏)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수로는 또다시 토담을 넘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여인은 수로의 팔에 낚이면서 이미 반은 혼절했다.
아, 이런 사내라면...
수로가 뿜어내는 수컷의 향기에 넋을 잃었다.
목숨을 바치리라...
이제는 살아갈 목적이 생겼다는 기쁨에 환희에, 오르가즘을 느꼈다.
동물적 오르가즘이 아니라 조물주가 만든 인간 남녀에 대한 무한한
인간적, 본능적 신뢰라고 할까, 아니면 짧은 시간에 느꼈던 그간의
정리(情理) 같은 거라고 할까? 아무튼 내 마음의 갈피를 나도 모르는데
누가 알까...이대로 이 상태로 둘이서 세상 끝까지 달려가고 싶다.
마노는 몸의 반동을 이용해 수로의 등 뒤에 붙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런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면 마노도 마술(馬術)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수로는 몸을 앞으로 당겨 마노가 편하게 자기 등에 매달려 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