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132화)
낙빈(洛嬪), 6형제 어머니 정견모주(政見母主)Ⅱ.
- 그래, 진눈깨비, 피부병은 다 나았는가?
- 네, 주군, 염려해 주신 덕으로 말끔히 나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제야 피부병 나은 진눈깨비 말을 믿었고 오채지(五彩池) 존재 여부에 대해 설왕설래 등등 분분한 의견이 눈 녹듯 사라졌다고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오채지는 찾지 않으려고 하면 찾고, 찾으려고 하면 못 찾는 상상의 신비지(神祕池)라고 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우연히 찾게 되는 곳이라고 해서 일명 무욕지(無慾池)라고도 불렀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매일 오채지를 갔다가 오는 김궤와 낙빈이 상서로워 신비롭게 바라봤으며 지상의 인물이 아니라 천상계 신인(神人)이라 여겼다. 그 뒤로 김궤와 낙빈 그리고 6형제가 그곳에서 물장구치고 노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남자들은 모두 발가벗고 낙빈은 아랫도리만 가렸다고 했다.
다섯째 벽로와 막내 말로가 낙빈의 젖을 독차지하려고 싸우는 게 전혀 음란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외경(畏敬)스러워 보였다고 했다.
엄마가 스스럼없이 아기에게 젖을 내놓고 젖을 먹이는 것처럼 말이다.
경시제 유현(更始帝 劉玄)이 유인과 유수를 시기 질투했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유인 유수 형제를 높이 받들고 우러러봐서라고 했다. 그런 연유로 유인은 참살당하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유수보다 더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은 김궤였다.
김궤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낙빈이 톡톡히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낙빈은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환영받고 사랑받았다.
그들에겐 낙빈을 우러러보고 추앙하는 것이 자랑이었고 자부심이었다.
김궤와 낙빈과 함께라면 굶어 죽어도 좋다며 주변의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광무제 유수의 아내 음려화(陰麗華)는 늘 낙빈에게 미안해했다. 유수가 자기 미모를
보고 반할 때 마침 낙빈이 그 자리에 없었기에 유수가 자기를 택했다는 거였다. 만일
낙빈이 있었으면 낙빈을 택했을 거라는 거였다. 낙빈은 그랬다. 여화야, 니가 후한(後漢)을 구했다. 유수가 내 미모에 반해서 사귀자고 했으면 나는 그를 찔러 죽였을 것
이다. 난 그때 김궤를 사모하고 있었고, 김궤와 사귀고 있었다고 했다. 낙빈의 말이
맞는 말이다. 낙빈은 지방의 유지든 고관대작이든 왕이든 사귀자고 해서 사귀는, 그런
함부로 상대할 인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명령이니 결혼하자고 해서 결혼할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의 성문법이든 불문율이든 윤리든 풍습이든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낙빈이 퇴짜를 놨다고 해서 국민 정서상에도 이반(離反)되지 않았다. 백성들의 정서(情緖)도 낙빈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낙빈은 거침이 없었다.
사랑도 그랬다. 김궤를 보고 대뜸 그랬다. 나랑 사귀자, 밀고 당기고 하지 말자 끝내 돌아서 이 자리로 온다. 일분일초도 아까운데 왜 밀당을 해 시간을 낭비하냐, 당신도 날 좋아하지 않느냐? 어떻게 아느냐? 김궤가 묻자 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잖은가? 그러자 목석같은 김궤도 잘 봤다며 인정했다. 낙빈이 나를 안아봐라, 그러면 나에 대한 사랑이 두 배로 커질 것이다. 김궤가 낙빈을 안았다. 낙빈의 눈이 김궤의 눈을 삼켰다. 김궤는 형언할 수 없는 환락(歡樂)에 잠깐 혼절까지 했다. 낙빈이 뿜는 향은 천향(天香)이었다. 총명한 낙빈은 알고 있었다. 첫눈에 반하는 것보다 더 몸서리치는 것이 가슴과 가슴끼리의 쿵쾅거리는 교감(交感)이라는 것을... 둘의 사랑의 결실로 6형제가 태어났다. 김궤와 낙빈의 사랑은 연리지(連理枝)의 전형(典刑)이 되었다.
* * *
검은 철갑옷을 두른 검은 오려마를, 현갑을 입은 병사가 타고 전투한다는 부대, 현갑 기마대(玄甲 騎馬隊)를 위풍당당한 수로가 이끌었다. 철갑, 말, 사람 온통 검정이라 일명 어둠의 부대, 또는 유령의 부대라고 일컬었다.
특히 칠흑 같은 밤, 수로 부대와 싸우는 야전(野戰)에서의 상대편 병사들은 아무리 지쳐도 잠들 수가 없었다. 소리소문없이 유령처럼 나타난 현갑 기마대에 의해 목이 날아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수로의 부대는 아버지 김궤(金櫃)가 지휘하는 본대(本隊) 무강거(武剛車, 방호 설비를 갖춘 전차) 전차단(戰車團) 좌측을 책임졌다.
남겨진 가족과 식솔, 소수의 잔류병과 이별을 고하는 김수로와 다섯 형제, 그리고 부
대원들. 수로, 아로, 대로, 고로, 벽로, 말로가 어머니 정견모주와 가볍게 포옹을 하며
이별의 정을 나눴다. 아버지 김궤는 낙빈에게 갔다 오리라, 한 마디 툭 던지고 돌아
서 갔다. 낙빈이 뛰어가 뒤에서 김궤를 안았다.
- 어허, 참... 왜 이러시오, 당신답지 않게... 부하들이 보지 않소.
- 앞을 보고 이야기하세요, 앞을 보고, 제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수로의 어머니 정견모주가 애원했다.
- 이 손 놓으시오, 내 약속하리, 돌아와서 당신 얼굴 보겠소.
돌아보는 게 어려울 건 없지만 낙빈은 달랐다. 낙빈의 눈은 거역할 수 없는 뭔가 있었다. 그래서 만인들이 낙빈이라고 하는 거다. 한 번은 낙빈의 눈을 마주 보며 사랑의 눈빛을 교환하고 전장에 나갔는데 낙빈의 얼굴이 떠올라 전투가 잘 풀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칼을 휘둘러 적의 목을 벨 때도 낙빈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 집중할 수 없었다. 물론 힘들게 승리하여 승전보(勝戰報)를 알렸고, 돌아와서는 불함산(不咸山) 암수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눴지만, 군인이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하지 못했다 하여 스스로 자책했다.
- 깨지기 위해서 있는 게 약속이랍니다, 여보, 나를 보세요. 한 번만이라도,
당신같은 남정네들이 일방적으로 전쟁과 평화를 정하잖아요, 그러나 사랑만은 안돼요... 좋아요, 나라는 당신이 지
키세요, 사랑은 내가 지킬 테니... 여보, 제발 절 좀 보세요...
김궤는 기분이 묘했다. 오늘따라 낙빈의 행동이 이상했다. 그러나 김궤는 평상시 출
정 때처럼 담담하게 돌아보지 않고 낙빈의 손을 살며시 허리춤에서 떼 내고 부관이
잡고 기다리는 자기 말에 올라타 진두(陣頭)로 향했다. 김궤의 말만 김궤의 속을 아는지 히이이잉! 울고는 낙빈의
얼굴을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정견모주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남편 등짝을 보고 울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출정은 전쟁에 참전하는 남자 외는 모두 광무제(光武帝)가 있는 낙양에 볼모로 가기 때문에 다시 가족과 해후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과 등창으로 고생하는 아로(阿露)가 마음에 걸렸다. 남편 김궤에 대한 과한 행동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아 그랬다. 다음 전투에 나가라고 해도 한사코 따라나서겠다는 둘째 아들 아로의 고집도 여간하지 않지만 못 들은 척 묵묵하게 말 등만 손질하는 남편 김궤(金櫃)가 야속했다. 그 야속하고 무뚝뚝한 남편에게 다정다감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안아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서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신분(身分)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 김궤를 뒤에서 안았던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주군의 아내가 경망스럽다거나 무례하다가 아니라 안타까운 사랑에 찬사를 보냈고 함께 가슴 아파했다. 자기들의 헤어지는 사랑보다 더 애처로워했다. 그들은 헤어지는 남편이나 연인 보고 그랬다. 당신 목숨보다 김궤와 6형제를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쳐라, 했다.
많은 아낙네들이 낙빈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낙빈과 아낙네들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뜻에서 강강술래 춤을 췄다.
* * *
수로와 5형제가 업어줬던 모진은 미리 준비한 옷 보따리에서 검은 철갑옷 못지않은
전투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소풍 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기분 탓인지 무거워야 할 갑옷이 가벼웠다. 백지장을 드는 것 같았다. 쇠못이 수두룩 박힌 갑옷이 무명 적삼 입은 듯 가벼웠다. 박이(猼訑) 가죽을 찌고 짜서 나온 기름으로 얼마나 갑옷에 문지르고 발랐던가... 갑옷 빈틈 곳곳에 박이 기름이 슴뱄다. 흠을 막아 최소한 약점을 보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