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낙빈(洛嬪), 6형제 어머니 정견모주(政見母主)Ⅰ.
- 아들...
- 네, 어머니...
수로가 돌아서서 낙빈(洛嬪), 정견모주(政見母主)를 바라봤다. 후한(後漢)의 최고의
미인 음려화(陰麗華)도 스스로 내 미모는 낙빈 앞에서는 미모가 아니다라고 공언할 정도로 낙빈(洛嬪)의 미모는 눈이 부셨다. 절세가인이나 경국지색은 낙빈을 경멸하는 말이다. 인간의 말로는 낙빈의 미모를 설명할 수 없다. 정견모주가 수로를 앞으로 안은 채 뚫어질 듯이 수로를 쳐다봤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연인 사이인 줄 오해할 만큼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중국화(中國畵)에 나오는 미녀들의 눈보다 더 뇌쇄적(惱殺的)이고 아름다웠다.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보다 아름다웠다.
- 아로를 어떡해?
- 두고 가고 싶어도 아로가 싫다고 할 겁니다.
- 네 말을 잘 듣지 않니?
- 제 말을 잘 듣긴 하나 한번 세운 뜻 목숨과 바꿀 겁니다.
- 등창이 어지간해야 말이다.
- 그게 문젭니다. 등창이 도진 게 아로는 자기 잘못이라 자책하니까요.
- 고집불통, 왜 그게 자기 잘못이야? 토루(土螻)하고 싸우다 토루 뿔에 등이 긁혀 생긴 등창인데, 토루가 어떤 동물
이냐, 흉악하고 잔혹하기로 소문난, 사람을 잡아먹는 괴수 아니냐, 부딪치기만 해도 즉사한다는데 아로는 이 어미
를 향해 달려드는 토루의 뿔을 칼로 내리쳐 자르고 그 자리서 즉사(卽死)시켰지 않았느냐. 이 어미를 구했는데 왜
자책이냐 말이다.
- 그렇게 말입니다. 그 정도는 경미한 상처니 너의 완벽한 승리라고 해도 장수가 땅강아지나 개미임에 진배없는 미
물(微物)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것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치료나 해라, 한다면 아
로 고집에 자진(自盡)하고 말 것입니다.
- 토루(土螻)가 왜 땅강아지고 개미냐? 무시무시한 괴물이지...
- 루(螻)가 땅강아지나 개미 루(螻) 자(字)라, 아로 도련님 말로는 그게 변해서 오늘날 토루가 됐으니 궁극은 땅강아
지나 개미라는 겁니다, 마님이 마음을 놓지 못하니 괜찮으시다면 제가 따라가서 돌보도록 허겠습니다.
정견모주를 따라와서 문밖에 서 있던 수로 형제들이 업어준 모진이가 나서서 말했다.
- 안돼, 누나는 어머니하고 있어야지...
- 아니다, 자네가 그래 주면 내가 훨씬 마음이 놓일 것 같네.
정견모주는 수로를 안은 채 수로의 눈을 사랑 가득 쳐다보며 말했다.
모자간의 모습이 왜 상스럽지 않고 고귀해 보이는 건 뭘까?
수로나 정견모주는 속세의 인간이 아니라 아스라이 높은 곳 존엄의 경지에
있기에 그럴까?
아무튼 두 모자에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다.
- 어머니...
- 난, 어쨌든 낙양으로 볼모로 갈 거니까, 거기 가면 광무제 유수의 음려화(陰麗華)가 있지 않느냐, 자기 남편이 황
제가 되었어도 나를 언니 모시듯 하니 전혀 예기치 못하는 일이 생겨도 나를 어쩌지 못할 거야.
- 아버지와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 그럴 필요 없다, 네 아버지는 내 말을 꺾은 적 없다. 내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너니라.
- 제가 그럼 안 된다고 하면요?
- 안 할 걸, 너는 한 번도 내 말을 거역한 적 없으니까, 호호호.
- 알겠습니다, 어머니, 아로는 우리 다섯 형제가 최선을 다해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래, 고맙다... 몸 건강히, 항상 선봉에 서지 말고 적당히 눈치도 보고 그래라...
엄마의 마음은 여느 엄마의 마음이랑 다 똑같으니라...
이제는 정견모주가 천상계에서 속세의 땅으로 내려와 여느 엄마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다.
- 걱정마십시오, 제가 앞장 안 서면 대로가 나서기 때문에 제가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으하하하.
- 그 불같은 성질 어찌할꼬...
- 성질은 불같아도 틀렸다 싶으면 다른 누구보다 빨리 받아드립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어머니...
- 니가 장남이라서 좋다.
정견모주는 한 번도 수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로가 낙빈을 안은 채 덥석 들어 빙글빙글 돌았다. 낙빈은 어지럽다고 내려달라면서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모진도 정겨운 모자간을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수로가 어머니 낙빈을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자 낙빈은 수로의 탄탄한 근육질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에 맺힌 눈물이 수로의 가슴에 떨어질까 염려해 낙빈은 얼굴을 감추고 얼른 돌아서서 거처로 돌아갔다.
수로는 돌아서서 가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듯 애가 쓰여 바라보다가 우피(牛皮)와 저피(猪皮) 등 피찰(皮札)을 겹쳐서 촘촘히 박은 피찰갑(皮札甲)에 검은 철갑을 두른 현갑(玄甲)을 입은 뒤 칼을 빼서 들었다. 칼에서 광채가 났다. 명검 보광지검(步光之剑)이다. 살기가 바늘처럼 뿜어져 나왔다.
서늘한 기운이 주위를 압도했다. 칼을 살펴본 뒤 수로가 칼을 칼집에 꽂고 투구를 들
고 나갔다.
* * *
낙빈의 미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모였다. 천상계 미모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랬다. 옥황상제 막내딸이 아버지 몰래 지상으로 놀러 내려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낙빈이 어느 날 갑자기 동네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백의 아내 낙빈이 환생했다는 말도 있었다. 실제 환생도 했기에 그런 소문이 자자했다. 동네 원로가 너가 낙빈이냐? 묻자 낙빈이 그랬다고 했다. 그 낙빈이 나만큼 아름답습니까? 맞다, 그러자 그 낙빈이 이 낙빈이 맞습니다라고 했다 하니 수로의 어머니이자 김궤의 아내인 낙빈의 자존감과 존귀함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그러나 남편인 김궤 앞에서는 한 떨기 수선화처럼 다소곳하고 나긋나긋했다. 말이 적었다. 꼭 필요한 말만 청아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가솔(家率)과 병사들의 가족들을 챙겼고 솔선(率先)했다. 남편이며 수로와 5형제의 아버지 김궤보다 먼저 일어나 곱게 단장을 하고 남편 김궤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김궤가 일어나면 둘은 꼭두새벽에 신비의 오색채지(五色彩池)에 가서 몸을 씻었다. 오색채지에서 둘이서 뭘 하는지 누구도 몰랐다. 둘이서 서로 등을 씻어 주는지 아니면 부끄러워 서로 돌아서서 씻는지 아무튼 매일 꼭두새벽에 오색채지에 갔다. 아주 간혹 운우지정(雲雨之情)의 용울음 소리에 온갖 새들과 짐승들이 놀라 날아 올라가고 뛰어다녔다는 말만 무성했다.
오색채지(五色彩池)는 신비해서 사시사철 다섯 가지 색을 띠었고 겨울은 얼지 않았고 오히려 그 투명한 물이 따뜻했으며 여름에는 기온에 따라 차가웠다.
오색채지(五色彩池)를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한다고 했다. 범인(凡人)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오색채지를 찾으려고 나간 사람이 아직 못 찾고 산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곳도 아니다. 아주 우연히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마주치면 찾는 곳이라고 했다. 아주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오채지(五彩池)에서 목욕하고 나오니 몸의 피부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했다. 그러니 있긴 있는 건 확실했다. 피부병이 나은 사람이 또 찾으려고 갔더니 못 찾고 헤매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나뭇가지를 꺾고 조각 천으로 표시를 해도 소용없었다. 꺾어진 나뭇가지는 다시 복원되었고 표시해 둔 조각 천은 날아가고 없었다고 했다. 오채지는 산속 깊은 곳 소(沼) 정도의 크기여서 못 찾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채지에 갔다온 사람들은 이구동성 사방 둘레가 백척(百尺)은 족히 되었을 정도로 크다고 했다.
- 누구냐?
- 진눈깨비입니다, 주군...
- 여긴 무슨 일이냐?
- 길을 잃었습니다, 주군...
- 돌아서 나가면 길이 나오니라...
- 네, 주군, 바로 돌아서 나가겠습니다...
- 옛다, 이거 가지고 가서 구워 먹어라.
김궤가 들개만 한 하라어(何羅漁) 한 마리를 던져줘 이고 지고 해서 내려와 식구들과 구워 먹었다고 했다. 고질적인 피부병을 앓던 식구들이 모두 피부병이 나았다고 했다.
김궤 말 따라 돌아서 나가니까 나뭇가지들이 길을 만들어주고 무작정 걷는 길이, 길이 되었다고 했다.
며칠을 산속을 헤매며 다녔는데 돌아올 때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진눈깨비는 못 믿겠다면 자기 몸을 보라고 한 뒤 윗옷을 훌러덩 벗자 두둘두둘
고름 맺힌 종기와 진물이 가득했던 몸이 어린아이 피부처럼 깨끗했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모아놓고 진눈깨비가 떠들었다. 그리고 그랬다. 그때 낙빈도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타고 놀고 있었다고 했다. 반신반의하다가 낙빈 이야기를 하자 아무도 믿지 않았고, 혹자는 거짓으로 꾸며낸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둘은 멱살잡이를 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김궤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