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아버지는 베아트리체를 동경했다.
- 야, 아몽!~ 아몽!
비몽사몽 달갑지 않은 옛 추억을 반추(反芻)하며 꿈속에서 헤매는데 내 딸 조선의의 고함치는 소리에 억지로 깼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맑지 않았다.
- 야, 아몽? 아몽은 뭐야?
- 그런 게 있어.
- 아빠 몽대? 아몽... 헤... 그거 좋은데, 그래도 니가 이 집에서 나 보다
서열이 높다고 아빠보고 야가 뭐냐?
- 그런 뜻 아냐.
- 그럼 뭔데?
- 아큐 몽대...
- 아큐 몽대? 아빠 이름에 큐자가 있어?
- 무식하기는, 아큐... 아무개, 별 볼 일 없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 같은 존재...
- 루쉰의 아Q 정전의 아큐?
- 응...
선의의 바람 빠진 대답은 정말로 나를 ‘아Q 정전’의 아Q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인 건 나는 안다. 아빠 몽대를 줄여 아몽이라고 부르는 뜻이라는 것을 말하기가 쑥스러울 뿐...
- 하긴, 그럼, 넌?
- 피로 엮지 마, 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어...
- 예수님이야?
- 넌 여자가 몇이야?
선의가 대답이 궁색 하자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 너하고 엄마 즉 그러니까 네 할머니, 둘...
- 가족 말고.
- 없어... 네버...
- 이실직고해라, 다 알아...
- 아, 진짜 남들이 들으면 내가 여자 때문에 죽고 못 사는 줄 알겠다,
결백해, 진짜야.
안 들키면 무조건 오리발이 최고다.
- 민교 언니는?
- 민교는 고모잖아, 니도 그렇게 불렀고... 아는 후배, 친구 동생 등등 따지면 여자야 많지... 니가 물은 이유는 그게
아니잖아?
어쭈, 이런 식으로 머리를 굴린다 이거지, 하는 표정으로 선의가 나를 노려봤다.
- 고몬데 왜 자?
뭐라고 대답하지? 말문이 막혔다. 딱히 변명 댈 게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 고모니까 자지, 할머니 할아버지 너 나 그리고 고모, 원래 한 집에 자잖아?
- 죽는다, 잔머리 굴리지 마라.
-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주라.
- 일단 좋아, 나하고 엄마하고 민교 고모 빼고는?
- 가까이 오면 말해 줄게.
- 웃기고 있네, 이시유가 누구야?... 이름이 뭐 이래, 촌빨 날리게...
- 아, 그건 줄인 말이야, 이시하라 유우라고...
- 이젠 아주, 국제적으로 다릴 걸치네...
- 아냐, 사업상...
- 놀고 있네, 조교 주제에... 무슨 사업, 청춘사업?
- 어린애가 청춘사업 이런 말을 어떻게 아니? 완전 옛날 말이라 요즘 잘 안 쓰는데,
책 너무 많이 읽지 마, 건강에 안 좋아...
- 신경 꺼, 아몽이 어휘력이 빈약하다고는 생각 안 해? 자, 받아...
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딸 조선의가 유우로부터 전화가 오자 누워 있는 내 배 위에 핸드폰을 던졌다. 이제는 멀찍이 떨어져서 말했다. 나한테 잡히면 뽀뽀 세례를 받으니까 조심하는 거였다. 저 큰 눈 봐라, 아이고 무서워라, 가지도 않고, 지 아빠가 묘령의 여자랑 무슨 말을 하는지 아예 노골적으로 지키고 섰다. 그만큼 못 믿을 아빠라는 것일 거다.
- 여보세요?
- 유우에요...
- 알아요.
- 어떻게?
- 핸폰에 이시유라고 적혀 있으니까...
- 이시유?
- 이시하라 유우, 줄여서 이시유... 그리고 한국말도 잘하면서 왜 모르는 척이지?
- 그땐 몰랐어.
어느새 둘은 말을 놓고 있었다.
- 무슨 말이야, 남의 나라말이 그렇게 쉽게 배워져? 아무리 천재라도 말이야...
- 남이사...
니가 무슨 천재야, 스에마쓰 아야코면 몰라도... 스에마쓰 아야코는 내가 이틀 동안 사경을 헤맬 때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이틀 만에 한국어를 마스터했다고 했다. 에, 거짓말~ 내 말에 아야코는 가볍게 미소만 흘렸다. 내가 아야코에게 한국어가 외국인들에겐 배우기 힘들다고 하는데 넌 어떻게 이틀 만에 터득했냐고 하니까 한글이 어떤 나라의 언어보다도 우수하고 과학적이라 그 원리만 알면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믿기로 했다가 그 뒤 아야코를 서서히 알고부터 전적으로 믿었다. 아야코와 쌍벽을 이루는 그 한 벽이 이시하라 유우라는 걸 뒤에 알았지만, 유우라면 얼마든지 시간이 있었기에 이미 배웠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당시는 유우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몰랐기에 날 속이는 줄 알았다. 아마 잠깐 연락을 끊었을 때 한국어를 마스터한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쌩 깠는지 모르고...
- 용건이 뭐지?
- 꼭 용건이 있어야 전화하나?
- 그럼,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닌데...
은근히 유우의 반응을 떠봤다.
- 남들은 몇 날 며칠을 플랜 짠다고 골머리를 앓는데, 날 몰라라 하는 태도
너무한 거 아냐?
살짝 짜증이 났네, 이놈이 고분에서는 치근대더니 웬 돌변이지? 였다.
- 난 결정 나면 그 결정에 따른다고 했잖아...
사무적으로 목소리 깔면서 답했다. 설마 내 속을 알까? 하는 마음에 장난을 쳤다.
- 잠깐, 전화 바꿔 달래.
아니나 다를까, 내 말투에 이시하라 유우가 살짝 당황했다.
상대방의 심정을 알 수 없어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할지 몰라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것 같았다. 큭, 웃음이 났다. 순진한 공부벌레야, 이론만 가지고 알 수 없는 게
남녀 간의 문젭니다, 키득 키득...
- 누가?
- 수진 씨가.
- 같이 있어?
- 숙식같이 했어, 수진씨 집에서...
- 뭐? 오지랖도 넓다.
- 왜, 떫어?
말투가 기분 상한 말투다. 큭, 속으로 웃었다... 넌 아직 하수야...
- 좋은 거부터 배운다.
- 내가 같이 있자고 했어.
- 어, 누나...
수진 누나가 유우의 핸드폰을 건네받아서 말했다. 심각한데 차분했다.
- 내가 먼저 전화 안 한 건... 음...
- 내가 뽀뽀 언제 해줄 거냐? 징징댈까 봐?
나까지 사무적으로 누나를 대하면 누나가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실없는 말을 던졌다. 어릴 때 미국으로 유학 가서 그쪽 생활에 젖어 직설적일 텐데도 누나는 지금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조심스러워하는 말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 너, 진짜, 내가 해준다 했잖아, 이게 은근슬쩍 어물쩍 농담 반 진담 반 넘어가려는
너 같은 남정네들 내가 한둘 본 줄 알아, 난 그렇게는 못 해, 해, 말아? 딱 두 마디 할 거야.
- 새삼스럽게 왜 정색이야?
- 이봐라, 이런다니까, 꼭 내가 애달픈 것처럼... 내가 왜 너한테 정색을 해? 내 캐릭터,
내 성깔을 너한테 주지시키는 거야, 그래, 내가 애틋하다, 오늘 화끈하게 해줘?
입술을 물어 다 뜯어버리게, 다시는 뽀뽀 소리 안 나오게 해줄게, 앙~ 큭, 유우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침 댓바람부터 수위 높은 발언이냐 싶은가 봐...
누나의 발언에 상큼 과장이 섞인 건 은근히 유우를 견제하기 위한 여자의 본능이랄까?...
- 팜므파탈이 저렇게 생겼구나 싶겠지.
- 진짜 물어뜯는다.
- 보낸 게 뭐 잘못됐어? 수업계획서? 자소서?
- 아냐, 그건 아무려면 어때, 음...
- 말해 봐, 천하의 장수진이 못 할 말이 있냐?
- 염치가 없는데, 밥 한번 먹자고, 엄마가...
- 그래, 먹어, 난 또...
-아니, 말이야, 그게, 음... 딸 있지?...
누나가 딸이라는 말을 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게 고스란히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누
나가 왜 먼저 전화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어색할까 봐서다. 내 딸 조선의
말을 꺼내야 하는데 조심스러웠던 것 같았다. 유우를 먼저 내세우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딸 조선의의 출생의 비밀을 아니까 더욱 그런 것 같았
다.
- 조선의?
- 딸 이름이 조선의야?
- 응, 조선의 뭐라도 돼라, 조선의 국모든, 조선의 여장부든, 아니면 조선의 조신한
마누라든... 그런 뜻에서 내가 지었어.
- 이름 이쁘네...
- 왜?
- 같이 밥 한번 먹자고, 엄마가 물어보래? 미안...
- 왜 미안해, 누나가... 얘기는 해볼게, 근데 보통 사납지가 않아, 완전 왈가닥이야...
- 니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가만히 듣고 있던 선의가 소리를 질렀다.
- 아, 예 예... 들었지, 감당이 안 될걸?
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선의에게 주억거렸다.
- 아냐, 너무 좋아, 나하고 코드가 맞을 것 같애, 네? 유우씨도 코드가 맞을 것 같애.
- 근데...
- 왜? 뭔 문제 있어?
- 할머니하고 안 떨어지려고 할걸...
- 몽대 어머니?
- 응
- 같이 오면 안 돼? 너무 좋지, 아버지도... 나도 보고 싶다 말이야, 나보고 며느리 삼고 싶다고 했어,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어릴 때.
누나가 흥분했다. 혹 실수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내가 순순히 받아주니까 들떴
다. 성제가 한 짓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반인륜적인 짓인지 알기에 선뜻 말하기가 어
려웠다. 트라우마를 들추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던 거였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고, 남이 들으면 동네 우사한다, 함부로 그런 소리 말아,
이 동네는 개 족보냐고 욕한다.
- 왜 개족보야?
- 누나하고 동생인데.
- 뽀뽀해달라는 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