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숲 속에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들이 어둠에 잠겨 검은색으로 보였다.
“……”
“……”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아타르를 굳이 처음 만났던 숲 속으로 끌고 온 엘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기세 좋게 끌고 온 것은 좋았는데, 다음 계획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어, 어색해!’
아타르의 얼굴에 불만이 서려있었다. 엘리가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입을 열었다.
“저기, 도와줘서 고마워.”
“그냥 정리하러 나간거야. 주변이 시끄러워서.”
“그, 그래도 고마워.”
이게 대체 무슨 대화람. 엘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걱정부터 하는게 좋을걸? 대체 무슨 베짱으로 날 이리로 데리고 온 건지.”
“하하…”
“웃어? 신전의 이단 심문관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아타르가 비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삐뚤게 올라간 입매에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마디로 재수 없었다.
‘재수 없어!!’
비웃는 아타르의 얼굴을 보자 엘리의 속에서 괜히 울컥 화가 올라왔다.
“그래.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말고 내 갈 길 갈 걸 그랬네.”
“그러게. 그러지 그랬어.”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아타르의 대답에 엘리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참자. 참아야 한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주먹으로 치면 안 된다. 엘리는 주먹을 꼭 쥔 채 화를 다스렸다.
‘아까 본 아타르의 힘이 무서워서 참는 건 절대 아니고… 암. 절대 아니지.’
엘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타르는 무표정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숲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타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신관 노릇도 물 건너 갔네.”
“그러게.”
“원래 뭐 하던 놈이야? 애초에 살던 집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그러게…”
엘리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아타르는 무의미하게 검은 숲을 바라보던 시선을 엘리에게로 돌렸다. 아타르의 시선이 기묘해졌다.
“하긴 처음 봤을 때부터 정상은 아니었다만…”
아타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옷을 입고, 신관도 아니면서 신의 힘을 마구 휘두르는 엘리는 확실히 이상한 여자였다. 아타르가 코웃음을 쳤다.
아타르가 엘리에 대해 다시 회상하고 있는 사이, 엘리의 머릿속에서 한 문장이 스쳐지나갔다. 얼마 전에 봤던 책에서 이야기 했던 ‘용의 심장’이 퍼뜩 기억났다. 엘리가 벌떡,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타르!”
“뭐, 뭐.”
“아타르.. 용이야? 아니 혹시 용이세요?”
엘리의 요상한 물음에 아타르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이제 와서 물어보기엔 너무 늦은 질문 아닌가? 아타르가 어이 없다는 얼굴로 엘리를 바라봤다.
“맞구나! 용이구나!”
“너 진짜 이상한 인간…”
“어허흑흑 진짜 용이 있었어!”
엘리의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엘리에게 몇 마디 하려던 아타르가 딱딱하게 몸을 굳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왜 울어? 졸지에 인간 한 명을 울려버린 아타르가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뭔데!”
“진짜 미안한데… 어흑…”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 이렇게까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가? 엘리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끊임 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놀랐다. 애써 막아 뒀던 감정이 터지자 봇물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엘리가 절박한 목소리로 아타르를 불렀다.
“아타르.”
“뭐, 뭐.”
반대로 아타르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용인게 눈물까지 흘릴 일이야? 탄생한 이래로 많은 경험을 했던 아타르였지만, 지금 상황은 아타르도 처음 겪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엘리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심장 좀 빌려줄 수 있을까.”
“심장?”
갑자기 무슨 심장 타령이란 말인가. 아타르는 자신이 엘리의 말을 잘못 이해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말에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니 빌려 줘야만 해.”
엘리의 시선에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엘리의 이성은 이미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마비 된 상태였다.
엘리의 시선에서 약간의 광기까지 느낀 아타르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아타르가 뒷걸음질 친 걸음 수만큼 엘리도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아타르.”
“싫어!!”
16.
“…미안.”
한참 뒤 진정한 엘리가 콧물을 훌쩍이며 사과를 건냈다. 아타르의 얼굴에 분노가 잔뜩 서려 있었다.
“갑자기 내 심장을 요구한 이유가 있겠지.”
“다, 당연하지.”
없다고 하면 아까 리자드맨 위로 떨어졌던 번개가 자신에게도 떨어질 것 같은 기세였다. 엘리는 아타르의 눈치를 보며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해야겠지. 심장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엘리가 잠시 멈칫했다.
‘그런데… 뭐라고 설명하지?’
사실 나는 천 년 후의 미래에서 왔어. 집으로 돌아가려면 네 심장이 필요하대.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엘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엘리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엘리의 이야기를 기다리던 아타르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수작 부리지 마.”
“…넵.”
법은 느리고 주먹은 빠르다고 했던가. 아타르의 위협에 엘리는 줄줄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신이 풀 네임이 아우리엘 문이며 문 백작가에서 왔고 그 백작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후에 존재 한다고. 자신은 지금 여기 검은 숲에서 붉은 색의 빛이 나는 보석을 발견했고, 그 보석으로 인해 천년 전의 과거로 넘어온 것 같다고. 엘리는 숨도 쉬지 않고 줄줄 말했다.
말하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져 시간이 제법 흘렀다. 아타르는 엘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의문을 표하지도, 그렇다고 긍정을 표하지도 않았다. 아타르는 그저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래서. 얼마 전 신전에서 책을 읽었는데. 시간 마법을 설계하려면 용의 심장이 필요하대.”
“설계 할 줄은 알고?”
“……..”
엘리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아타르를 바라봤다. 아타르가 바위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심장에 그런 기능은 없어.”
“……..”
아타르의 대답을 들은 엘리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겨우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것도 아니라니. 정말 평생 이 곳에서 살아야 하는 건가. 눈물을 쏟아내려는 엘리를 본 아타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붉은 보석.”
“…?”
“신경 쓰이는군. 네가 발견한 그 붉은 보석이 정말 심장이었을수도 있어.”
시간이 얽혀있으니 단순한 사건은 아닐 것이다. 아타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대륙이 만들어진 이래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으나 시간을 건너온 이는 없었다. 아타르는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아타르의 붉은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잠시 고민하던 아타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용들은… 영생을 살아.”
“…….”
“오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오래 전 영원한 잠에 빠진 녀석이 있지.”
엘리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아타르를 내려다 봤다. 엘리는 조용히 아타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녀석 거대한 산맥이 됐어.”
“이젠 없는 거야?”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 간단해. 죽은 것처럼 보여도 이 땅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엘리는 잠시 숨을 멈췄다.
“아타르도?”
아타르가 고요한 시선으로 엘리를 올려다봤다. 푸른 색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아까부터 고여있던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타르가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산맥 아래 어딘가에 심장이 남아있을 거야.”
“…….”
“도와줄게.”
아타르는 자신이 약간 충동적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이상한 여자와의 인연이라고는 얼마 전 스쳐 지나간 것이 다였다.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였다. 그리고 아타르는 그런 관계에 연연하는 편도 아니었다.
'물론 그랬던 적도 있었지.'
아타르는 까마득하게 먼 과거를 잠시 떠올렸다가, 이내 떨쳐버렸다.
'이 여자와 얽혀있는 시간을 따라가면, 내가 원하는걸 얻을 수 있을 수도 있어.'
그래서 그렇게 말해버린 거야. 아타르는 스스로에게 대답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