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무엇이든 잘 베는 여자 클레어 아우프 데어 마우어 PART.1
클레어 아우프 데어 마우어는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에 잠을 깼다. 사육제기간(보통 2월 중하순) 새벽은 여전히 추웠다. 난롯가의 온기가 사라지자 깔고 잤던 지푸라기 아래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돼지새끼가 어딜 간 거야?」
클레어는 바닥에 깔아 놓은 톱밥에 밤새 고인 가래를 뱉으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겨울철에 따듯하게 껴안고 자는 새끼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을 발로 더듬거리며 아래로 일곱 명인 동생들을 하나하나 건드려 보았지만 혐의를 찾을 만한 녀석은 없었다.
「아, 사육제 기간이지.」
클레어가 왼쪽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한달 전 머릿니 때문에 빡빡 밀어버린 왼쪽머리가 새순 같이 제법 빽빽하게 자랐다.
「거울.」
보기는 좀 그렇지만 머리 감기 편해서 오른쪽 머리도 밀어버릴까 고민 중이었던 터였다. 얼굴을 보려고 그녀는 아버지가 갈아놓은 도끼를 꺼내 들었다. 즉, 이 집안에서는 도끼가 거울이다.
「아함, 인간은 왜 아침에 일어나면 입냄새가 나지.」
악취가 진동하는 집 앞 개울가로 나온 클레어는 머리를 보기 앞서 치아부터 점검했다.
타고난 강골인 클레어는 모든 게 빽빽하고 굵고 단단했다. 무거울 정도로 많은 머리숱, 빈틈없이 고르고 단단한 치아. 그리고 저녁에 먹은 귀리껍질과 닭고기 찌꺼기가 치아 사이에 하얗게 덩어리져서 매달려있었다.
「굴 껍데기 가루는 효과가 없네.」
수도에서는 남쪽 대륙에서 유행이라면 모든 게 선망의 대상이다. 과거 화려한 문명을 잠시 이곳에 전하고 떠난 남쪽대륙 로마누스 제국 사람들에 대한 환상과 동경 때문이다.
최근에는 굴 껍질 치약이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다. 말오줌에 굴 껍질가루를 섞어 양치하는 것이다. 클레어는 혓바닥으로 이를 스윽 훑어보았다.
「아아.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양치효과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치태가 단단해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암염으로 양치하는 게 났겠어.」
라고 중얼거리는데 염색공방 쪽에서 이른 아침부터 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두 데나리온. 이걸로 어떻게든 부탁합니다.」
「부인, 조합 규칙이라는 게 있소.」
「물론 그렇지만.」
「아니면 한 등급 낮은 장인을 부르시던가.」
「이웃이잖아요.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곤란하군. 이쪽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
클레어의 아버지인 프란츠와 건너편 개울가 제빵업자 갤러거 부인이었다. 클레어는 기둥 뒤에 숨어 대화를 들었다. 아버지는 도끼를 들고 있었다. 날이 녹슬고 군데군데 이가 나간 물건이었다.
「아르테벨테 주교가 사주했나요? 아니면, 기 백작이?」
「여긴 공화국이오. 귀족 없어진 게 언제인데. 모두 평등하지.」
「내 남편은 마녀가 아니에요.」
「아마 그럴 거요.」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나요?」
프란츠는 대꾸하지 않은 채 묵묵히 옆에 있는 숫돌에 도끼날을 갈았다. 그 옆에는 잠시 후 두 동강이가 날 새끼돼지가 묶여 있었다. 클레어가 어젯밤 안고 자던 놈이다. 프란츠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부르크하르트에서 내게 열 데나리온을 제시했소. 최대한 고통스럽게 보내달라 하더군.」
「신 앞에 두렵지 않나요?」
갤러거 부인이 떨고 있었다. 추위 때문은 아닐 것이다. 프란츠는 말 없이 숫돌로 녹슨 도끼날을 갈았다.
「의뢰를 받은 이상, 한 번에 보낼 순 없어. 최소 두 번은 내려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두 배 배상해야 돼. 업계 평판이라는 게 있소.」
「내가 이십 데나리온 이상을 지불한다면?」
프란츠가 도끼를 갈다가 멈춰섰다. 그리고 눈만 갤러거 부인을 향한 채 말했다.
「준비됐소?」
그러자 갤러거 부인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치마를 들어 올리며 자신의 국부를 프란츠에게 보였다. 상품을 평가하듯 물끄러미 그녀의 은밀한 곳을 관찰하던 프란츠가 고갤 끄덕였다.
「안에 들어가 계시구려.」
부인이라고는 하지만 결혼한 지 이 년도 되지 않은 젊은 여인이었다. 기껏해야 클레어보다 한두 살 많을까. 갤러거 부인이 염색공방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클레어는 구역질이 났다.
「벌써 일어났어? 오늘 아침은 귀리죽 말고 갤러거네 가게에서 빵이라도 사와. 든든하게 먹어야 할 거 같으니.」
모퉁이를 돌다 날 선 도끼를 들고 있는 딸을 본 프란츠가 무뚝뚝하게 동전을 던지며 말했다. 그러자 클레어가 쏘아붙였다.
「빵이 문제가 아니라 허리 아파서 오후에 도끼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겠어요?」
퍽!
프란츠는 딸에게 따귀를 올려붙이는 신사가 아니다. 수십 년간 수백 명의 머리를 내려쳐 온 잘나가는 이 사형집행인은 진리 하나를 알고 있다.
귀족이고 부자고 천민이고 창녀고간에 죽음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 그리고 죽도록 패면 인간은 한 없이 작고 순종적이 된다. 그는 공평하게 자녀를 주먹으로 다스렸다.
「우욱...」
무지막지한 주먹에 복부를 강타당한 클레어는 헛구역질을 하며 주저앉았다. 다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오오. 달거리 중이구나. 더러운 년. 처먹는 입이 여덟 개인데 네년 학교까지 보내려면 내 손에 피를 좀 더 많이 묻혀야겠지? 그래 안 그래?」
「죄, 죄송해요.」
머리채를 잡고 위협하는 아버지에게 클레어는 맘에도 없는 사과를 하며 연신 고갤 숙였다. 살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정말 죽일지도 몰라. 이 인간, 사람 죽이는 게 일상인 사내니까.
「씨발년. 그런 반반한 얼굴을 해가지고 대가리를 빡빡 밀면 어쩌자는 거야? 거세 학교인지 내시 학교인지의 도련님들이 개눈이라도 박은 줄 아냐? 그런 몰골이면 네 년이 알아서 다릴 벌려줘도 다 도망가겠군.」
이 집구석에서의 삶은 지랄 같고 더럽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거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인간 백정인 아버지 덕분임을 클레어는 알고 있다.
‘버텨야 돼. 견습 드래곤 볼브레이커스가 될 때까지는.’
모두가 중도탈락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마지막 학년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 사형집행인의 딸이라는 꼬리표와 미래 없는 인생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공방서 좀 씻고 올게요.」
「손톱도 깎아. 어떤 놈이 ‘푸른 손톱’한테 들려 붙겠냐.」
푸른 손톱(Ongle Bleue). 염색공들에게 붙는 경멸적인 별칭이다. 클레어의 모계는 염색공 조합가문이다. 염색업 특성상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데다 가공 때 발생하는 악취 때문에 그들은 대대로 성 밖 하층민 구역인 개천가에 몰려 살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어머니는 근처에 사는 사형집행인 프란츠의 눈에 들었다.
「강간당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동생들이 어머니에 대해 물으면 클레어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클레어를 낳자마자 산욕열로 사망했기 때문에 실상을 알 수는 없다(즉, 클레어의 일곱 동생은 모두 배다른 동생들이다). 하지만 마을에서 손꼽히는 미인이었던 그녀가 소유욕과 성욕, 신분상승욕으로 똘똘 뭉친 짐승인 아버지를 사랑했을 리 없다.
「들어갈게요.」
「누구세요?」
염색공방 문을 열자 옷을 벗고 씻고 있던 갤러거 부인이 놀라 가슴과 중요 부분을 가린 채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저도 좀 씻어야 해서요.」
「물을 끓일까요?」
「아뇨. 땔감 아깝다고 두들겨 팰 걸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지 갤러거 부인이 고갤 끄덕였다.
「남편 일은 죄송합니다.」
「그쪽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요.」
갤러거 부인이 한 숨을 쉬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사형집행인 딸에게 동정을 받다니 우습군요.」
「이거 받아요.」
클레어의 거칠고 커다란 손이 갤러거 부인의 손바닥에 포개졌다. 갤러거 부인의 손 역시 클레어 못잖게 거칠고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그녀도 어릴 적부터 새벽마다 밀가루 반죽을 준비하느라 손 마를 날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십 데나리온이에요.」
「왜 나한테?」
클레어가 염색통에 걸쳐 둔 부인의 로브를 건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악물고 살아요. 저런 개자식에게 아랫도리 보이지 말고.」
짧은 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갤러거 부인이 고갤 끄덕인 뒤 두 말 않고 이십 데나리온을 소매에 넣었다.
「빵이 간절히 필요할 때가 오면 찾아오세요. 꼭 갚겠어요.」
「그럴 일 없길 바라지만.」
「주의 축복, 생 오노레(Saint Honore : 카톨릭에서 제빵업자들의 수호성인)의 가호로 양식이 끊어지지 않기를.」
갤러거 부인은 성호를 긋고 축복한 뒤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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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를 끊어봐.」
염색공방 옆에 묶여 있는 새끼돼지를 가리키며 프란츠가 말했다.
「못 해요.」
눈가에 피멍이 들고 입술이 부어터진 클레어가 간신히 입을 벌려 말했다.
「이걸 써.」
프란츠는 날카롭게 벼린 처형용 도끼를 클레어에게 던졌다.
「단칼에 사형수의 머릴 베면 보통은 유족에게 답례로 새끼돼지 한 마리를 받지. 하지만 사형수에게 원한이 있는 의뢰인이 그 두 배를 제시하며 사주할 때가 있어.」
꿀꿀거리며 엉겨 붙는 새끼돼지를 발로 밀어내며 프란츠가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보통 두 번 내리쳐 머리를 자르지.」
머뭇거리는 클레어로부터 도끼를 빼앗은 프란츠가 거침없이 새끼 돼지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퍽! 목뼈가 쪼개지고 근육조직이 드러나면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새끼돼지의 머리가 다 잘리지 않아 몸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하지만 돼지는 미동도 비명도 없었다.
「척수가 끊어져서 감각이 없어. 이러면 고통 없이 두 번 내려쳐 보낼 수 있지.」
이윽고 프란츠는 도끼를 휘둘러 몸통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머리 부분을 내려쳐 새끼돼지의 숨통을 완전히 끊었다.
「나도 원칙이 있어. 빠르게. 고통 없이. 두 번 내려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프란츠가 이십 데나리온이 든 동전 주머니를 클레어 앞에 내던지며 말했다.
「네년이 줬나?」
「...」
「멍청한 년. 학비를 내줘서 어쩌겠다는 거야?」
「장학금 받으면 돼요.」
「피는 못 속이지.」
프란츠는 쉰 맥주 냄새나는 숨을 내쉬며 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년은 날 닮았어. 베고 자르는 건 타고났지. 하지만 무슨 수로 볼 브레이커스가 되지? 네 년은 양말도 제대로 못 꿰매잖아.」
프란츠는 성숙한 큰 딸의 풍만한 가슴골에 이십 데나리온이 든 주머니를 끼워 넣으며 비릿하게 말했다.
「난 부르크하르트에게 많은 도박 빚을 졌어. 하지만 네 학비엔 손댈 수 없지. 부잣집 도련님을 유혹하든 볼 브레이커스가 되던 그건 네 자유야.」
「아버지, 새끼 돼지가 안 보여요.」
목소리가 난 쪽을 부녀가 돌아봤다. 둘째 딸 아가타가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며 두 사람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목이 달아난 새끼 돼지를 보더니 이윽고 무덤덤하게 공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부댕(선지를 가득 채워 만드는 유럽식 순대) 만들 준비 할게요.」
아가타가 진창에 끌리는 로브를 무릎까지 들어 올리며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막 사춘기가 시작됐지만 얇은 로브 속으로 비치는 타고난 몸매는 뭇 남성의 욕망을 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둘째 딸의 모습을 바라보던 프란츠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클레어에게 말했다.
「돈을 갚아. 아니면 내게 계획이 있어. 네 동생 아가타 말이야,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거 알지?」
손등에 튄 돼지 피를 큰딸의 앞가슴에 닦은 뒤 프란츠는 집으로 들어갔다. 클레어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옥에 떨어질 인간! 불쌍한 아가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올해 견습 볼브레이커스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 하지만 클레어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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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한 번에 잘라 쪼개다니.」
슈발리에 학과장 스벤 경은 눈을 의심하며 조교에게 말했다.
「저거 텔레마코스의 성체가 맞나?」
텔레마코스는 드래곤 중 가장 작고 개체수가 많은 종이라 실습교재로 널리 쓰인다. 황소 정도 크기에 온순한 초식성이지만 가죽은 여느 드래곤 못지않게 견고해 주로 절단 실습에 썼다.
「좀 작은 개체지만 분명 세 살짜리 수컷 사체입니다.」
「그럼 가죽이 웬만한 주철로도 베이지 않을 텐데.」
「저 검은 다메섹 강철이니까요, 학과장님.」
「그럼 자넨 한 번에 저렇게 깔끔하게 벨 수 있나?」
「어렵습니다.」
조교는 검을 휘두른 그 여학생의 허벅지보다 굵은 자신의 팔뚝을 매만지면서 고갤 저었다.
「내려칠 때 무게중심이나 근육의 탄력, 자세의 안정감이 정식 볼브레이커스 못잖았습니다.」
「어디서 저런 보물이 나타났지?」
대화를 마친 스벤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 킬로그램 무게의 리히트슈베르트(Richtschwert : 참수용으로 특화된 검)를 휘두르고도 신입생은 숨소리조차 평온했다.
「훌륭하군. 자네 이름이?」
「클레어 아우프 데어 마우어입니다.」
「대대로 '성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기사 가문 말인가?(Auf der Maur는 ‘On the wall’이라는 뜻의 희귀성이다)
」
「...」
클레어가 얼굴을 붉혔고 순간 스벤은 괜한 질문을 했다 생각했다. 검을 쥐고 있는 이 낯선 여학생의 푸른 손톱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아마 아니겠군.」
「저는 염색공의 딸입니다.」
클레어는 차마 아버지 쪽 출신은 밝히지 못했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뒤 스벤이 물었다.
「한 번 더 휘둘러보겠나?」
「예?」
「그냥. 휘둘러만 봐.」
클레어는 자신에게 집중된 동급생들의 시선을 살폈다. 이런 식으로 관심 받는 게 유쾌하지는 않지만 학과장에게 실력을 어필할 필요는 있었다.
휙. 묵직한 검이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렸다. 각 상업조합에서 선발한 신입생 중에는 장작 한 번 패본 적 없는 부잣집 도련님들이 수두룩했다. 안목이 없으니 뭘 봐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스벤은 자세만 보고도 그녀가 가르침의 기쁨을 온전히 맛보게 해줄 수재임을 깨달았다.
「자네 정말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닌가?」
「예.」
「그렇다면 자넨 염색조합의 영광이군. 타고난 재능의 학생이 입학했어. 모두 주목. 이번 실습은 조교의 시범이 필요 없소. 모두가 그녀의 동작과 자세를 보고 연구하시오. 아마 모두가 졸업 때까지 이 과목의 수석을 그녀로부터 빼앗긴 어렵겠지만 모두 그녀를 본받아 연마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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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는 지난 십 년간 드래곤 거세 학교에 입학한 학생 중 가장 우수한 자원이었다. 사년 과정을 이년 만에 수료하고 단숨에 사학년 졸업반으로 뛰어올랐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과에서 수석과 차석을 다퉜다.
장검술 및 펜싱 수석 클레어 아우프 데어 마우어.
입식 격투입문 수석 클레어 아우프 데어 마우어.
법학 판례수업 차석 클레어 아우프 데어 마우어.
단, 마상 기예수업은 30등 이하였다(보통 수준의 성적이다). 가난해서 말을 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문무를 겸했다는 표현이 적합한 수재였다. 그런 그녀의 발목을 잡는 수업이 딱 하나 있었다.
「해부학 실습. 낙제일세.」
의학학과장실에 불려간 클레어에게 학업성취증서를 내밀며 와트 교수가 고갤 저었다.
「이래서는 아무리 타과성적이 우수해도 견습 볼브레이커스 승급이 불가능해. 뭐가 문제인가?」
학과장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다.
「저렇게 우수한 자원이 승급이 안 되다면 누가 볼 브레이커스가 되겠소?」
삼년 안에 승급자를 매년 십 퍼센트 이상 끌어 올리라는 교장의 으름장 이후 학과장들은 클레어를 확실한 안전판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사학년 총책임이자 견습학과장인 기르카스 경이 대표로 물었다.
「문제가 뭡니까, 와트 박사?」
와트 박사의 평가는 냉정했다.
「섬세함이 너무 부족해요. 여학생이라 당연히 거세 후 봉합이나 적출 따위는 남학생보다 잘 하리라 생각했는데.」
「여자라면 집에서 베도 짜고 닭내장도 꺼내보고 하지 않나요?」
「개인 교습을 받으면 좀 나아지지 않겠소?」
여자니까, 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그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낙관적인 전망만 늘어놓았다.
「저 상태에서 실전배치는 어림없습니다. 봉합자리가 터져 귀한 드래곤들이 고름이 차고 상처가 덧나 죽을 게 뻔해요.」
「그럼 어쩌자는 거요? 다른 과목은 모두 수석 아니면 차석인데 와트 박사만 낙제를 시켜놓으면 교장이 교수평가 때 그냥 넘어갈 거 같소?」
기르카스 경이 언성을 높이자 마침내 중재자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모두의 시선이 슈타이너 경에게 쏠렸다.
「오, 위대한 슈타이너 경. 역시 복안이 있으시군요.」
「물론입니다. 저도 기대되고요. 클레어 아우프 데르 마우어 양은 훗날 저 장미창에 새겨질 자격이 충분한 인재입니다.」
천하의 슈타이너 경이 그 정도로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단 말인가. 놀란 학과장들이 서로를 마주보았고 기르카스 경이 물었다.
「어떤 계획입니까?」
슈타이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개강 첫 수업이 와트 박사의 해부학 수업이지요? 제가 클레어의 부족함을 보완할 최고의 파트너를 준비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