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와 해수는 바다로 향했다. 해수는 가까이서 보는 바다는 처음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수차례 하늘과 땅을 오가며 어떻게 이런 곳이 있는 걸 몰랐던 건지 지금 온 게 아쉬울 정도 였다.
‘오고 싶어도 알아야 오지.’
그렇지 싶어 해수는 혼자서 끄덕였다. 지상에 대해 알아야 올 것 아닌가. 아는 것이라고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길, 국밥집, 그리고 심부름 다닌 산들뿐이었다.
“뭘 그렇게 끄덕여요?”
현우는 해수를 빤히 바라봤다.
“그냥 이런 곳을 좀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가도…. 뭘 와봤어야 알지. 싶어서 끄덕였어요.”
“나도 보기만 했지 이렇게 백사장을 걷는 건 꽤 오랜만인 것 같네.”
“왜요?”
“같이 걸을 사람이 없으니깐?”
현우의 의문형 대답에 해수는 풋 하고 웃어버렸다. 대답을 고민하는 현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갑자기 올라오는 파도에 해수는 놀라 위로 뛰어갔다.
“으아아아아악!”
해수의 고함소리는 온 바다에 울릴 정도였다. 멀리서 봤을 땐 분명 큰 파도였는데 막상 올라오니 작아져 버렸다. 해수는 머쓱해졌다.
“하하하하.”
해수의 모습에 현우는 크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해수 고함에 파도도 놀라 사라졌네.”
현우는 눈가에 맺힌 눈물까지 닦으며 웃기 바빴다. 해수는 눈을 매섭게 뜨고 현우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어요? 내가 얼마나 무안할지 생각은 안 들어요?”
“하하하, 힘들어. 배가 아프다고요.”
“쳇.”
해수는 입이 뾰로통하게 나와 먼바다만 바라봤다. 까만 암흑. 파도 소리가 전부인 곳에 현우와 둘이었다. 현우가 웃음을 멈추고 해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바람에 헝클어진 해수의 긴 머리가 현우의 손끝에 닿았다. 현우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아까 밥 먹을때부터 생각했는데, 머리를 묶던가.”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머리카락이 닿은 손 쪽으로 심장이 옮겨간 것 마냥 두근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머리끈이 없다고요. 카페에 두고 왔나 봐. 계속 찾았는데 없어요.”
해수가 계속 가방과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머리끈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작은 소용돌이 바람이 해수를 감싸자 해수의 머리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긴머리가 진짜 선녀 같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았어.”
현우의 말에 해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머리가 헝클어져 해수의 얼굴을 덮었다. 내 정체를 들킨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이 없는 질문들만 쏟아지던 그때.
“물론 지금은 귀신같고.”
현우의 말에 해수의 숨이 턱 하고 풀렸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니 현우는 앞에서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느라 바빴다.
“으이그! 진짜!”
해수는 주먹으로 현우의 어깨를 때렸다. 현우는 재미있는지 하하 웃기 바빴다. 해수는 현우의 웃는 모습에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밝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이 모습을 나만 볼 수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날 김 비서님처럼 대해줘요.”
“그럼 맨날 그만두라고 할 텐데요?”
“그럼 나는 뭐 순순히 그만두나? 내가 어떤 사람인데? 김 비서님보다 더 하다고요.”
두 사람은 가볍게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잠시나마 위로가 되었구나.’
해수의 마음이 흡족해졌다. 욕심은 작아져 사랑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마음을 나누는 것만이라도 어딘가 싶었다. 해수는 자신이 옆에 있는 동안 현우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다. 혼자 외로이 살았을 대군에게 위로가 되어주자 마음먹었다.
***
“아하 아 암.”
다음날 출근한 해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만 했다. 헤어진 시간은 새벽이었고 잠든 시간은 동튼 새벽이었다.
‘해수 일 때는 잠 같은 거로 하품할 일이 없었는데…. 사람은 이렇게 힘들구나.’
해수는 테이블을 닦으며 한숨과 하품을 연신 해댔다.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오자 해수는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다름 아닌 현우와 김 비서였다.
“해수 씨!!”
현우보다 김 비서가 더 반가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해수는 그런 김 비서가 귀여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대지 말라고.”
현우는 해수가 김 비서를 보고 웃는게 거슬렸는지 괜히 심통을 부렸다.
“어쩐 일이세요?”
“이거 먹으라고.”
현우는 쭈뼛쭈뼛 피로회복제를 내밀었다. 해수는 눈이 동그래져 현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현우는 쑥스러워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아. 본부장님 완전 배신.”
옆에 있던 김 비서가 뾰로통해졌다.
“왜, 뭐가.”
“난 밤새고 일을 해도 이런 거 챙겨 준 적도 없으면서.”
“김 비서는 알아서 잘 챙겨 먹잖아. 나한테 들어오는 선물들도 다 자기가 먹으면서….”
“그래도 알아서 먹는 거랑 이렇게 챙겨주는 거랑 같아요! 이러니 둘이 사귄다고 소문이 나지.”
김 비서는 마음속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걸 알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귀속에 말이 들어간 후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뻔히 두 분 아닌 거 아는데….”
김 비서는 죽을죄를 지은 것 마냥 머리를 숙였다.
“맞아. 그 소문.”
현우의 덤덤한 말에 김 비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귄다고요? 두 분이?”
“응.”
현우의 당당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고개를 떨군 해수를 보니 현우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해수의 볼이 불그스레 져 있었다.
“와…. 어떻게 이런 일이….”
김 비서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카페를 나섰다. 김 비서의 반응에 놀란 해수가 따라가려 했지만, 현우가 잡았다.
“내버려 둬. 쉬고 이거 먹고 해. 어제 늦게 들어가서 힘들잖아.”
“그렇긴 한데….”
“그럼 난 오찬 회의 있어서 먼저 가.”
해수는 카페를 나서는 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일찍 출근하는 직원들은 아침부터 현우가 카페를 온 걸 보고 수군거렸다. 오늘도 전쟁이려나 싶어 해수는 다시 큰 숨을 쉬었다.
***
“해수랑 나랑 사귀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
책상에 앉아 있는 김 비서를 보며 현우는 툭툭 말을 던졌다.
“아니, 관심 없다며요. 이상한 여자라면서요.”
“근데?”
“진짜 사귀는 거라고요?”
“응.”
쉬지도 않고 대답하는 모습에 김 비서는 후유 하고 숨을 쉬었다. 실은 김 비서는 해수를 조금씩 호감이 생기고 있었다. 처음엔 현우의 말처럼 해수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겪을수록 해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본부장님은 언제고 마음을 열지 않을테니 그 옆을 내가 지켜주면 나와 잘될 수도 있겠지 생각한 시간은 허탕이 됐다.
“행복하게 해주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회의 준비나 해.”
김 비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우는 일을 재촉했다. 김 비서는 심통이 나자 서랍장을 쾅 닫았다. 하지만 현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스위스에서 계약은 잘되었습니다. 스위스에서 목재를 들여와 요즘 젊은 층이 선호하는 모던 가구를 제작하려 합니다. 국가가 변경되어 물류비 상승으로 단가는 높아지겠지만 선호도는 더 높아질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현우는 임원들 앞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임원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싸기만 해서 팔리는 시대는 지났다. 돈을 더 주더라도 좋은 물건을 선호하는 게 요즘 소비층이었다.
“모던 가구 유행한 지가 언젠데!”
아니나 다를까 현우의 의견에 재남이 반기를 들었다.
“심플 오브 베스트입니다. 세월이 가면 더하고요. 핵가족 시대입니다. 더는 옛날처럼 한 가정에 많은 가구가 필요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한국 정서가 어디가?”
재남은 지지 않고 말을 받았다.
“정서는 그대로지만 가구는 달라졌습니다. 기능이 좋고, 편안하고, 집의 안락함을 원합니다.”
“뭐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던가.”
재남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사업의 견해가 달랐지만, 굳이 그걸로 트집 잡고 싶지 않았다. 현우의 결혼 만 재남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회사는 말아먹지만 않으면 됐다.
“아니 본부장님은 이렇게 출중하신데 왜 결혼을 안 하시는 겁니까.”
회의가 끝나고 다과가 시작되자 이사들이 편하게 말을 걸었다.
‘내 결혼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감 놔라 배 놔라 구나.’
현우의 마음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표현할 순 없었다. 이 사람들이 내 편인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게요. 곧 해야 할 텐데요….”
평소와는 다른 대답에 이사들은 눈이 번뜩거렸다. 전 같으면 일이 더 좋다며 결혼 같은 건 생각 없다고 딱 잘랐을 사람이 말을 흐렸다.
“아니 본부장님 곧 좋은 소식 들리는 거 아닙니까?”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이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축하 인사를 건네지만, 재남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회장님께서 허락만 하시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
현우가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재남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주위 이사들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웅성거렸다.
“아니 아들 녀석 결혼한다는 데 기를 쓰고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이사들에게 한 번 물어볼까?”
현우를 망신주기로 작정했다. 카페 알바와 연애하는 본부장이라. 체면 차리는 걸 좋아하는 이사들이 그걸 좋다고 할 일은 없었다.
“뭐 그거야 두 사람이 좋다면야….”
이사들은 말을 아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거 보니 회장이 반대하는 게 분명했다. 이럴 때 노선 잘못 탔다가는 큰일이 날 터였다.
“그러지 말고 결혼까지 할 작정이면 불러오지 그러냐.”
재남은 연이어 현우에게 반격을 했다. 네가 먼저 미사일을 쏴? 그럼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어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하지만 일을 하는 사람이니 저녁에 따로 보는 건 어떨까요.”
현우의 말에 이사들이 수군거렸다. 어느 집 자제인지 궁금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모두 현우의 연애 상대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러자. 나도 얘가 뭐 연애를 한다는 데 어떤 여자인지를 모르겠네.”
재남이 능청스럽게 말하자 현우는 속으로 이가 갈렸다. 다 알면서, 뒷조사를 하고 해수를 불러내 경고를 했으면서 모르는 척 하는 재남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회장님이 모르시면 누가 압니까.”
모두들 재남의 비위를 맞추려 안간힘을 썼다. 이사들의 태세 전환에 모두가 적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해수 씨 준비시켜.”
현우는 작게 김 비서에게 말했다. 판은 자신이 몰고 갈 테니 그동안 해수의 치장을 해야 했다. 김 비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해수 씨! 큰일 났어요!”
해수는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있었지만 김 비서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서. 나와요.”
“저 일 해야 하는데….”
해수는 난처한 얼굴로 점장을 바라봤다.
“점장님 좀 있다가 우리 비서실 식구 보낼 테니 해수 씨 좀 빼갈게요.”
“네. 충원해주는 거 잊지 마세요.”
“그럼요.”
김 비서는 얼른 해수를 데리고 나섰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해수 씨를 이사님들에게 소개할 모양이에요.”
“누가요?”
해수의 물음에 김 비서는 잠시 고민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해수 씨가 지금 가서 본부장님의 편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해요.”
김 비서는 급히 차를 운전했다. 김 비서는 운전하며 이사들의 이름과 직함이 적힌 서류철을 해수에게 넘겼다.
“이거 최대한 빨리 외워요.”
해수는 장난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김 비서의 모습을 보고 상황의 긴박함을 깨달았다.
***
“아니 대체 본부장님이 만나는 여자분이 어떤 분이신지 참 궁금합니다.”
어느새 회의는 뒷전이 되어있었고 현우의 사생활을 캐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회장님 이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손주 볼 생각만 하시면 되겠어요.”
이사들은 재남에게 딸랑거리며 비위를 맞췄다. 하지만 재남은 그 어떤 말에도 호응해주지 않았다.
“제가 회장님 마음에 들기가 어렵죠. 회장님께서 워낙 눈이 높으셔서요.”
현우는 아버지를 올리는 척하며 사람들 모르게 깎아내렸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데리고 오든가.”
재남은 삐죽대며 말했다. 이런 곳에 데리고 올 배포가 있다면 적어도 그 성의는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현우가 일어나며 회의실 문을 열었다. 거기엔 까만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화장을 마친 해수가 서 있었다. 현우조차 해수인지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평소 머리를 질끈 묶던 소녀 같던 사람은 여자가 되어있었다.
해수의 아름다움은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차려입었다고 해서 분위기가 변할 수 있었지만, 이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신해수라고 합니다.”
해수는 당당하게 미소지으며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